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인 가문의 왕녀인 웅녀, 그녀가 지닌 상징성은 무엇인가

삼국유사의 설화에 보이는 웅녀에 관해 고민해 보고자 한다. 그것은 제왕운기에서 보이는 손녀라는 표현과 아주 다르기 때문이다. 웅녀와 손녀가 동일한 존재라면 웅녀는 여자가 되기에 앞서 한 마리의 곰이었을까 하는 의문을 파헤치고자 하는 까닭이다.
먼저 곰에 관해 살펴본다. 곰은 육지에서 최대의 육식류로, 그 가운데에서도 알래스카 큰 곰은 몸길이 280센티미터, 몸무게는 800킬로그램 가까이 되는 것이 있다. 이것은 사자나 호랑이와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런데 곰은 그 무거운 몸집과 둔한 듯 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지칠 줄 모르고 돌아다니며 기다란 발톱을 이용하여 굴을 파기도 하고 나무 오르기도 하며 적을 때려누이기도 하고 수영도 잘한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그 풍채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경쾌하고 스피드 있게 달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석기시대부터 정교하게 만든 곰의 형상을 우상으로 승배하던 것으로 여겨진다.

다음으로 호랑이에 관해 살펴본다.
호랑이는 지금으로부터 500만~200만 년 전에 시베리아 중국 북동부 및 한반도 등 동북아시아 지방에서 처음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흔히 호랑이는 한 골짝이게 한 마리만 산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그 고립성을 표현한 말이다. 신빙성 있는 연구 결과로는 볼 순 없으나 우리나라 호랑이는 하루에 80~100킬로미터를 걸으며 영역을 순찰한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호랑이는 야행성 동물이다. 낮에 활동하기도 하지만 황혼이나 새벽에 사냥을 한다. 호랑이는 멀리 뛰기 4-5미터, 높이뛰기 2미터정도, 때로는 10미터의 절벽을 뛰어내리는 능력도 있으며, 전력 질주를 할 수 있는 거리는 300미터 정도로 지구력에서는 떨어진다. 호랑이는 저보다 작은 동물은 강력한 앞발의 일격으로 쓰러트린 다음 목통을 물고 눌러 질식케 하는 방법을 쓴다. 큰 동물은 앞발로 치면서 올라타고 덜미에 송곳니를 깊숙이 박아 머리뼈와 목뼈 사이로 척수를 질러 무력하게 만든다. 그리고 저항이 없음을 기다려 강력한 목의 힘으로 마구 내둘러 목뼈와 척수를 완전히 끊어 버린다. 그래도 못미더우면 이번에는 목통을 물고 눌러 확인 교살을 하는 것이다.
관련 연구자들의 견해를 통해 몸집은 곰이 호랑이에 견주어 훨씬 클 수 있고, 속도도 빠른 짐승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곰에 관한 숭배는 사실상 동아시아의 선사시기에 보편적인 습속으로 자리를 잡았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곰의 모습을 새긴 조각상은 흔했고, 이후 역사시대에도 민속적으로는 악귀를 물리치는 방상 씨가 곰의 가죽을 덮어 쓴 점은 곰 가죽을 악귀 축출의 한 수단으로 사용한 점을 뚜렷하게 읽히게 해 준다.
한편 동아시아의 오랜 여신 신앙의 한 주체로 여겨지는 서왕모의 경우 그녀가 호랑이 꼬리를 했다고 기록된 산해경 따위의 기록은 우리의 웅녀 문제를 푸는 하나의 실마리로 작용할 수 있다. 짐작컨대 환웅과 관련하여 한 굴속에 있었다는 곰과 호랑이는 신앙 습속을 주관하던 당대 최고의 주술가나 사제 곧 샤먼이었을 개연성도 있다. 물론 제왕운기를 견주어 보면 약을 만드는 비법을 깨우치던 의술을 수련하던 여성들로도 추정이 가능하다.
여기서 삼국유사의 한 대목도 결코 지나칠 수 없다. 환웅이 곰과 호랑이에게 굴속에 들어가게 하고는, 쑥과 마늘을 건네주며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한 말이다. 분명히 환웅은 두 존재에게 몸짓으로 한계 아닌 말로써 대화를 하듯이 했다는 점이다. 짐승은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없다. 또한 두 존재는 육식이 아닌 채식을 강요당했다. 결코 육식을 주로 하는 맹수에게 취할 조치가 아닌 것이다.
결국 요약하편 삼국유사>속에 드러나는 두 짐승은 곰과 호랑이의 상징을 덧입은 당시 두 부류의 사제 또는 여성 의술인 같은 이미지의 여성이었다고 보아 합리적인 것이다.

