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속의 여성 위인 ‘웅녀’

환인(桓因) 가문의 왕녀였던 웅녀, 혹시 곰의 여왕’은 아니었을까

우리는 흔히 《삼국유사》 속의 단군왕검 관련 설화에 보이는 곰의 이야기를 두고, 정말 ”어떻게 곰이 사람이 되었다고 할 수가 있겠나!” 하곤 한다.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곰을 결국에 토템의 흔적으로 여기고 그에 관한 깊은 고민의 수렁에서 벗어난다.
여기서 곰이 아닌 사람, 곧 거친 들녘과 동굴을 찾아다니며 지내던 한 여인을 상상해 보자.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겠는가. 상상 속의 여인은 무엇인가를 먹기 위해 수렵을 하거나 들의 열매를 따야 했을 터이다. 그런데 그녀는 혼자 다녔을까?
웅녀와 같은 선사시대의 여성이 드러낸 생활상을 알아볼 수 있는 자료는 의외로 많다. 지금의 중국 땅 동북지방의 태자하(太子河) 상류 지역에는 동굴 유적이 여럿 있는데, 그 가운데 여성의 시신이 발견된 곳도 더러 있어 눈길을 끈다. 그 가운데에는 다리뼈에 화살촉이 박힌 40대 내지 50대로 여겨지는 여성도 발견됐다.1) 그 같은 발굴 조사로 청동기시대에 전쟁의 와중에 동아시아의 여성들은 전쟁의 국외자(局外) 또는 도피자가 아닌 전쟁의 당사자나 피해자로 적과 맞섰거나 또는 몸을 다쳤던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웅녀를 마치 다리뼈에 화살을 맛은 여성처럼 일정한 군사적 활동을 하거나 군사적 지휘권을 지녔던 여성수장으로 볼 여지는 없을까 고민해 봄직하다. 처녀 지도자 ‘곰의 여왕’ 정도로 말이다.
처녀지도자 ‘곰의 여왕’은 무리를 이끌고 때때로 굴속에서 지냈을 터이다. 그런데 그 굴이 문제였다. 굴에는 심심찮게 다른 세력도 함께 지내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범(호랑이)을 숭배하는 무리와 함께 굴에서 지냈다. 그 굴에서의 삶은 지겨움 자체였을 터다. 같이 지내던 범을 숭배하는 무리가 거친 성격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처녀 지도자 ‘곰의 여왕’은 괴로웠을 터이다. “어떻게 하면 나를 따르는 무리를 안전한 곳에서 지내게 할 수 있을까” 바로 그 점이 곰 처녀 여왕의 걱정거리였을 것이다.
태백산 신단수 지역에는 실용주의 생활문화가 움트고 있었다
처녀 지도자인 ‘곰의 여왕’ 아가씨가 자신의 무리에 닥친 삶의 문제에 고민할 때, 태백산 신단수의 아래 지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문화가 태동했다. 그것은 <삼국유사> 속의 단군왕검 관련 설화를 통해 너무나 잘 아는 상식적 내용이기도 하다. 당시 태백산 지역에서 이루어지던 새로운 문화는 신농경 문화라고 요약할 수 있다. 숱한 사람이 일시적으로 많아진 것을 통해 인구의 급속한 증가를 추정해 볼 수 있는데, 인구 증가의 가장 큰 원인으로 농업의 발전을 꼽는 터이다. 어떻든 당시의 신농경 문화의 중심에 바로 환웅이란 인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려 후기의 이승휴가 지은 《제왕운기》를 보면, 단수신(壇樹神)이 거론되는데, 그 단수신은 바로 《삼국유사》에서 밝히는 환웅과 동일한 인물로 여겨진다.
환웅은 본래 자신의 부친으로부터 농경에 필요한 지식인들과 그에 따른 숱한 일꾼을 데리고 태백산 지역에 정착한 터였다. 풍백과 운사, 그리고 우사는 모두 농경 생활의 절대적 요소인 바람과 구름, 그리고 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고 관련 전문인의 존재를 암시해 주기도 하다.
그런데 환웅은 무엇보다 당시 동아시아에 퍼지던 새로운 패러다임에 눈을 뜬 인물로 여겨진다. 그것은 환웅이 태백산에 도착하자, 곧 신시(神市)를 펴고 운영한 것으로도 넉넉하게 헤아려진다. 그렇다면 신시란 무엇일까. 그대로 풀이한다면 신령스러운 저자인 셈이다. 저자란 제각기 필요한 물자를 구하거나 사기 위해 펼쳐진 일종의 장터나 가게거리를 뜻한다. 환웅은 바로 그 장터나 가게 거리를 조성한 것이다. 하지만 환웅의 장터 운영은 누군가로부터 성공의 선례를 충분히 따져본 결과로도 추정된다. 바로 환웅보다 조금 앞서 일찍이 신농이란 인물이 펼친 익괘(益卦)의 통치 패러다임을 깊이 헤아리고, 마침내 그러한 통치 스타일로 태백산 지역에서 새로운 실용주의 문화를 꽃 피우려던 의도가 있었던 듯싶다. 그렇다면 익괘란 또 무엇인가. 중국 고전에 속하는 《주역》에 따르면 익괘(益卦)란 위를 덜어내고 아래를 보태는 상으로 쉽게 말하면 고위층은 다소 곤궁할지언정 아래의 백성들은 풍요롭게 한다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전해진다. 따라서 공자도 오죽하면 ‘손익의 도리야말로 왕 노릇을 하는 이가 지켜야 할 바’ 라고 했겠는가.
