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진년 용 이야기

2024년은 청룡의 해라 한다. 갑은 오행으로 木으로 방위로는 동쪽이며 색깔은 靑이니 청룡의 해가 되는 것이다.
상상의 동물인 용은 우리 민족의 정신과 문화에 미친 영향은 엄청나다. 용은 다른 동물로 달리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동물로 신화와 전설의 동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상징하는 바가 거대하다.
용은 권력의 상징이면서 불교의 전래로 호국의 화신으로 자주 등장한다. 또 뱀이나 이무기 등이 여의주를 얻어 용으로 변하여 승천하게 되면 완전한 신격으로 자리 잡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용은 역사의 시작과 더불어 신이나 왕을 의미하는 중요한 상징적 동물로 인식되어 왔다. 상상의 동물이 현실의 문화를 크게 지배했던 것이다.
용을 신의 존재로 좌정시킨 것은 오래전부터다. 특히 중국의 용사상이 한국으로 전래되면서 이 상상의 동물은 권력을 상징할 뿐 아니라 사람의 세계를 관장하는 신으로까지 인식되었다. 용 사상은 불교의 전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삼국유사>에 수록되어 있는 용이 불법의 수호신으로 등장하는 여러 기록들은 이런 사실을 살펴보는 데 가장 유용한 자료다. 이와 더불어 상징성이 강한 용의 등장은 토착 신들의 권위를 추락시키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경북 청도의 대비사 꽝철이 이야기나 견훤의 부계를 지렁이로 표현하는 것 등에 나타나듯이 토착신의 권위를 위협하는 용의 등장은 혼란과 아울러 새로운 힘의 등장을 갈망하는 염원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①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 호법용
불교를 수호하는 호법용으로 인식하게 된 것은 신라시대에서 시작되었다. 원래 불교에서는 용을 호법의 상징으로 내세웠는데, 이러한 전통이 신라에 그대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황룡사 창건에 관한 이야기가 대표적인 기록이다.
황룡사는 원래 궁궐을 짓기 위한 터였는데, 땅을 고르다가 황룡이 나타났기 때문에 절을 세웠다고 한다. 또한 자장이 당나라 유학 중 太和池 변을 지나다가 만난 신인과의 대화 기록을 보면 황룡사를 보호하는 호법용이 자신의 맏아들이라고 한다. 법왕의 명을 받고 그 절을 호위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불법을 보호하는 존재로 용이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호법용의 존재는 불교의 시원지인 인도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불교대사전>에 의하면 불교에서는 용은 불법을 수호하는 신으로 모시고 있는데, 이는 고대 인도의 사신숭배사상에서 시작되었으며 불교가 중국으로 전파되면서 중국의 용에 신적 개념을 부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선한 용은 불법에 귀의한 사람을 지키고 감로를 내려 오곡을 성취시킨다고 한다.
구미래는 <한국인의 상징세계>에서 불교의 경전에서 찾아볼 수 있는 용의 성격이나 역할 등에 해해서 크게 세 가지의 유형을 제시했다. 첫째는 불교에 귀의하여 불법을 수용하는 용, 둘째는 인간 세상에 정법을 펼쳐 이로움을 주는 용, 셋째는 경전을 봉인하고 있는 용이다. 결국, 용의 존재가 불법을 보호하는 신격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용의 상징은 우리나라 들어와 호국용으로 승화되었다. 그만큼 용에 대한 인식이 확고하게 자리 잡은 것이다. 대웅전이나 탑, 그리고 부도 등 사찰 곳곳에서 용의 모습을 표현한 것들을 보면 용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깊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② 벽사와 길상의 상징
용은 전지전능한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람을 괴롭히는 귀신을 능히 쫓아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귀면문이 용의 머리를 상징한다는 주장도 그런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귀면문은 백제의 전돌에서 주로 나타나며, 귀면와라는 망와에 가장 많이 나타난다. 귀면와는 동북아시아 나라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문양 중 하나인데, 잡귀를 쫓는 기능을 갖고 있다고 한다.
서울 등지에서 유행했던 문배 속에서도 용의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문배 속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정월 초, 집안에 들어오는 잡귀 등 나쁜 기운을 쫓아내려는 의도에서 글씨나 그림을 대문에 붙이는 풍속이다. 이때, 용의 그림을 그리기도 하는데 이것은 용이 용이 가지고 있는 벽사의 힘을 믿었기 때문이다.
용은 길상도로도 자주 사용된다. 등용문이라는 표현이나 용꿈을 꾸면 높은 벼슬로 나아가거나 재복이 들어온다고 믿었다. 특히 과거를 통해 벼슬길에 오르는 것을 최고의 관심사로 여겼던 사대부들에게 용은 가장 상서로운 동물이었다.
용의 자체가 벼슬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태몽에 용이 나오면 큰 인물이 탄생한다고 여겼다. 태종 이방원의 처 윤씨가 용꿈을 꾸어 얻은 자식이 훗날 조선의 최대 성군 세종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문학작품으로 이어져 <홍길동전>에서 홍대감이 용꿈을 꾸고 하녀와 관계를 맺어 태어난 아이가 홍길동이라고 나온다. <춘향전>에서 이도령의 이름이 이몽용이었으니 태몽 중의 으뜸이 단연 용꿈이었다.
이처럼 용에 대한 관심은 매우 컸다. 문인들이 사용하는 벼루 등에 용의 문양을 넣는 것은 벼슬이나 권력과 관계가 있다. 또 백자항아리에 청화나 철회 등으로 용을 그려 넣은 것도 길상을 담은 것이다.

