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타고라스 학파가 싫어하는 콩과 제비

피타고라스가 성과 관련해서 상당히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피타고라스학파는 남자들로만 구성됐다. 세상이 수를 기본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를 가지고 세상만사를 다 설명했다. 그리고 우주의 조화는 음악, 음악도 수로 보여줄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피타고라스학파에 재미있는 게 두 가지 금기가 있었다.
첫째는 콩을 먹어서는 안 된다.
둘째 집안에 제비 집을 짓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피타고라스는 자기 사상을 신봉하는 제자들에게 집에 제비집을 들이면 안 되고 콩도 절대 먹어서 안 된다고 주장했다.
제비는 매끈하게 생겼고 날렵한 몸매 이러면서 아주 빠르게 날아가면서 벌레를 낚아채버리고 또 철 지나면 떠나버린다.
서양에서는 제비가 삶과 죽음을 중개하는 새다. 본래 새라는 게 우리가 살아있는 생과 죽음의 세계를 중계한다고 보고 있다. 우리나라엔 솟대라는 게 있다. 일본도 도라이라 해서 세우는 게 새다. 새가 좀 신기하게 보는 거다. 우리민족에겐 삼족오라는 것도 그렇다 태양과 인간과의 중개자로 신수라 추앙받고 있다.
새가 하늘로 올라갔다가 나타나고 이러는 모습이 저 높은 하늘 신의 뜻을 우리 인간에게 다시 전해오고 이런 느낌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유럽의 겨울이 좀 길다.
4월쯤 되면 봄인데 그때 제비가 날아온다.
서양 속담에 한 마리의 제비가 왔다고 봄이 온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시그널이 왔다고 그걸로 판단하지 마라 이 말인데 그만큼 제비는 봄을 알리는 동물이다. 그러니까 겨울에 어둠을 깨고 쾌청한 봄이 왔다. 이걸 알려주는 새라고 사람들은 생각을 했다. 지중해 일대는 축축했는데 갑자기 밝고 따뜻하고 활짝 갠 쾌청한 계절이 오는데 이게 제비 이동하고 딱 맞아떨어진다. 어둠에서 밝음으로 축축한 대기가 봄이 돼가지고 건조해지고 흐린 하늘이 밝아지고 이렇기 때문에 죽음에서 삶으로 이동한다. 제비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죽음의 삶을 왔다 갔다 하는 일종의 메신저가 될 수도 있고 전령 같은 트릭스터라고 한다. 제우스의 그거를 인간 세상에 전해도 주고 신화에서 양쪽 영역을 왔다 갔다 하는 머큐리 신처럼. 그러니까 양쪽을 왔다 갔다 하는 것들이 제비다.
재빠르게 날면서 벌레를 막 그냥 잡아먹는 모습을 보면 제비가 탐욕스러운 동물이다.
먹이를 낚아챌 때 보면 탐욕스럽고 잔혹한 느낌을 준다. 옛날 사람들이 제비가 도대체 어디 있다가 왔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곰이 겨울잠을 자듯이 제비는 겨울에 물고기로 변해 물밑에 있다가 얼음이 깨지면 다시 새가 된다고 생각했다.
이야기 속에서 보통 귀신은 우물 이런 데서 많이 출몰한다. 옛날 영화 링 같은 데 보면 우물이 있고 뭔가 폐쇄적인 곳이다. 물이라는 게 사람들에게는 죽음의 영역이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갈 때 삶과 죽음은 판자 조각 하나로 결정된다는 옛 이야기가 전한다. 판자 조각 위에 서 있으며 살 거고 판자 조각이 무너지면 떨어지면 죽는 거다.
그만큼 물의 세계라는 거는 항상 죽음이고 물귀신 작전이란 말이 있다.
물귀신이 제일 무섭고 물속으로 끄잡아 들어간다는 탐욕스럽다는 말이다.
제비가 막 탐욕스럽게 뭔가 벌레를 낚아채고 가는 걸 보면서 그것들이 물에서 튀어나오고 이런 죽음하고 관련이 있는 생각이다.
제비가 봄을 알리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죽음이나 물의 영역과 관련이 있는 거다.
피타고라스는 이 세계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구체적인 게 아니고 추상적인 구성이라 숫자로 돼 있다고 말하고 순수한 거라고 했다.