그렇다면 신농이 펼친 익괘의 통치 패러다임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나무를 휘어서 극쟁이를 만들어 극젱이와 보습의 이익으로 천하를 가르쳐서 모든 이가 이익을 얻게 함이었고, 또한 ”한낮에 시장을 열어 천하의 백성을 모이게 하고, 천하의 재화를 모아 교환하여 가지고 물러가서 그 처소를 얻게 함”이었다. 극쟁이2)란 마치 모습이 생기와 비슷하게 생겨서 주로 밭갈이하는 데 썼던 농업 도구를 말한다. 또한 보습3)이란 쇠붙이로 삽처럼 만든 모양의 농업 도구를 말한다. 따라서 신농이 펼치려던 문화는 모든 백성이 실질적으로 이익이 되는 풍요 지향의 위민(爲民) 정치였던 듯싶다. 환웅은 바로 그와 같은 신농의 위민 정치 패러다임을 깊이 살피고 본받고 싶은 의도를 지니고, 마침내 동북아시아의 태백산 신단수 지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실용주의 정책 방향인 홍익인간 세상의 구현을 추진한 것이었다. 물론 태백산이 도대체 어느 지역이었는지 분명치 않지만, 어떻든 환웅은 이웃한 세력이 이루고 쌓은 문화적 경험과 성과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창조적 문화 변용4)을 꾀하던 인물로 여겨진다. 따라서 환웅의 주위에는 농경에 절대적으로 요한 천지 자연의 이치에 밝은 지식인들과 그에 따른 기술자가 많이 필요했을 터이다. 그러므로 《삼국유사》에서 보이는 풍백과 우사, 그리고 운사라는 인물들이 바로 그 같은 실용주의 통치 패러다임의 실질적 추진 세력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1) 하문식, <중국 동북 지역 청동기 시대 동굴 유적 : 태자하 상류 지역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선사시대의 동굴유적과 문화>, 2004년 연세대학교 박물관 추계학술세미나 자료집, 71쪽 참조
2) 언뜻 보기에 쟁기와 비슷하나 보습 끝이 무디며 대체로 술이 곧게 내려가고 몸체가 빈약한 점이 다른 농업용 도구이다. 보습도 쟁기보다 덜 휘었고, 벗이 없다. 극쟁이는 소 한 마리가 끌거나 사람이 지게를 지고 지게가지에 끈을 매어 끌게 하는 도구이다. 주로 밭에서 바닥이 좁고 험한 곳을 얕게 갈 때 쓰며, 쟁기로 갈아놓은 논밭의 골을 타는 데에도 썼다. 감자밭 등을 맬 때 편리하다.
3) 따비 · 쟁기 · 극쟁이 등의 술바닥에 박아 사용하는 쇳조각으로 된 삽 모양의 농업용 연장이다.
4) 문화 변용(文化變容)이란 이질적인 문화가 서로 직접적으로 접촉하여, 그 한쪽이나 또는 쌍방이 원래의 문화 형태에 변화를 일으키는 현상을 일컫는다. 문화의 접촉 변화라고도 한다. 근래에 와서 이른바 근대화 또는 산업화 문제와 결부되어 문화 인류학의 중심적 연구 과제가 되기도 한다. 한편 문화 변용의 내용은 다양하게 거론될 수 있지만, 문화 변용이 이루어지는 조건으로서는 접촉하는 문화 체계가 가지는 상호간의 성질과 각기 지닌 문화 수준의 차이, 그리고 문화의 접촉 방법이나 접촉의 속도 따위가 거론될 수 있다. 또한 문화 변용의 결과는 부분적 요소의 도입에 그치는 경우, 전체에 걸쳐 재조직되어 때로는 전적으로 서로 비슷한 문화 체계가 이루어지는 경우, 그리고 반발적으로 접촉 문화를 거부하는 과정에서 변용해 가는 경우 등으로 나타나는 경우로 각기 구분된다. 《두산백과사전>을 참조함. 환웅이 추진한 신시(神市)를 두고 문화 변용의 한 현상으로 파악한 것에 대한 구체적 근거를 요구한다면 실로 난감할 듯싶다. 그럼에도 환웅의 통치 패러다임을 이웃한 세력의 문화를 수용한 문화 변용의 현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데에는 그간의 관련 연구들이 지나치게 민족주의적 관점에 머무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따른 일종의 전향적 관점의 하나로 이해하여 주기를 소망할 뿐이다.

