삼대목에 왜 아리랑이 없었나

신라의 향가집 삼대목의 행방을 추적해보고 아리랑이 어떻게 해서 민족의 노래가 됐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둘 다 매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특히 삼대목은 신라가 신라 망국의 정치적 혼란기에 이름 모를 승려에 의해서 궁중에서 빼돌려져 비밀리에 전달되다가 350여 년 후 일연스님의 손에 들어간 것으로 확인됩니다. 이후 삼대목의 행방은 어찌 됐을까요? 아리랑은 아버지 혁거세를 비운에 보내야 했던 딸 아로의 눈물 노래였습니다. 당연히 슬픈 곡조여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를 지키지 못한 딸로서의 회한이 담긴 노래였을 것입니다. 눈물가가 슬픈 노래였을 것이라는 사실은 전통적인 장례 풍습에서도 충분히 확인이 가능합니다. 우리 전통에는 망자의 주변 사람들이 장례식장에서 울어주는 전통이 1960년대 70년대까지도 남아 있었습니다. 멀리서 찾을 것도 없습니다. 저의 경우 할아버지, 할머니, 상이 났을 때 주변 마을의 여인들이 몰려와서 상주를 대신해 울어주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돈을 받고 울어주는 여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녀들은 프로 울음꾼입니다. 그녀들은 세상에서 가장 슬프게 우는 사람들입니다. 숙달된 조교입니다. 아마추어인 상주의 울음이 아니라 프로의 울음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은 그녀들의 울음소리에 무너지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저승길을 떠나가는 영혼들도 울음소리에 격하게 감동받고 가던 걸음을 멈추었을 것입니다. 종이 있는 집에서는 남녀 종이 대신 울어주기도 했습니다. 사내종을 행자라 하고 곡을 하는 여종을 곡비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행자곡비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행자는 장례 치르다 행 행위라는 한자는 장례 치르다 행입니다. 장례를 치를 때 울어주는 놈 이런 뜻이 되겠습니다. 곡비는 울어주는 여자 종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는 울음으로 망자의 저승길을 밝혀주는 전통이 있었던 것입니다. 또 우리를 놀라게 하는 충격적 고대 문화사 하나가 있습니다. 울음으로 망자의 저승길을 밝혀주는 풍속이 유라시아 대륙 서쪽 끝 이스라엘에도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뿐만 아니고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도 죽은 자를 위해 슬피 우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심지어 우리처럼 돈을 받고 직업적으로 눈물 흘려주는 젊은 여자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녀들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자기 옷을 찢으며 얼굴을 먼지 등으로 얼룩지게 하고 울었습니다. 머리를 산발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머리를 산발하는 것까지도 우리와 똑같습니다. 그녀들은 여러 명이서 마치 합창하듯이 슬피 울었습니다. 구약성서, 신명기를 보면 이러한 풍속이 곳곳에서 확인됩니다. 놀랄 만한 수수께끼입니다. 향가를 연구하다 보면 기독교의 뿌리가 되는 유럽 지역의 고대 문화가 우리나라 고대 문화와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자꾸 발견됩니다. 우선 그리스 로마의 경우 저승바다 문화가 있었습니다. 저승의 뱃사공 카론이 망자의 영혼을 배에 태워서 강을 건네줍니다. 우리에게도 저승의 뱃사공 우라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드렸습니다. 또 ‘희생물을 불에 태워 연기를 하늘로 올려서 신을 기쁘게 한다’라는 번제문화도 있었습니다. ‘구지가’와 신라의 향가 ‘해가’를 보면 제사 고기를 불에 태워 연기를 하늘로 날려 보내겠다고 하고 있었습니다. 또 장례식 울어주었던 눈물과의 전통까지도 서로 같습니다. 고대 이스라엘과 우리도 망자를 위해 슬프게 울어주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산발하는 것까지도 똑같습니다. 어찌 된 일일까요? 저는 향가와 만엽집 전문가에 불과합니다. 고대 인류 문화사 전문가가 아닙니다. 저 역시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고대 문화사회에 무언가가 있는 게 분명합니다. 이러한 문화사회의 수수께끼를 누군가가 알아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향가를 여러 명이 부르듯이 전통 장례식에서는 여러 명이 함께 울어주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합창하듯이 울었습니다. 당연히 혁거세의 장례와 제사에서도 그를 위한 눈물과가 여러 명에 의해 합창하듯이 불렸고 울음을 울어주었을 것입니다. 왜 여럿이 불렀을까요? 향가에 중구삭금(衆口鑠金)의 법칙이 있습니다. 여러 명의 입은 쇠를 녹인다. 이러한 법칙입니다. 고대인들은 향가라는 것이 소원을 이루어주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향가를 혼자 불러도 소원이 이루어집니다. 