③ 물을 관장하는 수신
<훈몽자회>를 살펴보면 용을 ‘미르’라고 표기되어 있다. ‘미르’는 물과 어원이 같다고 한다. 용이 물을 관장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도 용이 출현하면 뇌성벽력이 치고 비가 온다는 기록이 있다. 기록에서 검은 용이 출현하면 왕이나 권력층에 있는 사람이 죽었다는 것이다. 검은 색 용은 죽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용은 일찍 물을 관장하는 신격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에 비구름 없이 등장하는 용은 생각할 수 없다. <삼국사기>를 보면 진평왕 50년 여름에 몹시 가물었기 때문에 저자를 옮기고 용을 그려서 기우제를 올렸다고 한다. 기우제의 대상 신으로 용을 모셨다는 것은 당시에 용은 물을 관장하는 수신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④ 화가 나면 비를 뿌리는 용
기우제 풍습은 민간의 풍속에서도 발견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기우제를 지내면서 호랑이의 머리를 한강과 박연에 넣었다고 한다. 이것은 물속에 있는 용을 자극하려는 것인데, 용이 화가 나면 비를 뿌린다는 민간신앙적 사고방식의 표현이다.
나라에서 공식적인 기우제를 지내면서 호랑이 머리를 물속에 넣었다는 기록은 용을 노하게 만들려는 주술적 행위를 그대로 따랐음을 엿보게 한다. 물론 유교적 제의와 무당의 굿을 통한 기우제를 함께 했음은 당연하다. 그러한 제의와 어우러져 호랑이 머리를 물속에 넣음으로써 용을 자극하여 비가 오기를 기원했다.
용이 살고 있는 못에 개의 머리나 피 등을 뿌리는 방법도 널리 사용된 것 같다. 여러 고장의 지명을 살펴보면 용소 · 용연 · 용둠벙 · 용정 등과 같이 용과 관련된 연못이나 우물 등이 많다. 가뭄이 들면 이런 연못에 피를 뿌려 흐리게 함으로써 용을 노하게 만드는 것이다. 맑은 연못이 흐려졌을 때 이를 정화하기 위하여 용이 비를 내린다고 믿었다.
또한 물장난을 칠 때 “하늘님 물이 귀해 속옷을 못 빨아 입어서 시집을 못 갑니다. 어서 비 좀 내려주시오.”라고 말한다. 이런 표현은 양면성을 띠고 있다. 옷이 더러워서 시집을 못 간다는 것은 비가 오지 않아 일상생활에서 고통을 받는다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물장난을 치면서 용을 모욕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용을 수신으로 생각한 때문이다. 한재라는 극한 고통의 상황에서는 신에 대한 격렬한 모욕행위를 통해 비로 상징되는 재앙을 자초하고자 한 것이다.