왔다 갔다 하는 이런 걸 제일 경계하는 순수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딱 하나가 돼야지 이쪽에도 있고 저쪽에도 있고 이런 것들은 사람을 해친다고 봤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비가 삶과 죽음을 왔다 갔다 하기 때문에 절대 집안에 제비를 들이면 안 된다. 삶과 죽음을 갔다 왔다는 거는 우리를 위험하게 만드는 제비는 안 된다는 거였다.
제비는 어떻게 보면 악마적인 동물이라고 한다. 제비집을 집 안에 들여놓으면 죽음의 영역을 집안으로 가져온다는 거다.


두 번째 죽음의 영역에서 콩도 참 재미있다.
고기가 없을 때 이 식물성 단백질을 주는 콩이 인간에게 필수적인 그리고 5대 곡물로 들어간다.
원산지가 우리 한반도하고 남쪽이다. 우리하고도 긴밀한데 이 콩은 아메리카 인디언, 일본 그리고 그리스 등 콩이 죽은 사람을 위한 제사 때 사용을 하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 나카자시치 책을 보면 겨울이 완전히 물러나고 봄이 오면 입춘 때 의식을 치를 때 ‘귀신은 밖으로! 복은 안으로!’주문을 하면서 콩이나 팥을 던진다는 것이다. 귀신은 밖으로 쫓아내고 복은 안으로 들이는 의식이다. 우리도 벽사를 할 때 팥 같은 거를 던지기도 했고 소금도 많이 던졌다. 일본도 소금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콩을 던지면서 이제 봄이 왔다는 걸 알린다.
우리의 민족의 한 갈래가 아메리카로 건너갔던 인디언도 그런 유습이 남아서 그랬다.
보통 겨울이라는 거는 죽음의 계절하고 관련된다.
겨울은 기본적으로 죽음의 계절이다. 예전에 사형을 할 때 중국 같은 경우도 사형수들을 함부로 막 죽이지 않고 겨울철에 죽여요. 물론 예외도 있다. 그럴 때 아메리카 인디언들도 죽은 사람한테 콩을 던지고 그리스에서도 장례를 치르고 매장할 때 콩을 먹기도 하고 던지기도 한다.
아메리카 인디언은 이렇게 생각했다.
옥수수는 남성적이고 콩은 여성적이다. 그러니까 옥수수는 남자의 페니스를 상징하고 콩은 여성적으로 봤다는 것. 절대 정해져 있다기보다 상대적인 건데 옥수수가 남성적일 때 상대적으로 콩은 여성적인데 남자로 치면 예를 들어 옥수수는 남성의 직접적인 페니스를 상징하고 콩은 고환을 상징하는 거다. 콩이 고환 안에 말랑말랑하다. 상대적으로 콩과 옥수수 대립이 남자의 성기에서 만약 대립이 되면 고환과 페니스의 대립을 보는 거다.
그래서 좀 더 부드러운 고환은 페니스에 비해서 보다 여성적인 존재로 보는 거고 기본적으로 콩을 여성적인 걸로 보는 건 맞는데 상대적으로 볼 때는 옥수수에 비해서 콩은 여성적이다.
일본인도 좀 비슷하게 본다.
고환은 분명히 남성의 상징이지만 상대적으로 흔히 말해서 대포와 바퀴라고 할 때 대포에 비해서 바퀴는 좀 더 부드럽다.
일본 예를 여기서 들면 일본의 너구리가 상대적으로 큰 고환을 가지고 있어 일본에서는 대부분 여성적인 동물로 많이 여긴다. 고환이 크기 때문에 얘를 여성적인 동물이 그린다.
에도시대 그림을 보면 너구리가 물건을 사야 되는데 보자기 대신에 자기 고환을 펼쳐서 물건을 사는 모습이 있다. 실제 ‘너구리 대작전’애니메이션에도 너구리 고환 내용이 많다.
상대적으로 고환이 남자의 성기로 치면 남자에서는 이게 좀 더 여성을 상징하게 된다.
콩은 남성과 여성을 같이 갖고 있는 성격이다. 전에 콩을 여성이라고 봤듯이 일본에 유곽, 사창가의 비속어로 콩은 클리토리스로 본다. 기본적으로 여성의 성기는 남자의 성기보다는 해법적으로 좀 형태가 조금 불투명하다고 보는데 그 중에서 클리토리스가 가장 분명한 형태를 갖고 있기 때문에 아메리카 인디언도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이 콩은 고환하고 관계돼서 남자 신체 중에서 가장 남성적인 기관 안에서의 상대적으로 여성적인 부분이 고환이고 이게 바로 콩을 상징하고 또 같은 콩이지만 여성적인 그 안에 들어 있는데 가장 남성적인 부분이 또 콩인 것이다.