그렇지만 여러 명이 부르면 향가가 가진 힘이 10배, 100배 더 세워져서 소원이 더 잘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명이 부른 것입니다. 현대에 들어 SNS로 공유하고 격하게 댓글을 달고 이런 것도 고대의 전통을 이어받는 디지털 중구삭금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도 선한 영향력을 가질 좋은 영상을 발견하면 디지털 중구삭금 운동을 벌여봅시다. 시해당한 혁거세의 딸 아로가 제사를 주관하게 되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아버지를 잃은 딸 아로의 슬픔은 그 누구와 비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바치는 아리랑은 아로가 지었을 것이고, 아로는 자신의 슬픔을 가장 곡진하게 표현했을 것입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혁거세가 건너는 저승바다여 잔잔하라 아로가 지은 눈물가 아리랑 가사입니다. 아마도 서기 6년 첫 제사를 국가 차원에서 치를 때 아버지 일은 여인 아로에 의해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서기 6년 아버지 제사를 주관하면서 딸 아로는 여인들을 불러 모아 비운에 가신 아버지에게 바치는 아리랑을 며칠이고 목 놓아 부르게 했을 것입니다. 아로의 한을 담은, 회한의 마음을 담은 서러운 아리랑 노래가 혁거세가 떠난 땅 지금의 나정을 울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혁거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도 따라 불렀습니다. 아리랑은 사계절 내내 서라벌은 울리게 됐습니다. 울어주는 여인들까지 동원됐을 것입니다. 아로와 여인들의 붉은 눈물이 동백꽃이듯이 서랍을 땅에 뚝뚝 떨어졌을 것입니다. 혁거세가 신라의 건국왕이기 때문에 건국 시조 혁거세를 위한 슬픈 노래는 당시만 불린 게 아니라 신라가 망할 때까지 국가 차원에서 건국 시조 제사 때마다 주기적으로 조직적으로 계속해서 불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공무원 사회도 항상 그러하듯이 노래 가사는 한자로 표기되어 제사를 주관하던 부서에 보관됐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리랑은 밖으로 나갔습니다. 프로 가인들에 의해 신라 민중 속으로 들어가 퍼졌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935년 천년 신라의 범종소리가 그치게 되었습니다. 신라가 고려 왕건에게 항복했습니다. 신라가 없어지자 건국 시조 혁거세를 위한 제사를 더 이상 치를 수 없게 됐습니다. 고려 왕조에서 망국 신라의 건국 시조 박혁거세를 기리는 눈 물가를 부른다는 사실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불순하고 불온한 행동으로 인정될 것입니다. 보관하고 있던 노래 가사들은 버려졌을 것입니다. 아리랑과 비슷한 이유로 인해 신라 왕실에서 보관해오던 일체의 다른 향가들 역시 전량 폐기되었을 것입니다. 향가를 써놓은 글은 불온 서류 취급을 받았을 것입니다. 신라 진성여왕 때 만들어진 향가집 삼대목도 공식적으로 이때 폐기됐을 것입니다. 저는 감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향가는 한 나라와 그 나라 왕실이 주관했던 제천의 노래입니다. 그 나라가 망하면 폐기되는 게 너무도 정상일 것입니다. 망한 나라와 망한 나라의 왕실에서 사용하던 향가를 사용한다거나 보관한다는 것은 매우 불온한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것은 원칙의 영역입니다. 세상의 일이라는 것은 원칙대로 되지 않습니다. 항상 예외가 있는 법입니다. 목숨을 걸어야 할 위험한 일인 줄 뻔히 알았을 것입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어느 스님께서 신라 망국의 혼란 속에서 삼대목과 향가들을 왕실 밖으로 빼내고 깊은 산중의 승려들끼리 비밀리에 손에서 손으로 전달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마침내 빼돌린 삼대목과 향가가 손바꿈을 하며 계속 이어지다가 향가 제작법과 함께 일연 스님에게 전달됐습니다. 고려의 국사까지 지냈던 일연 스님이 어느 날 돌연 속세 인연 어머니를 봉양해야 한다면서 첩첩산중 군위의 인각사로 들어가셨습니다. 과연 천하의 고승께서 어머니 봉양 때문에 말년에 인각사라는 첩첩산중으로 들어가셨을까요? 쉽게 납득되지 않는 거치이십니다. 저는 이런 스님께서 어머니의 봉양보다는 다른 목적이 있어 인각사에 은거하신 것이 아닐까, 깊은 산골에 은거하신 것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훗날 알고 보았더니 스님께서는 인각사에서 비밀리에 삼국유사를 저술하신 것으로 밝혀집니다. 고려왕조 입장에서는 불온한 작품이었던 향가를 산골 인각사에 은거하시면서 삼국유사를 쓰면서 그 속에 집어넣는 작업을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수록된 향가들도 살펴보면 삼국유사 속에 아주 꼭꼭 숨겨놓듯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향가는 숨겨져 있었습니다. 삼국유사 속에서도 숨겨져 있었습니다. 