⑤ 민간신앙에 등장하는 용의 의미
용과 관련된 풍속으로 용왕제와 유두날 용신제, 그리고 경북에서 가신으로 모시고 있는 용단지 등을 들 수 있다.
용왕제는 주로 어촌지방에서 전승되는 풍어제의 한 형태다. 용왕제는 용왕굿이라고도 하며, 풍어를 기원하기 때문에 풍어제라고도 한다. 제주도에서는 용왕맞이라고 한다.
용왕과 관련된 제의의 전승은 바다를 관장하는 신이 용왕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용왕제는 풍어뿐만 아니라 바다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려는 기원도 담겨 있다.
신라에는 四海祭나 四瀆祭 등의 제의가 있고 고려시대에도 사해제와 사독제가 있어 성대하게 굿이 행해졌다. 조선시대는 해와 독으로 구분하여 중요한 제장을 설치하였다. 해로는 서해의 풍천 · 남해의 나주 · 동해의 양양 등을 들 수 있으며, 독으로는 압록강, 두만강 등에서 제의가 있었다. 해와 독은 바다와 내륙지방의 중요한 강을 기준으로 나눈 것 같다. 현재는 주로 어촌지방에서 행해지고 있는데 서해안의 풍어제, 남해안의 별신굿, 제주도의 용왕맞이 등이 있다.
유두날 행해지는 용신제는 곡식이 잘 성장하도록 6월 용날에 용신에게 지내는 고사다. 주로 남쪽 지방에서 많이 행하였다. 전남에서는 논이나 밭에 제물을 차리고 용신제를 지내는 풍속이 전승된다. 파종된 농작물이 잘 자라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성장의례적 성격이 있다. 전북에서는 농신제라 하면 밀떡 등을 만들어 논밭에 뿌리거나 논둑에 꽂아 아이들이 따먹게 한다. 또 밀로 국수를 만들어 먹기도 하는데 이 역시 풍작을 기원하는 풍속에서 비롯되었다.
경남에서는 용신제, 농신제, 논굿, 논고사 등 여러 이름으로 부른다. 개떡이나 밀가루 전을 만들고 앵두와 복숭아 등 햇과일 등을 제물로 장만하여 풍년을 기원했다.
용단지 풍습은 경북에서만 전승된다. 용단지는 집안에서 모시는 가신신앙의 하나로 가정의 평안과 풍요를 기원하는 신격이다. 거칠용단지와 쌀용단지 등 두 개의 용단지를 모시는 집안도 많다. 용단지는 경기도에서 모시는 재물신이 업단지의 성격도 갖고 있다. 하지만 용단지라는 이름을 생각하면 논농사에 필요한 물에 대한 기원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⑥ 민속놀이에 등장하는 용의 존재
줄다리기, 대전의 용독기놀이, 홍성의 용대기놀이, 남원의 용마놀이 등은 모두 용과 관련된 민속놀이다. 이들 놀이는 농사에 필요한 물을 때맞춰 공급받고 싶은 바람에서 이들 놀이가 생겼다.
줄다리는 암줄과 수줄로 구분되며 비녀목을 이용하여 연결하기 때문에 남녀의 성적결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외줄인 경우에는 줄 자체가 용의 상징이다.
전북에서 줄다리기 이후에 돌솟대에 줄을 감아두기도 하는데 이것은 용의 순탄한 승천을 기원하는 행위다. 다른 지방에서는 줄이 끊어질 정도로 심하게 다투는 놀이를 하기도 한다. 이러한 행위는 모두 용을 자극함으로써 비를 기원하는 것이다.
남원의 용마놀이는 섣달그믐이나 정월 보름에 행해진다. 용말싸움, 혹은 용마희라고 하는데, 남부의 마을에서 백룡을 만들과 북부의 마을에서 흑마를 만들어 수레에 달아 싸움을 한다. 이 놀이는 마을의 평안과 풍년을 기원하고 벽사의 의미를 담고 있다. 남부 용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한다.
대전의 용독기 놀이는 문창동의 무덤거리에서 전승되던 놀이로 물싸움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 놀이는 자기 논에 물을 먼저 대려고 싸우는 물꼬 싸움에서 비롯되었다.
홍성의 용대기놀이는 모내기 등에서 일꾼들을 위해 두레패가 용대기를 앞세워 풍물을 울리면서 놀 때 다른 용대기가 나타나 서로가 선배라고 우기면서 싸움을 하게 된다. 이 싸움은 다른 두레패의 용대기에 달려있는 깃봉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으로 발전한다. 용대기놀이를 제외한 대개의 놀이가 물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또 놀이라는 형식을 통해 농경사회의 결속을 다진 전형적인 형태다.

