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비운의 왕자들, 해명과 호동

고구려 유리 대왕이 젊은 시절에 즉위하여 왕후를 맞았으나 1년 3개월 만에 사별하니 왕자가 없었던 듯하다. 다시 두 여인을 맞으니 화희는 골천 사람의 딸이고, 치희는 한나라 여인이었다.
두 여인이 남편에게 사랑을 받으려고 서로 다투며 불화하므로 유리 대왕이 양곡(凉谷)의 동·서에 2개의 궁을 지어 살게 하였다.
주몽과 고구려의 위상에 의거하면 치희는 한나라 공주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골천도 진한의 1국으로 여겨지고, 또 양(凉)은 섬서성이나 산서성에 있는 지명으로 나타난다.
뒤에 대왕이 7일 동안 기산(箕山)으로 사냥을 나간 사이에 화희가 치희를 꾸짖어 “너는 한나라의 비첩으로 어찌 무례함이 그리 심한가?” 하니, 치희는 부끄럽고 한스러워 친정으로 가 버렸다.
유리 대왕은 말을 달려 치희에게 가서 달랬으나 그녀는 돌아오려 하지 않았다. 대왕이 돌아오다 꾀꼬리가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의 처지를 빗대어 이렇게 읊으니 「황조가」라 전해 온다.
”꾀꼬리는 오락가락 쌍으로 노니는데, 외로운 이 몸은 뉘와 같이 돌아갈까?
유리 대왕은 정서가 풍부하고 시가를 짓는 솜씨가 훌륭한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화희가 만약에 한나라를 두려워하였다면 한나라의 치희를 감히 학대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항우에게 지고 있던 한 고조를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도와주었던 연·북맥에서 북맥이란 바로 해모수의 부여 또는 고구려였으며, 당시 한나라보다 더 커다란 세력을 갖고 있었다.
유리 대왕 14년 동부여 금와왕의 아들 대소왕이 고구려에 신하의 예를 요구하며 고구려 왕자를 볼모로 보낼 것을 강요하였다.
유리 대왕은 성장할 때까지 20년이나 동부여에 살았기 때문에 예차원에서 왕자 도절을 보내려 하였으나, 10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왕자가 두려워하며 가지 않으려 하였다. 이에 대소왕은 5만 군사로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큰 눈을 만나 얼어 죽는 자가 많아 곧 돌아가니 고구려로서는 큰 다행이었다.
그로부터 6년 후에 “왕자 도절이 죽었다”고 『삼국사기』에 썼는데 아무런 설명이 없어 도무지 왜 죽었는지 알 수가 없다. 신채호 선생은 도절이 근심과 울분으로 병사했다고 보았는데 아마 이것이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당시의 정황을 유추해 보면 이렇다.
두 여인을 들이고 11년 뒤에 도절이 이미 왕자의 신분이었으니 그는 화희의 아들이었을 것이며 많아야 10살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그에게는 3살 어린 동생 해명이 있었는데, 그 어머니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도절이 동부여에 볼모로 가지 않은 후 6년 동안 마음고생이 매우 심했던 상황을 감안해 본다면, 해명이 아마도 배다른 동생이었기에 두 어머니 사이의 갈등이 더욱 격화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대왕이 확실하게 왕자의 편을 들지 않으므로 결국은 죽게 된 것 같다.
도절이 죽은 2년 후 유리 대왕은 도읍을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옮겼으나 왕자 해명은 아버지의 천도함이 비겁하다 하여 졸본에 남아 있었다.
유리 대왕은 다음 해 해명을 태자로 세웠으나, 해명은 그 후로도 4년간 그대로 졸본에 머물렀다. 해명은 힘이 세고 담대하여 무용을 좋아하니 황룡국왕이 그에게 강궁을 주어 시험해 보려고 하였다. 이에 해명은 사신 앞에서 활을 당겨 꺾어 부러뜨리며 “내 힘이 세서 그런 것이 아니라 활이 강하지 못하다”고 하였다. 황룡국왕이 이를 듣고 부끄러워하였다. 추모 대왕 때에 고구려는 황룡국왕을 비롯하여 수많은 나라들을 거느렸었다.
유리 대왕은 이야기를 듣고 해명이 장차 국가를 위태롭게 할 어리석은 자식이라 생각하여 황룡국왕에게 전갈을 보내, ”해명은 자식으로서 불효하니 그를 죽여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2달 후 황룡왕은 사신을 보내 태자 해명을 만나 보기를 청하였다. 태자가 가려고 하니 옆에서 간청 하였다.
”이웃 나라에서 까닭도 없이 만나기를 요청하니 그 뜻을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이에 태자가, 하늘이 나를 죽이고자 않는다면 황룡국왕이 나를 어찌하겠느냐? 하며 기어코 가서 황룡국왕을 만났다. 황룡국왕은 당초 해명을 죽일 생각이었으나 그를 직접 만나보고는 경애하게 되어 오히려 후대하여 보냈다.
1년 후 유리 대왕은 태자에게 사람을 보내 말하였다.
