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발명 역사시대 서막 의술, 64괘, 5줄 거문고 만든 음악의 대가, 상업의 신, 농사의 신

태호 복희 씨 다음으로 3황 가운데 두 번째 등장하는 지도자가 신농 씨이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며 시간적 연속성 여부도 분명하지 않다. 복희씨 시절은 전설적 요소가 많지만 신농 씨는 처음으로 문자를 만들어 그릇에 새겨 놓았기 때문에, 이 시기부터는 역사시대로 보게 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문자의 발명은 인류 역사에 큰 획을 긋는 전환점이 되므로 신농 씨의 업적은 참으로 놀랍고 칭송할 만하다. 중국의 한 학자는 청동기의 금문을 해석해 제왕들의 족보를 캐냈는데 그 결과 또한 매우 놀랍고 충격적인 것이었다.
낙빈기라는 이 중국학자에 따르면 신농 씨와 그 이후의 5제로 불리는 소호 금천 씨로부터 제요, 제순에 이르기까지 모두 동이로서 우리의 조상임이 드러난다. 중국인들이 우리의 조상을 자기들의 조상으로 가져간 것으로, 일본 왕실의 조상이 백제인인 경우와 같다고 하겠다. 그리고 낙빈기가 밝힌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실은 신동 씨와 헌원 공손 씨의 두 집안끼리 결혼하여 사위에게 제왕의 자리를 물려주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신농의 사위인 소호가 제위를 이었으며, 요의 사위인 순이 역시 제위를 물려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사마천이 저술한 사기에는 사위가 아닌 아들이 계승한 것처럼 기록하여, 모계사회 의 흔적을 지워버리고 유교에 기초한 부계사회 체제를 갖추려고 하였다. 그리고 중화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중화의 시조로 위의 공손 헌원 씨를 5제의 첫 번째인 황제로 기록하여 그를 중화인처럼 가장했다. 그러나 위에서 본 대로 공손 씨는 동이였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는 제왕이 되지 못하였고, 대신 그의 아들인 소호가 실제 5게의 첫 인물이 됐다.
신농씨는 신시의 안부련 환웅 때 웅씨 집안의 소전이라는 거수국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여기의 웅씨는 곰을 토템으로 사는 부족의 거수(우두머리)로 보이는데, 훗날 단군왕검의 왕후가 된 웅녀와 같은 집안인 것이다. 신농의 아버지 소전 씨는 강수라는 강에서 병사를 감독하는 자리에 있었다는 외에는 달리 알려진 것이 없다. 신농의 어머니는 여등으로 알려져 있으며 거수 유교 씨의 딸이었다. 중화의 기록에는 여등이 화라는 곳의 북쪽에서 놀다가 신의 감응을 받고 신농을 낳았다고도 씌어 있으나, 신과 관련시킨 것은 고대인들이 성인이나 영웅에게 드리는 선물이거나 아니면 여등의 태몽이 아니었나 싶다.
신농은 강수에서 자랐기 때문에 성이 강(姜) 씨로 가문의 시조가 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여러 가지 풀을 맛보아 약을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그는 사람들의 병을 고칠 수 있는 훌륭한 의술을 베푼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연유로 해서 그는 ‘농사의 신’이라는 뜻의 신농이란 이름을 얻었다. 약초를 만드는데 그치지 않고 여러 가지 식용 작물을 재배하여 식생활을 크게 개선했으며, 쟁기와 괭이를 만들어 그 용법을 가르침으로써 성인 군주로서 확실하게 자리매김을 하였다. 그는 또한 8괘를 겹쳐 64괘를 만든 역(易)술의 신이었으며, 5줄 거문고를 만든 음악의 대가인 동시에 사람들에게 교역을 가르친 상업의 신이기도 했다.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겠지만 다재다능한 그의 천재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니 참으로 위대한 지도자가 아닐 수 없다.
신농 씨의 후손인 강 씨들 중에는 고대 역사상 유명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됐다.
요순의 5제 시대에 재상이었던 공공의 후손들이 하나라를 세운 제우 밑에서 4악이라는 지금의 장관급 자리에 있으면서, 당시 큰 재난이었던 장기간의 홍수를 다스리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 결과로 신, 려, 제, 허 등의 땅에 제후로 봉함을 받았다.
그 후손 중에 유명한 사람으로 강태공이 있다. 원래 이름은 강상으로서 낚시로 세월을 기다리다가, 주나라를 일으킨 무왕에게 발탁되어 은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일등 공신이 되었다. 이때가 서기전 12세기 였으므로 신농 때로부터는 1,400년 뒤가 된다. 부왕은 그를 태공으로 받들어 모시고 동쪽 제나라의 제후로 봉했다.
태공의 부임 초기 이웃 래(萊)나라가 공격 하여 영구 땅을 놓고 다투었다. 래는 동이로 고조선의 거수국이었다. 태공은 정치를 새롭게 하고 래의 풍속을 존중하여 의례를 간소화함으로써 래의 공격을 거두게 하였다. 같은 동이 사이였으므로 협상으로 잘 풀어나 갈수 있었던 것이다.
주나라는 대대로 강씨 집안의 여성과 긴밀한 관계가 있어 왔다.
먼 옛날 주나라의 시조인 후직의 어머니는 강원이었는데 그녀는 유태의 나라에서 시집왔다 (실제로 후직의 어머니는 간적이라는 여성인데 곧이어 살펴볼 것이다. 사마천이 사기에서 강원으로 바꿔버렸다). 주나라 중홍의 시조라 일컫는 고공단보는 역시 유태 여성 태강을 비로 맞았다. 그리고 은을 물리치고 중원의 주인이 된 무왕 또한 읍강이란 강씨 여인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이러한 전통을 볼 때 강태공의 발탁은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었던 듯하다. 한족들은 주나라로부터 실질적인 중화 민족의 나라가 시작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이 잘못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으니 그것은 앞의 중국 낙빈기라는 학자에 의해서다.
그가 밝혀낸 5제시대의 왕실 계보에 따르면 아주 흥미진진한 사실들이 많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주나라의 시조 후직의 출신이다. 그는 5제의 3번째인 제곡의 아들로서 어머니는 제곡의 차비 간적이다. 간적은 또 우도 낳았는데 그는 앞에 언급한대로 하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5제는 모두 동이인 신농 씨와 공손 씨의 후손임을 이미 보았으므로 그 후손인 하나라의 우나 주나라의 기(후직의 이름) 또한 중국에서 말하는 화하(華夏)가 아니라 동이임이 드러난다.
이것뿐이라면 흥미가 절반밖에 안될 것이나 우리를 제대로 재미있게 해 주는 사실은, 하나라와 주나라 사이에 존재했던 은 (또는 상)나라의 시조 설 또한 간적과 남매 사이로 동이라는 점이다.
은나라가 동이라는 사실은 중국에서도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낙빈기가 확실한 근거로 이를 뒷받침한 것이다. 우와 기의 어머니인 간적이 설과 남매라면 설은 우와 기의 외삼촌이 된다.
세 사람이 같은 시대에 하, 은, 주의 작은 나라들을 열었는데 이 나라들이 번갈아 중원에서 겨우 1,500년 정도 지속한 것이고, 바로 동북쪽 옆에서 고조선이 천자국으로서 훨씬 그 이전부터 있으며 법도를 가르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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