⑦ 용알뜨기 풍속과 의미
정월의 첫 용의 날 풍습도 용을 수신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생겨났다. 이날은 농촌의 부녀자들이 다른 사람보다 일찍 일어나 마을의 우물물을 먼저 길어 와야 좋다고 한다. 용이 하늘에서 내려와 우물에 알을 낳기 때문에 이 우물물을 길어와 밥을 해 먹으면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또 물을 관장하는 용의 알을 먹는 것이니 그만큼 용의 덕을 볼 수 있다고 믿었다. 먼저 우물을 길어간 사람이 그 안에 지푸라기를 띄워놓는다. 뒤에 온 사람이 이것을 보면 다른 우물에서 물을 길어야 했다.

● 권력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용
고려를 세운 왕건이나 조선을 세운 이성계의 조상들은 모두 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왕조를 건국한 출생가계에서 중심적인 존재는 용이다. 용은 바로 왕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태조는 용의 혈통임을 강조함으로써 하늘로부터 왕권을 부여받았다는 점을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고 통치의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백제 무왕의 부계도 용이었으며, 고려를 세운 왕건의 할머니 또한 용이었다. 이성계도 출생담에 용을 내세운다. 조선후기에 만들어진 아기장수 이야기도 아기장수 겨드랑이에 비늘이 달려있다고 하여 아기장수가 용의 자손임을 강조한다. 반면에 견훤의 부계를 지렁이로 표현한 것은 정권 획득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백제 무왕의 아버지는 용, 왕건의 할머니가 용, 견훤의 아버지는 지렁이로 나타난다.

① 왕의 상징인 용
조선시대 왕의 신체를 상징하는 용어나 의식주생활에서 쓰이는 각종 도구 등에 용이 접두사로 나오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다.

용가(龍駕) : 임금의 수레
용교의(龍交椅) : 용의 형상을 새긴 임금의 교의(의자)
용궐(龍闕) 궁궐의 경칭
용루(龍淚) 임금의 눈물
용수(龍鬚) 임금의 수염
용안(龍顏) 임금의 얼굴
용주(龍舟) 임금이 타는 배
용평상(龍平床) 임금이 앉는 평상
용포(龍袍) 임금이 입는 옷, 곤룡포

흔히 임금의 얼굴을 용안이라고 한다. 이 명칭은 <삼국사기>에 처음 등장한다. 임금의 덕을 용덕, 임금이 즉위하는 것을 용비라고 부른다.
고려속요인 <쌍화점>에서도 용이 나타난다. <쌍화점>은 남녀 간의 문란한 성생활을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의 3연에 우물로 물을 길러 갔는데 우물의 용이 손목을 잡았다고 한다, 손목을 잡았다는 것은 성적인 표현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 노래는 탐욕에 빠져든 충렬왕을 위해 불러졌는데, 당시의 세풍을 풍자하기보다는 직설적인 표현을 통해 즐거움을 얻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 <쌍화점>에서 중요한 것은 용의 등장이다. 용은 왕의 상징인데 용이 여염집 여자의 손목을 잡고 성행위를 했다는 것은 왕의 도덕적 문란을 은근히 비판하는 것이다.