웅녀, 홍익인간의 아상을 펴는 세상 건설에 중심인재가 되다
환웅은 태백산 신단수 지역을 중심으로 모든 이가 행복할 세상을 이루고자 언제나 좋은 방안을 찾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미 추진하던 신시의 운영은 그에게 가장 중요한 정책 실현의 현장이요, 그 자체가 정치적 시험대였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일부 연구자들은 신시를 신이한 굿터로 풀이하기도 했다. 사람들의 고통을 풀기 위한 푸닥거리를 펼치던 제의 장소 정도로 이야기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같은 견해는 적지 않은 민속학적 가치를 느끼게 해 주고 있어 소중한 견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관점과 더불어 신시가 신령스러운 장터의 의미도 함께 지닌 것이라면, 신령한 분위기외 함께 거래가 이루어진 실용적 의미가 어우러지던 곳으로 헤아려진다. 따라서 신는 그저 관념적이고 철학적 의미에만 머물지 않는다. 결국 세상의 사람들에게 실용적 이익을 느끼게 한다는 게, 바로 크게 사람 사이를 이롭게 한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말 그대로 홍익인간 말이다. 그런데 홍익인간이란 표현을 구태여 한학적 개념으로 풀이해 본다. 인은 문맥상 내가 아닌 남, 곧 남(타인)이다. 그러므로 홍익인간이라는 말은 정화하게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크게 더할 바가 됨이란 뜻이 된다. 곧 이타적 공익을 표현한 셈이다.
사람의 사이에 이룩된 장터는 소통과 거래의 긴요한 공간이 되었을 터이다. 그 공간에서 사람들은 곰 털가죽도 팔고, 호랑이 털가죽도 팔았을 것이다. 파는 쪽이나 사는 쪽이나 손해남이 없이 거래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매우 곧은 이가 사이에 중재하지 않으면 .안 됐을 것이다. 바로 그런 역할을 환웅이 주도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한 분위기에서만 모두 이익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한편 신시의 운영에서 의술에 뛰어난 인물도 했을 터이다. 아프거나 다친 사람을 치료할 누군가가 당연히 필요했을 터이다. 바로 그 같은 목적에 부합하는 인물이 웅녀였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웅녀는 환웅에게 홍익인간 세상의 건설과 운영을 하는 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인재요 여성 지도자의 성격을 지닌 존재로 자연스럽게 헤아려진다.
웅녀가 천하 최고의 사내와 멋진 혼인, 행복한 가정을 모두 이루다.
웅녀는 환웅이 제시했던 고난도 수련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서, 더욱 원숙한 여성의 몸을 갖추었다. 그러한 변화에는 약을 마셨던 점이 적지 않은 요소가 되었을 터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너무나 훌륭하게 달라진 그녀에게 아무도 혼인하려 들지 않았다. 너무 예쁘고 충실해진 몸매에 모든 사내가 자신감을 잃은 까닭일까?
이유야 어떻든 혼인할 배우자를 찾기가 어려워진 웅녀는 마음속으로 고민했다. 그러다가 환웅의 정치적 이념의 현장인 신단(神壇)이 있는 나무아래에서 마음의 고민을 털어놓고 간절하게 기원했단다. 아이를 갖게`해 달라고, 웅녀가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한 점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어째서 훌륭한 낭군을 맞이하게 해 달라고 하질 않고, 앞질러 아이를 갖게 해 달라고 기원한 것일까? 아마 그녀는 사내를 그리워하고 있음을 드러내기가 못내 쑥스러웠던지, 아니면 정말로 아이를 갖고 싶어 그렇게 기원한 것인지 알수 없다.
어떻든 그녀의 기원 행위는 마침내 환웅의 눈에 발견되었다. 여기서 곱씹어 볼 점은 .당시 웅녀의 속마음이다. 혹시 그녀의 마음에 환웅을 낭군으로 맞고 싶은 소망은 없었을까? 앞서 밝힌 대로 임석재의 민속 설화조사 자료에 따르면, 환웅은 그 몸의 신(腎, 남성 생식기)이 무려 ”예순 댓발이 되어 모든 동물이 마다”할 지경이었다는 농담까지 불렀던 인물인 것으로 전해진다. 비록 민속 설화에 지나지 않지만 그 같은 민속설화의 내용은 환웅이 매우 사내다운 기품과 체모를 갖추고 있었음을 일깨워 준다. 그 같은 설화적 분위기가 사실과 부합된 것이라면, 웅녀는 사실상 당시에 가장 건장하며 멋있는 사내인 환웅을 몹시 그리워했을 가능성도 있다.
어떤 사내조차 감히 넘보지 못할 미모와 체질을 갖춘 여인과, 당대 가장 건장하고 멋진 사내의 혼인은 누가 생각해도 자연스러운 결합이 될 터이다. 결국 웅녀의 기도가 지닌 속내를 눈치 챈 환웅은 잠시 여가를 내어 그녀와 한 부부가 되기를 마다치 않았다. 따라서 웅녀의 몸에 이내 아기가 생겼고, 열 달이 되어 태어난 그 아기가 바로 단군왕검이었다는 게 삼국유사 속의 단군 관련 설화의 요지다. 결국 웅녀는 당시 천하 최고의 사내에게 속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그 천하 최고의 사내를 낭군으로 맞은 셈이었다.
웅녀의 간절한 기원과 그에 호응한 당대 최고의 사내 환웅의 하나 되는 혼인은 이후 가장 훌륭한 치적을 이룬 아들을 낳음으로써, 극적이고 화려한 절정을 이룬다. 모든 계 차분하면서도 의지가 강했던 웅녀의 간절한 소망이 낳은 결과일까? 이후 웅녀의 삶은 훌륭한 아들인 단군왕검의 양육으로 이어지고, 그 결과 조선이라는 나라의 개국으로 확대된다.
따라서 웅녀의 삶은 초기에 거친 들녘의 한 여성 지도자로 리더십을 쌓았고, 이어 환웅과의 만남으로 동아시아의 전래 지식이던 지극한 도의 정수를 깨우침과 더불어 신약(神藥) 제조에 관한 비법의 체득으로 한결 발전하였고, 마침내 당대 최고의 남성 영웅인 환웅의 배우자가 되어 개국의 주도자인 단군왕검을 출산함으로써 대단원을 맞이하였던 것으로 요약된다. 실로 웅녀가 드러낸 삶의 자취를 미루어 보아, 그녀는 동아시아의 어느 여성보다 성공한 삶을 보여준 사례를 만들었다고 평가할 만하다.

김영해(한국민속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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