그러니까 콩이 남성이면서도 여성이고 여성이면 남성인 것이다.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다 같이 갖고 있고 그리고 남성, 여성은 대립하고 있는데 콩이 중재를 해주는 것이다.
콩을 통해서 남성 여성은 기능들이 서로 중개가 된다.
옛날에 신화를 보면 이 곡물이 어디서 나왔을까 쌀, 보리, 조, 수수, 콩 이런 게 어디서 나왔을까 여신이 살해를 당했는데 그 죽은 여신의 몸에서 눈이나 입에서는 쌀, 보리, 밀 이런 게 나오고 죽은 여신의 하복부에서는 콩이 나온다.
콩은 참 재미있는데 여성의 자궁을 기본적으로 움이라고 부르고 무덤을 툼이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사실은 이게 좀 묘하다. 자궁은 생명을 산출한 공간인데 이걸 또 무덤으로 돌아간다. 이렇게 비슷하게 보고 있다. 처음부터 죽음하고 관련된 콩은 그냥 살지만 죽음에서 나왔다고 콩은 생명에 가까이 있으면서 죽음에 가깝다. 그러니까 콩은 남성 안에 여성이고 여성 안에 남성이고 생명을 주지만 또 거기에 죽음이 들어가 있다는 거다.
죽음의 향기가 배어 있는 작물이 콩이기 때문에 망자, 죽은 귀신은 콩을 좋아하고 인간은 왜 콩을 그렇게 던지고 하느냐? 콩을 죽은 사람을 매개로 해서 소통이 가능하다고 하는 것이다. 콩을 던지면서 ‘죽은 사람은 나가라. 귀신은 나가고 복은 들어오고’이런 기능을 하고 있다.
그래서 피타고라스가 콩과 제비가 싫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중적 성격에다가 삶과 죽음을 중개하기 때문에 피타고라스의 교단은 여성 자체를 접근하는 걸 금지했다. 금녀의 집단인 거다.


이 사람들은 극단적인 금욕주의자들로 인간의 모든 욕망을 다 없애버리고 오로지 순수한 이 세상의 본질을 공부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이 세상의 본질은 숫자로 보고 그것은 추상이다. 이 피타고라스의 생각들에서 결국 나중에 플라톤의 이데아의 세계라는 것들이 영향을 받았고 이 피타고라스학파에서 금욕주의에 중세 유럽의 수도원이 이 모델인 것이다.
남자들끼리 살면서 우리끼리 공부하고 이런 식으로 우리끼리 금욕적으로 이런 식으로 해서 중세 유럽의 수도원의 모델도 됐고 그 다음에 플라톤으로 이어지는 서구의 형이상학적인 것에 영향을 주었다. 그 형이상에서 존재의 본질은 무엇인가? 끊임없이 그런 걸 추구하듯이 존재의 순수함은 무엇인가? 이게 결국은 순수, 본질, 단순, 명료 이런 걸 추구하니까 이 콩이 가지고 있는 삶과 죽음, 남성과 여성 이게 너무너무 싫었던 것이다.
그래서 콩을 먹으면 어떻게 되느냐? 남자가 콩을 먹으면 자기 체내에 과도하게 여성적인 것을 받아들인다는 거다. 아니마가 너무 많이 쌓인다는 거다. 그건 죽음하고 계속 가까이 가는 길이 되고 계속 죽는다는 거다. 그러니까 절대 그러면 안 된다.
그래서 절대 콩은 식용하면 안 되고 제비집을 집안에 들여서는 안 되고 몸속에 콩을 들여서도 안 된다.
실제로 과학적으로 맞을 수도 있는 게 콩이나 두부 이런 거 많이 먹으면 여성호르몬이 여기서 많이 나온다는 얘기가 있기도 하다. 그리고 또 은어처럼 쓰는 말이 ‘콩 깐다’는 말이 있다.
‘콩 깐다’남녀 간의 사랑을 나누는 것을 그렇게 표현하기도 한다. 일단 다산의 이야기다. 콩 껍질 하나에 많이 들어 있으니까 이게 뭔가 많이 애가 나오는 느낌도 주고 씨도 많이 들어 있으니깐 말이다. 살펴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콩이 그런 성적인 의미로도 많이 해석을 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자기들끼리 신비주의로 나가면서 대중들의 공격을 받아서 결국 나중에 다 깨져버렸고 사라져 버렸다.<일당백, 그리스 조각의 비밀과 피타고라스의 금기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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