② 민중의 구원자 실패한 혁명아 아기장수
전해지는 설화 중 독특한 설화가 <아기장수>설화로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아기장수> 설화가 전국적으로 분포된 이유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 혁명아의 도래를 애타게 기다린 민중들의 염원을 반영한 것이다. 사실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 민중들의 삶은 궁핍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고향을 떠나 떠돌이가 되고, 어떤 이들은 산속으로 들어가 산적이 되기도 했다.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그 당시 삶에서 생활의 뿌리가 송두리째 뽑힌 거지나 다름이 없었다. 이런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새로운 희망의 세계를 만들 홍길동과 같은 혁명아가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아기장수는 대부분 하층민 출신이다. 하지만 겨드랑이에 있는 비늘은 그가 용의 자손임을 상징한다. 새로운 왕국을 세울 용의 자손이 출현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아기 장수는 부모의 손에 죽는다. 대변혁을 원치 않는 보수 세력에 의한 좌절이기도 하다. <아기장수> 전설은 변혁에 대한 민중의 열망과 현실적인 좌절을 표현하고 있는 민중의 집단적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이와 유사한 설화가 전해지는 곳이 통영 수우도 설운장군 설화이다.

● 나라를 지키는 호국 영웅
불법을 지키는 호법용으로 출발한 용은 차츰 나라를 지키는 호국용으로 승화한다. 삼국을 통일했던 신라의 문무왕은 대표적인 호국용이다. <삼국유사>를 보면 문무왕이 지의법사에게 “내가 죽은 뒤에는 나라를 지키는 큰 용이 되어 불교를 받들고 국가를 수호하리라”라고 말한다. >삼국사기>에는 문무왕은 자기가 죽으면 동해 어귀의 큰 돌 위에서 장사지내라는 유언을 한다. 속설에 왕이 용으로 화했다고 한다. 이처럼 왕이 죽으면 용으로 환생하여 나라를 지키겠다는 것은 호법용에서 오국용으로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삼국유사>의 만파식적조에도 유사한 내용이 있다. 신문왕 2년, 동해 가운데 작은 섬 하나가 떠 내려와 파도가 치는 대로 흘러 다니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왕은 일관 김춘질에게 점을 치라고 했다. 그는 선대의 왕(문무왕)이 동해의 용이 되어 삼한을 수호하고 있는데, 왕에게 나라를 지킬 수 있는 보물을 주려고 하니 바다로 나가면 큰 보물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문무왕이나 만파식적은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다. 죽은 후에도 나라를 지키겠다는 왕의 의지는 용을 통해 불법을 수호하려는 불교적 이념을 수용한 것이다.

● 바다의 통치자 용왕
용왕의 존재도 불교와 관련되어 만들어진 것으로 학자들은 알고 있다. <불교대사전>에 용왕은 현세에 불법이 유행하지 않으면 용궁에서 경전을 수호하는 존재로 기록되어 있다. 해룡왕이 영취산에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심신이 환희하여 부처님을 용궁으로 모셔 설법을 듣고자 하니 부처님이 이를 허락하였다. 이때 용왕은 부처님이 오실 수 있도록 길을 만들고 용궁을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의미와 달리 민간에서는 용왕을 풍어와 해난사고를 방지해 주는 바다의 신으로 생각해왔다. 그런 면에서 용왕은 물과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존재다.
동해의 용이 조화를 부렸으나 왕이 절을 세우라고 하자 조화가 사라졌다는 불교설화적 이야기다. 그러나 동해용의 존재는 신적인 개념보다 왕보다 하위에 존재하는 인물로 나타난다. 왕을 위해 춤추고 노래 불렀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거타지설화에서는 서해용을 구해주고 보답을 받는 내용이 있다.
용이 늙은 여우에게 괴롭힘을 당한다는 의미는 용이 아직 전지전능한 능력을 가지지 못함을 보여준다. 이 설화는 불교의 정착 포교 과정을 이야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용왕이란 표현은 <삼국사기>의 김유신 조에 찾아볼 수 있다. 김춘추가 고구려에 갔다가 죽게 되었는데, 선도해의 도움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이때 선도해가 말해준 일화가 그 유명한 거북과 토끼 이야기다.
여기에서는 용왕이 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 동해 용왕 딸이 속병을 앓는 것으로 표현된다. 여기서도 용왕은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다 딸의 속병 하나 고치지 못하는 토끼의 간을 구하고자 한다. 용왕이 바다를 관장하기는 하지만 육체적인 고통은 해결하지 못한다는 인간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다.
또 용궁에는 용왕이 신이한 능력을 가진 보물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거북이나 물고기를 구해주고 용궁으로 초대되어 용왕으로부터 신이한 능력을 가진 보물을 선물 받는다. 용궁은 마치 환상적인 세계로 그려진다. 용왕은 바다 속의 모든 생물을 지배하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신적인 모습보다 인간적인 면이 더 많이 드러난다. 풍어제에서 모셔지는 최고의 신과는 또 다른 이미지다.

