벅수와 장승의 차이

조상들의 유머와 익살이 만든 얼굴

벅수(法首)와 장승(長丞)은 완전히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모두 장승이라고 호칭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벅수는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天下大將軍·地下女將軍) 역할을 하는 데 반해, 장승은 역참의 한 갈래로 이정표 역할을 하였다.
장승(長栍)은 신라 21대 소지왕(炤知王/487)이 설치한, 역참(驛站)의 한 부문으로, 나라의 큰길(驛路)을 합리적으로 안내하고 다스리기 위해, 역참 길에 돈대(墩臺:흙과 돌로 쌓은 이정표)를 만들어 세웠고, 조선시대에는 좀 더 발전하여, ‘돈대’를 ‘후’(堠; 돈대·후/쟝승·후)라 표현하였다. 장승은, 역참 길 5리里 또는 10리마다 촘촘하게 나라(察訪)에서 세우고, 나라에서 관리했다.
본디, 장승의 가슴팍에는, 현재의 위치와 이웃 마을의 이름과 거리(距離), 그리고 방향을 꼼꼼하게 기록하여 세웠고, 중국에서 길을 따라 들어오는 유행병과 잡스러운 귀신들을 막아내기 위해, 치우(蚩尤) 또는 도교 경전에 등장하는 48장정의 무서운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거나 조각하여, 역참 길의 가장자리에 세워 놓고, 우리 조상들은, 이것을 후(堠) 또는 장승(長栍)이라 하였다. 주로, 후(堠)라 쓰고, ‘댱승’(쟝승)으로 읽었다. 장승이 세워진 곳을, 장승이 박혀 있는 땅이라 하여, 장승배기(장승박이)라고 했다.
조선의 경국대전(經國大典) 卷之六 ”工典”의 ‘橋路’에는, 역참길(驛路) 10리에는 소후(小堠/작은 장승)를 세우고, 30리에는 대후(大堠:큰장승)를 세워서, 역참(驛站) 말(馬)을 바꾸어 탈 수 있는 원院, 또는 역驛과 숙박시설(酒幕)이 있는 곳(지역)임을 알린다고 기록되어 있다. 外方道路每十里立小堠三十里立大堠置驛 堠刻里 數地名


1670년(현종, 11년), 반계 유형원(柳馨遠/1622-1673)이 쓴 『반계수록磻溪隨錄』에도, 후(堠/장승)에는 리수(里數)와 지명地名을 확실하게 새기며, 이정을 표시하는 원칙은 역참 길의 10리에는 <작은 장승>을 세우고, 30리에는 <큰 장승>을 세우며, 어느 부·목·군·현으로부터, 동·서·남·북의 어떤 방향으로 몇 리에 있는지를 정확하게 새긴다. 고 기록했다. 凡官路 每十里立小堠三十里立大堠堠刻某府東距幾里地名某南西北同
정조대왕 13년(1789), 이의봉李義鳳이 쓴, 『고금석림古今釋林(辭書)』의 내용에는,
‘댱승’은 우리 것이며, 역참길(驛路)의 10리里나 5리에, 나무로 만든 사람의 모습을 세우고, 몸의 가운데에는 지명(地名)과 리수(里數)를 썼다. 이것을 ‘댱승’이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 우리가 장승이라고 하는 것은 수호신이 아닌 이정표, 즉 ‘길라잡이’인 것이다.
이렇게 장승이 길라잡이에서 수호신으로 바뀌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 때이다.
조선총독부는 우리 마을을 지켜주는 ‘天下大將軍’과 ‘地下女將軍’이라는, 수호신 기능의 벅수(法首)를 망령된 신앙(迷信)으로 취급하여, 쓸모(가치)를 깎아내렸고, 갑오개혁 때 역참제도가 폐지(1895)되어, 우리 땅에서 이미 완벽하게 사라지고 없는, ‘길라잡이’ 기능의 장승을 다시 찾아내어, ‘벅수’에 강제로 포함을 시켰다. 그리고, 벅수를 장승으로 쓰고 부르도록 표준말로 지정하여, 아예 쐐기를 박아 버렸다.