신라의 국태민안을 빌던 향가 작품을 책으로 만들어 고려시대 왕조 때 왕조에 살면서 책으로 만들어 펴낸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비밀스럽게 처리된 게 분명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삼국유사는 누가 만들었는지도, 언제 만들었는지도, 왜 만들었는지도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모든 게 안개 속에 쌓여 있습니다. 삼국유사 편찬이 정말 앞뒤의 맥락을 생각해 보면 볼수록 있을 수 없는 기적과 같은 일들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리랑은 삼국유사에도 수록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리랑은 신라 개국신화죠? 혁거세에게 바쳐진 노래였기 때문입니다. 삼국유사에 실린 향가 전체를 검토해 보았더니 몽골 치하 국난 극복을 위한 작품을 엄선해서 수록한다. 이러한 편찬 기준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 기준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아리랑은 삼국유사 수록 대상에서 제외됐을 것입니다. 제가 삼국유사에 수록된 작품들을 새로 해독해 본 결과 나라의 위기시 신라 위기 시에 사용하고 보관해 놓은 것들이었습니다. 국가의 1급 비밀에 해당하는 내용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러한 형과 작품들이 이렇게 고도의 1급 비밀이랄 작품들이 왕실 밖으로 세어나갔을까요? 저는 신라 망국의 혼란기에 삼대목이 빼돌려졌다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어찌했든 고대 역사와 전통 문화 전승에 우리나라 불교계가 큰일을 해내셨습니다. 이 기회를 통해 신라 왕국과 고려 통일기 정치적 혼란기에 목숨을 걸어야 가능했던 일을 해낸 스님들과 이것을 비밀리에 전해온 불교계의 전통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중요한 수수께끼가 하나 남아 있습니다. 일연스님께서 삼국유사 편찬 작업을 마치시고 본인께서 전달받은 향가 뭉치, 향가 보따리, 향가들을 어떻게 처리하셨을까요? 분명히 저는 폐기하지 않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그 책을 쓰는 사람들이 그 자료를 얼마나 소중히 하는지 그것을 저는 실제로 알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어떠한 보완 조치를 해놓으셨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신라 왕실에서 빼돌려진 삼국유사와 다른 향가들이 삼대목과 다른 향가들이 어딘가에 감추어져 있을 것입니다. 보관되어 있을 것인데 그곳이 어디일까요? 혹시 어느 사찰 부처님의 뱃속에 복장되어 있지는 않을까요? 아마 아리랑 원문도 함께 있을 것입니다. 나라에서 보관해 오던 아리랑은 비밀리에 빼돌려졌건 불에 태워졌건 간에 공식적으로는 폐기됐습니다. 그러나 민중의 입으로 전해진 아리랑은 끈질긴 생명력을 갖게 됩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집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리랑은 신라 땅을 벗어나 다른 여러 지역으로 퍼져나갑니다. 밀양 아리랑, 진도 아리랑, 정선 아리랑 등등이 그것입니다. 당연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민족이 여러 가지 역사의 모진 곡절을 거치자 가사도 곡조도 바뀌어 갔을 것입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이러한 향가의 용어들과 아로가 만들어놓은 애조 띤 주제는 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리랑의 슬픈 곡조가 역사에 버림받은 민중들의 아픈 마음을 위로해 주었습니다. 상처받은 민중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습니다. 무자비했던 몽골 기병의 침입이 있었습니다. 삼별초는 제주도까지 밀려가면서 목숨을 초개처럼 던져가면서 끝까지 몽골에 저항했습니다. 임진왜란이 있었습니다. 배 12척으로 수백 척의 일본군에 맞서야 했습니다. 결사 항전이 아니라면 생각할 수도 없는 전투일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이렇게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일제에 의한 망국도 있었습니다. 이봉창 의사의 수류탄 투척,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히토 저격 등 목숨을 건 결행들이었습니다. 역사가 요동을 칩니다. 그때마다 아리랑은 곡과 가사가 격하게 변주됐을 것입니다. 현대에 일어난 민족의 비극 6. 25 때도 아리랑은 우리와 함께 했습니다. 이제 아리랑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차원을 넘어 민족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지금 이 시각에도 아리랑은 민족의 마음속에서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을 것입니다.

글 | 김영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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