● 용을 구워 먹다가 망한 사람
민간 설화에 용을 구워 먹고 벌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용을 구워 먹는 것도 불가능하지만, 용을 구워 먹었다는 것은 왕에 대한 반역을 상징한다.
용과의 대결은 무모한 일이다. 신에게 반항한다는 의미다. 이 이야기는 용으로 표상되는 왕에 대한 반역으로 풀이할 수 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용을 먹으려고 하자 노인이 나타나 용을 도와 살아나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여송은 조선을 돕기 위해 온 장수지만 산천의 혈을 잘라 뛰어난 인물이 태어나지 못하도록 하였다는 이야기 등 부정적인 시각이 많다. 이런 이여송이 용을 먹으려는 의도는 분명하다. 그는 조선의 임금을 망치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노인의 도움으로 용은 살아났다. 그 보답으로 노인은 많은 땅을 얻게 된다. 여기서 나타난 노인은 특별한 인물이 아닌 평범한 노인이었다. 이런 상황은 임진왜란 때 지배층인 사대부들은 다 달아나고 의연히 일어선 것은 사대부보다는 민초들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 부처와 싸워 패배한 용
용이 부처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와 싸우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아마도 시대적 사고가 반영된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용신과 부처의 싸움에서 용신이 패하고 부처가 이긴다는 이야기로 토착신앙의 반발을 극복하고 불교가 정착하게 된 경위를 이야기한 것이다. 부처의 신통력을 앞세워 불교라는 새로운 신앙체가 이 땅에 뿌리 내릴 수 있도록 효과적으로 활용한 것이다. 즉 용보다 신통력이 훨씬 우세한 부처에게 귀의하는 것이 삶에 보탬이 된다는 의미다.

● 은혜에 보답하는 용
용이 사람의 도움을 받은 후 그 은혜를 보답한다는 이야기다.
이와 여의주를 얻지 못한 용에게 여의주를 구해주어 부자가 되었다거나, 승천하기 위해 황룡과 흑룡이 싸우고 있어 흑룡을 죽이고 많은 땅을 얻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용이 승천하여 완전한 용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왕이 성군이 되기 위해 민심을 중요시 여겨야 한다는 의미다.

● 용의 머리는 강한 남성의 상징
속어로 “용두질 친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소위 남성들의 자위행위를 말한다. 여기서 남성의 성기를 용두로 표현한 것이다. 남성의 성기는 생명을 창조하고 탄생시킨다는 생산의 의미가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강력한 힘을 암시하려는 의도가 크다.
성기는 남녀 간의 생활에 활력을 주는 것이면서 동시에 생산의 기능을 갖는다. 만약 남자의 성기(용)이 병약해진다면 활력을 잃으니 죽은 삶과 마찬가지다. 최고의 권력을 용으로 비유하는 것도 힘의 근원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생산이나 힘이 죽게 되어 그 기능을 상실하면 남자의 유통기간은 끝난다. 이런 경우도 남성 성기를 용두라고 할 수 있을까?