또한, 일제강점기 때의 조선총독부는 고려시대 절집(寺剎)에서 일반 백성(庶民)들을 상대로 하여, 운영하였던 사채업(高利貸金)의 한 종류인 장생고長生庫(長生錢, 長生布)와, 절집의 경계를 표시하였던 말뚝(푯말) 역할의 장생표주(長生標柱; 國長生, 皇長生)가 장승의 뿌리(由來)다라는 억지를 부렸다.
장승은 본래 장생(長栍)이란 명칭에서 비롯됐다고 하는데, 이 명칭은 신선사상에서 나온 명칭이라 한다. 고려 말과 조선시대로 들어오면서 그 명칭이 변화하여 장생(長栍) · 장승(長承) 등으로 불렀다.
본디 ‘벅수(法首)’라는 것은, 法(진리)의 우두머리 또는 제사장(祭司長)을 뜻하며, 우리의 전통 마을과 절집(寺刹) 그리고 성문(城門)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민속신앙의 뿌리다. 불교의 ‘화엄경’에는 벅수가 불법을 보호(佛法守護)하고 지켜주는 ‘법수보살(法首菩薩)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1208년, 금(金)나’의 ‘한도소(韓道昭)’가 쓴 『오음편해五音篇海』에는, 사람이 죽고 나면, 누구나 귀신(鬼神)이 된다. 그리고 그 귀신이 또다시 죽으면, 결국에는 수호신을 뜻하는 적(聻/符籍)이 된다고 기록했다. 적(聻)은 귀신을 쫓는 수호신이다. 그 적(聻)의 넋(神靈)을 표현한 것이, 우리네의 벅수(法首)다. 즉 돌아가신 단군할아버지(檀君王儉) 또는 입향시조(入鄕始祖)의 모습이 ‘적(聻)’이며, 진정한 ‘벅수’의 모양새라 할 수 있다.
『태백일사』의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에는, 하늘 아래 동·서·남·북과 중앙의 다섯 방향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사람을,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이라 했고, 지하의 다섯 방향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사람을 지하대장군(地下大將軍)이라 했다. 이것은 우리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벅수(法首)라는 진리(법의 우두머리)를 뜻하는 표현일 것이다.
우리나라 벅수들 중에서, 최초로 이름(銘文)이 새겨진 벅수는, 전라북도 ‘부안읍성’ 서문안 짐대당산의 돌벅수로, 1689에 만들어졌으며 ”국가 민속문화재, 제18호”다.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과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으로, 도교에서 비롯된 명칭 같다.
벅수(法首)의 가슴에 쓰인 이름(銘文)들이 변화된 과정은, 옛날부터 주로 민불(民佛) 또는 미륵(彌勒)으로 불리던, 글귀가 없는 민짜 벅수였던 것이,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 1600년 무렵부터, 중국에서 떼(무리)를 지어 몰려오는, 잡귀(雜鬼)와 역병(천연두)을 막아내기 위해, 당장군(唐將軍)과 주장군(周將軍)으로 표현된, 두창(痘瘡)벅수와 축귀대장군(逐鬼大將軍)이라는 이름(銘文)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700년을 전후로, 아미산하교(娥眉山下橋)와 오방신장(五方神將)을 뜻하는 명칭들을 주로 사용을 했지만, 남자와 여자로의 나눔(區分)은 없었다. 다만, 수염이 그려져 있거나 없는 한 쌍을 기본으로 표현했으며, 수염이 없는 벅수가 더 우락부락하게 생겼고, 몸통의 크기도 더 우람(雄壯)했다. 그리고 1900년 무렵부터 음양(陰陽)의 조화(理致)를 따져, 너무나 잘못된 억지(固執)의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이라는 표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금 장승이라고 제작하는 것은 ‘길라잡이’가 아닌 수호신 ‘벅수’다. 벅수를 장승으로 호칭하면서 혼돈을 가져 왔다. 벅수는 재질을 무엇으로 만들었나에 따라 목장승과 석장승으로 구분하며, 기능에 따라서 이정표로써의 장승과 수호신으로써의 벅수로 나뉘었다.