“내 도읍을 옮겨 백성을 편안케 하고 나라의 기업을 굳게 하려고 하는데 태자는 나를 따라오지 않고, 힘의 굳셈을 믿고 이웃 나라와 원한을 맺으니 아들 된 도리로 이와 같을 수가 있느냐? 칼을 주어 보내니 스스로 자결하라.”
해명이 곧 자결하려는데 곁에서 만류하고 말하였다.
“유리 대왕의 큰 아들은 이미 돌아가시어 태자께서 마땅히 왕위를 이을 것인데 지금 아버님의 사신이 한 번 왔다고 자결한다면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어찌 알겠습니까?”
그러나 태자 해명은 결연히 말하였다.
”전에 황룡국왕이 강한 활을 보냈기에 나는 그가 우리를 가벼이 볼까 염려하여 활을 꺾어 보답하였는데, 뜻밖에 아버지께서 나를 책망하고 지금은 다시 나를 불효하다고 칼을 보내 자결하라 하시니 아버지의 명령을 따르겠다.”
말을 마치고 곧 동쪽 언덕으로 가 땅에 창을 꽂아 놓고 말을 달려 창에 꽂혀서 죽으니 나이가 21세였다. 고구려 유리 대왕이 국가의 안위를 위하여 태자를 자결하도록 했다고는 하나 꼭 죽여야만 했는지에 대해 비정한 아버지라는 비난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태자는 자기의 위치를 감안하여, 아버지 곁에 늘 있어야 함에도, 국내성이 아닌 졸본에 홀로 떨어져 지냈으니 오해와 화를 사게 된 것이다.
그 해에 동부여의 대소왕이 사신을 보내 유리 대왕을 꾸짖으니, 유리 대왕은 최대한 저자세의 회신을 보내려고 하였다. 이때 어린왕자 무휼이 죽은 해명처럼 기개가 대단하여, 아버지의 비굴함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사신을 보고 말하였다.
”우리 선조는 신령의 자손으로 현명하고 재주가 많았는데, 동부여의 대왕께서 질투하고 선대 추모 대왕께 참소하여 말 사육을 시켜 욕을 보인 까닭으로 불안하여 피해 나온 것이오. 지금 동부여의 대왕께서 예전의 잘못은 생각지 않고 군사의 많은 것만 믿고 우리 고구려를 경멸하고 있소.”
4년 뒤 대소왕이 대거 쳐들어오니 유리 대왕은 아들 무휼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다고 격노하였으나, 나이도 많아져 옛날처럼 왕자를 또 죽일 수도 없으므로 무휼이 방어하도록 명령하였다. 무휼이 기묘한 계략으로 적을 섬멸하니 동부여는 그 후 고구려와 겨룰 수가 없이 되었다. 유리 대왕은 크게 기뻐하고 무휼을 태자로 세워 군국 정사를 맡겼다.
무휼은 태자가 된 지 4년 만인 서기 18년에 왕위를 이으니 3대 대무신대왕이다. 대왕은 갈사국 왕의 손녀를 차비(次妃)로 맞아 왕자를 얻었는데 얼굴이 특이하며 풍모가 수려하여 이름을 호동이라고 하였으며 그를 심히 사랑하였다. 대왕 15년(서기 32) 호동이 옥저를 지나가는데 낙랑국 왕 최리가 거기 나왔다가 호동을 보고, “그대 얼굴을 보니 북국 신왕의 아들 호동이 아니냐? 하고 놀라워하였다. 낙랑국 왕은 고구려를 두려워하고 있었으므로 호동을 데리고 궁으로 가서 자기 딸과 결혼시켰다.
당시 낙랑국의 무기고에는 적이 쳐들어올 때 울리는 신기한 북과 나팔이 있어 나라의 보물로 여겼다. 호동은 귀국한 뒤 낙랑국 공주에게 사람을 보내 말하였다.
“그대가 만약 무기고의 북과 나팔을 부순다면 내가 곧 정식으로 부인으로 삼을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삼지 않겠다.”
이에 공주가 몰래 무기고에 들어가 칼로 북과 나팔을 부수고 호동에게 알리니, 호동과 대무신대왕은 낙랑국을 습격하였다. 불시에 공격을 당한 낙랑국 최리 왕은 북과 나팔이 부수어진 것을 보고 딸인 낙랑공주를 죽인 뒤 항복하고 말았다.
호동이 나라에 큰 공을 세우자 고구려 왕후는, 갈사국 왕비의 아들 호동이 태자가 될까 두려워 대왕에게 이렇게 말 하였다.
”호동왕자가 제 몸을 탐합니다. 비밀리 살펴보시고 만약 그게 아니라면 소첩이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대왕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어 호동을 엄히 벌하려고 하니, 측근이 호동왕자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이를 해명하지 않습니까?” 하였다. 호동이 대답하였다.
“내가 만약 사실대로 말한다면 이는 어머니의 사악함을 드러내어 아버지를 근심시켜 드리게 되니 어찌 효도라 하겠는가?
이에 호동은 엎드려 칼로 자결하였다.
대무신왕은 자신이 왕자일 때 아버지 유리 대왕이 자신의 형들을 죽게 한 것을 몸소 겪었음에도, 이번에는 자신이 사랑하는 아들인 호동을 죽게 했으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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