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의 남매가 남긴 글

시대를 앞서간 동생 허균과 규율에 매인 누나 허난설헌 남매의 사연 그리고 그들의 끝은 처절하고 이른 죽음이었으니 지금 생각해도 안타까울 뿐이다. 뜻을 다 펼치지 못하고 떠난 천재들의 슬픔의 척은 지금도 이 땅에 남아 흐르고 있을까?


허균의 척독문
처마엔 빗물 쓸쓸히 떨어지고, 향로엔 가느다랗게 향기 풍기는데, 지금 친구 두엇과 함께 소매 걷고 맨발로 방석에 기대앉아서 하얀 연꽃 옆에서 참외를 쪼개 먹으며 번우한 생각들을 씻고 있네. 이런 때 자네가 없어서는 안 될테지. 자네 집 사자 같은 늙은 아내가 반드시 고함을 지르면서 자네 얼굴을 고양이 면상으로 만들 테지만, 늙었다고 해서 두려워하거나 움츠러들어서는 아니 될 것이야. 종놈에게 우산을 가지고 대기하도록 해놓았으니 가랑비쯤이야 족히 피할 수 있으리. 빨리 빨리 오시게나. 모이고 흩어짐이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런 모임이 어찌 자주 있겠는가. 흩어진 뒤에는 후회해도 돌이킬 수 있겠는가.
척독(尺牘)은 일종의 편지 형식으로 엽서 같은 짧은 글을 뜻한다.
그 시대에도 무서운 처는 얼굴은 할퀴었나 봅니다.

허균 초상

허난설헌의 글
엊그제 젊었더니 어찌 벌써 이렇게 다 늙어버렸는가? 어릴 적 즐겁게 지내던 일을 생각하니 말해야 헛되구나. 이렇게 늙은 뒤에 설운 사연 말하자니 목이 멘다. 부모님이 낳아 기르며 몹시 고생하여 이 내 몸 길러낼 때, 높은 벼슬아치의 배필을 바라지 못할지라도 군자의 좋은 짝이 되기를 바랐었는데, 전생에 지은 원망스러운 업보(報)요. 부부의 인연으로 장안의 호탕하면서도 경박한 사람을 꿈같이 만나 시집간 뒤에 남편 시중하면서 조심하기를 마치 살얼음 디디는 듯하였다. 열다섯, 열여섯 살을 겨우 지나 타고난 아름다운 모습 저절로 나타나니, 이 얼굴 이 태도로 평생을 약속했더니. 세월이 빨리 지나고 조물주마저 시기하여 봄바람 가을 물이 베틀의 베올 사이에 북이 지나가듯 빨리 지나가 버려 꽃같이 아름다운 얼굴 어디 두고 모습이 밉게도 되었구나. 내 얼굴을 내가 보고 알거니와 어느 임이 나를 사랑할 것인가? 스스로 부끄러워 하니 누구를 원망할 것인가.

당시는 처가살이(男歸女家)가 일반적인데 비해 난설헌은 특별히 시집살이(親迎)을 했다. 남편 김성립은 과거공부를 핑계 삼아 바깥으로 돌며 가정을 등한시했다. 10년 동안 급제하지 못했으며 신동이라 소문난 아내를 버거워했고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부부사이는 좋지 않았고, 고부간의 갈등도 심했던 것 같다. 허난설헌은 결혼에 회의를 느끼고 남성중심사회에 파문은 던지는 시를 짓기도 했고, 때로는 이 세상이 아닌 신선세계를 동경하며 현실의 불행을 잊으려 했다. 그녀 나이 27세 때 눈을 감았다. 그녀가 죽은 후 안타깝게도 집안에 가득 찼던 작품은 유언에 따라 모두 불태워졌다. 그러나 누이의 작품을 아깝게 여긴 허균은 자신이 간직하고 있던 작품과 기억하고 있던 작품을 모아 <난설헌집>을 엮었다. 명나라 사신이며 시인인 주지번에게 이 시집을 주어 중국에서 간행됐으며 주지번은 이 시집 머리말에서 ”그녀는 봉래섬을 떠나 인간세계로 우연히 귀양 온 선녀다”라고 소개했다. 1711년에 일본에서도 이 시집이 간행되어 애송됐다.
역시 자존감 낮추는 사람은 피하는 게 답인데, 허난설헌은 그게 남편이라 참 안타깝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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