그리고 장소에 따라 사원寺院 입구에 세운 장승과 마을 입구 동구의 장승(벅수), 그리고 마을과 마을의 경계를 표시하는 장승과 노방(路傍)의 장승 등으로 구분했다.
목장승에 새겨 넣는 글자로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이 대부분이지만, 초기에는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과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 또는 갈장군(葛將軍) 또는 주장군(周將軍) 이라고 적었다. 이들은 도교에 나오는 신장의 이름으로 벽사(辟邪)의 의미로 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교가 고려 예종 이후 활발하게 전파되었기에 장군이란 명칭이 붙은 것은 고려 예종 이후로 보는 견해가 많다. 벅수의 머리 부분이 남근과 같은 생김새로 제작된 것이 많은데, 이것은 성기(性器)가 가지는 상징성인 생명과 창조를 의미하며 신선사상의 장생(불로장생)의 영향이라고 한다.
불교에서도 벅수를 많이 세웠다.
사찰 입구에 장승을 세워두고 <대가람수호신(大伽藍守護神)> 즉, 절을 보호하는 수호신이라는 문구를 적어 넣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렇게 사찰에서 벅수를 세우게 된 시기는 통일신라시대라 추측한다. 그 당시 무불습합이 이루어지면서 불교가 무교의 산신신앙 사상을 받아들인 결과물로써 사찰이 망하지 않고 영구 불멸할 것을 기원하는 의미라고 한다. 그리고 사찰이 부유해지면서 소유의 토지나 산림 주위에 노방 등에 세워지면서 사찰의 경계를 나타내는 표식 또는 이정표가 됐다.
장승이 수호신인 벅수의 기능을 하였다는 것은 조선시대 성현의 수필집인 <용재총화慵齋叢話>와 최세진의 <훈몽자회訓蒙字會> 등에 기록되어 있다.
벅수는 솟대와 함께 동네 입구에 서서 동네로 들어오는 잡귀와 액을 막는 수호신으로서 기능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기에, <수살목(守殺木)> 또는 <액(厄)매기>라 칭했다.
벅수와 솟대는 매년 정월에 무녀를 동원하여 수호신 벅수를 위하는 동내굿(洞內 神事)을 지냈는데 이것을 별신굿이라고 불렀다.
<구포별신굿>을 할 때 내용을 잠깐 살펴보면, 먼저 산신을 위하고 다음으로 솟대와 벅수를 위하는데, 별신굿 3일 전부터 솟대와 벅수의 주위를 청소하고 황토(禁土)를 뿌리고 금승(禁繩)이라는 금줄을 이들 신체에 둘러 묶어서 부정을 막고 당일에는 금줄을 떼고 그 앞에 제상을 차리고 제물을 갖추어 마을의 안과태평을 무녀가 기원하며 굿을 하였다. 또 목벅수일 때 남자 벅수는 적색으로 여자 벅수는 청색을 칠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석장승은 매우 드물었지만 <증보문헌비고> 기록을 보면 황해도 연안 해주 지방에 있었다고 한다. 제주도의 돌하루방 역시 석벅수로 보고 있다.
풍습에 벅수의 눈을 깎아서 가루를 내어 물에 타 마시면 아기가 낙태(墮胎藥)된다고 한다.
이렇게 우리 민족과 함께 지내온 벅수와 장승이 귀신이 붙었다고 하여 수난을 당한 시대가 바로 해방 이후부터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온 선교사를 비롯한 외국인들은 장승을 악마의 말뚝이라는 뜻으로 라고 부르면서 어리석은 한국 기독교도에 의하여 무차별적으로 잘려 나가고 불태워졌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이 글은 황준구 선생의 주장과 사진을 근거로 필자의 생각을 추가하여 쓴 글임을 밝힙니다. 벅수와 장승의 기능을 확실하게 구분해 주신 데 대하여 감사드립니다.

글 | 조성제(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교수, 무속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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