● 용의 아홉 아들 구룡자
용은 복을 주는 복신이기도 하지만 용(龍), 봉(鳳), 구(龜), 린(麟), 그리고 도깨비와 같이 5령(五靈)이라고도 한다. 용의 모습은 도깨비와 흡사하다고 단청하는 사람들이 말을 하듯이 왕방울 눈과 큰 입, 그리고 이빨 등이 꼭 같이 생겼다.
용의 몸은 구렁이 같이 생겼지만, 몸에 비늘이 81개가 달려있다고 하니 우연치고는 너무나 기막힌 우연이라고 생각한다. 81이라는 숫자는 바로 삼신의 사상을 한웅천왕이 81자에 담았다는 천부경의 숫자와 일치한다는 것은 용은 바로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동물이며 한웅천왕을 나타내는 동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어느 얼빠진 사람들이 중국의 용은 발가락이 다섯 개, 한국의 용은 발가락이 네 개, 마지막으로 일본의 용은 발가락이 세 개라는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얼마나 무식하고 모화사상 적인 발언인가? 이런 속설은 중국 상해 예원에서 비롯되었다.
400년 전 명나라 관료였던 반윤단(潘允端)이 아버지의 안락한 노후를 위해 20여 년에 걸쳐 만든 곳으로, 집의 장식을 용으로 꾸몄기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황제에게 고한 이야기다. 경복궁 근정전에 가서 천정을 한번 살펴보면 황룡, 청룡 두 마리의 용이 비상하는 그림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두 마리 용들의 발가락이 분명 다섯 개로 되어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용의 뿔은 사슴뿔을 닮았고 이마에는 박산(博山)이라 하여 공작 꼬리 같은 모양의 보주가 박혀있다고 한다.
용의 종류 또한 다양하여 늙은 잉어가 변하여 용이 된다고 믿은 사람들은 잉어 같은 용을 만들어 어룡(魚龍)이라 불렀다. 이 어룡이 사찰에 매달린 목어라는 악기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흔히 볼 수가 있다.
흔히 우리는 용이 하늘로 올라간다고 알고 있다. 바다에서 바닷물이 회오리바람에 휘말려서 하늘 높이 올라가는 모습을 용이 승천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는데 하늘에 승천하지 못하고 땅에 서리고 있는 용을 반용(蟠龍)이라고 한다. 반용을 그릴 때는 구름 배경 없이 몸을 구부린 모습으로 용을 그리게 된다. 또한 이마에 뿔이 없는 용을 이룡(螭龍)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이무기로 알고 있다.
거북이가 용이 된다고 믿고 있는 구룡(龜龍)이라고 하는 용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용이 아니라 거북이를 용으로 그린 것을 말한다. 구룡을 자세히 살펴보면 등껍질에다 임금 왕(王)자가 새겨져 있다. 이런 연유로 거북이도 용왕으로 모시게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비석 받침돌로 용머리를 가지고 있는 거북이 즉, 구룡의 형태로 많이 만들어 사용하였다.
또 말에도 용을 모습을 하고 나타난 것이 있는데 이것을 용마(龍馬)라고 하며 복희시대에 용마가 등에 팔괘도를 그려 가지고 나왔다는 전설이 있다. 마지막으로 용의 얼굴에 사슴 몸을 한 기린이라는 사슴용이 있었다고 한다.
용은 모든 생물의 어머니라고도 한다. 물고기를 비롯한 네발 달린 짐승 모두 용의 새끼라고 하는 뜻으로, 용이 모든 생물의 으뜸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몸집은 물고기나 짐승인데 머리는 용의 머리를 가지고 있는 구룡자(九龍子)라고 하는 말이 생겨났다.
첫째가 비희(贔屓)라는 괴상한 이름을 가진 용인데 구룡과 같이 커다란 거북에 용머리를 하고 있다. 무거운 짐을 지기를 좋아한다고 해서 돌비석 받침돌로 쓰여 졌다.
둘째가 포뢰(蒲牢)라고 하여 울기를 좋아 한다 하여 종걸이로 사용되었다.
셋째가 폐한(狴豻)이라고 하여 힘이 세다는 이유로 옥문 위에 새겨 졌다.
넷째가 애자(睚眦)라고 하여 죽이는 일을 좋아하므로 칼이나 창 같은 무기에 장식으로 새겨졌다.
다섯째가 리문(螭吻)이라 하여 망보기를 좋아 한다고 하여 지붕 위에 기와로 쓰여 졌으며,
여섯째가 팔애(叭涯)라고 하며 물을 좋아 한다고 하여 다리 장식으로 쓰여 졌다.
일곱째가 산예(狻猊)라고 하여 불을 좋아 한다고 하여 향로 뚜껑에 장식용으로 쓰여 졌다.
여덟째가 초도(椒圖)라 하여 문을 닫는 일을 좋아 한다고 하여 문고리로 쓰여 졌다.
아홉째가 도철(饕餮)이라 하여 음식을 좋아 한다고 하여 가마뚜껑 같은 것을 장식하는데 쓰여 졌다고 하는데 이것을 용의 아홉 아들 즉 구룡자(九龍子)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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