김영해는 한국 무용 행위 속에 꿈틀대는 ‘경천 의식’과 ‘사귀진압(邪鬼鎭壓)’의 강렬한 이미지에 매료되어, 삼지창을 든 무녀가 상고사의 창을 든 치우 형상과 일맥상통하는 데에 무게를 두고 오랜 기간 무속 세계를 탐험하는 과정도 거쳤다. 이러한 김영해의 탐구심에는 한국 원형 문화가 나누어진 독립 문화가 아니라 모두 연관성이 있는 학문으로까지의 범위로 점차 확대됐다. 춤에는 소리와 가락이 있음을 알았고, 이러한 원형 문화의 주인공인 여성성의 연원과 한국 여성 문화의 뿌리까지 연구하는 계기가 계속적으로 깊게 이루어져 왔다. 한국 원형 문화의 뿌리를 찾고 그 과정을 챙기는 방대한 자료 모으기에는 남다른 열정을 갖고 이 땅의 팔도를 뒤지며 원형 문화를 찾는 노력은 몇 권의 책이 될 정도의 분량이 됐다. 또 많은 연구 서적을 읽는 가운데 버무려진 통찰력은 이제 원형에 대한 그녀만의 시각을 조심스럽게 개진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특히 명지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에서 한국 원형 문화에 관련한 과목들을 강의하면서 그녀는 더 많은 연구와 통찰의 기회를 가졌고, 그 강의안과 자료들을 (사)한국역사문화컨텐츠의 검증과 보완, 감수를 거쳐 세상에 내어놓게 되는 계기가 됐다.

Share:

Facebook
Twit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