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리는 만주에서 건국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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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성

만주인은 여진족인가?
우리는 한반도 한민족이라고 한다. 그리고 국사 교과서에서는 만주인은 여진족이라고 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한반도 한민족’이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고리시대를 보면 만주에는 여진족이 있다고 했고 조선시대에도 조선8도 밖에는 여진이 있다고 가르친다. 그렇다면 만주에 살고 있는 만주인은 여진족이라고 하여 우리와 다른 민족이다.

만주인의 역사인 발해와 고구리는 여진족의 역사이다
우리는 고구리(高句麗), 발해 역사를 우리역사라고 하면서도 만주인을 끌어안지 않고 여진족으로 밀어냈다. 이런 경우가 있는가? 사람은 받아들이지 않고 역사만 가져오는 심보는 무엇인가?
오늘은 고구리는 어디서 건국했는가?
고구리는 어디서 건국했을까? 국사를 보면 만주에서 건국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진족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역사가 맞다.

한반도 한민족이라는 개념으로 보면 만주인은 여진족이고 고구리가 만주에서 건국했다고 한다면 고구리가 조선8도로 들어오면 이것은 침입이 되는 것이다. 여진족이 한민족을 침략했다고 말할 수 있다. 민족개념에 대한 정의는 바르게 했는가를 물어 보아야 한다.

고구리는 만주에서 건국했는가?
고구리(高句麗)는 곧 졸본부여(卒本扶餘)다. 혹자는 말하기를 지금의 화주(和州), 또는 성주(成州)라고 하지만 이것은 모두 잘못이다. 졸본주(卒本州)는 요동(遼東)의 경계에 있었다.

<국사(國史)> 고려본기(高麗本紀)에 이렇게 말했다. ‘시조(始祖) 동명성제(東明聖帝)의 성(姓)은 고씨(高氏)요, 이름은 주몽(朱蒙)이다. 이보다 앞서 북부여(北扶餘)의 왕 해부루(解夫婁)가 이미 동부여(東扶餘)로 피해 가고, 부루가 죽자 금와(金蛙)가 왕위를 이었다. 이때 금와는 태백산(太伯山)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여자 하나를 만나서 물으니 그 여자는 말하기를, ‘나는 하백(河伯)의 딸로서 이름을 유화(柳化)라고 한다. 여러 동생들과 함께 물 밖으로 나와서 노는데, 어떤 남자가 오더니 자기는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라고 하면서 나를 웅신산(熊神山) 밑 압록강(鴨綠江) 가의 집 속에 유인하여 남몰래 정을 통하고 가더니 돌아오지 않았다. 부모는 내가 중매도 없이 혼인한 것을 꾸짖어서 드디어 이곳으로 귀양보냈다’고 했다. (<단군기檀君記>에는 ‘단군檀君이 서하西河의 하백河伯의 딸과 친하여 아들을 낳아서 부루夫婁라고 이름했다’고 했다. 지금 이 기록을 상고해 보면 해모수解慕漱가 하백河伯의 딸과 사사로이 통해서 주몽朱蒙을 낳았다고 했다. <단군기檀君記>에는,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夫婁라고 했다’고 했으니 그렇다면 부루夫婁와 주몽朱蒙은 배다른 형제일 것이다)

금와(金蛙)가 이상히 여겨 그녀를 방 속에 가두어 두었더니 햇빛이 방 속으로 비쳐 오는데, 그녀가 몸을 피하면 햇빛은 다시 쫓아와서 비쳤다. 이로 해서 태기가 있어 알[卵] 하나를 낳으니, 크기가 닷 되[五升]들이 만했다. 왕은 그것을 버려서 개와 돼지에게 주게 했으나 모두 먹지 않는다. 다시 길에 내다 버렸더니 소와 말이 그 알을 피해서 가고 들에 내다 버리니 새와 짐승들이 알을 덮어 주었다. 왕이 이것을 쪼개 보려고 했으나 아무리 해도 쪼개지지 않아 그 어머니에게 돌려 주었다. 어머니가 이 알을 천으로 싸서 따뜻한 곳에 놓아두었더니 한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는데, 골격과 외모가 영특하고 기이했다. 나이 겨우 일곱 살에 기골이 뛰어나서 범인과 달랐다.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는데 백 번 쏘면 백 번 다 맞혔다. 나라 풍속에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朱蒙)이라고 하므로 그 아이를 주몽이라 이름지었다.
금왕에게는 아들 일곱이 있는데 항상 주몽과 함께 놀았으니 재주가 주몽을 따르지 못했다. 장자(長子) 대소(帶素)가 왕에게 말했다. ‘주몽은 사람이 낳은 자식이 아닙니다. 만일 일찍 없애지 않는다면 후환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왕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주몽을 시켜 말을 기르게 하니 주몽은 좋은 말을 알아보아 적게 먹여서 여위게 기르고, 둔한 말을 잘 먹여서 살찌게 했다. 이에 왕은, 살찐 말은 자기가 타고 여윈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왕의 여러 아들과 신하들이 주몽을 죽일 계획을 하니 주몽의 어머니가 이 기미를 알고 말했다. ‘지금 나라 안 사람들이 너를 해치려고 하는데, 네 재주와 지략(智略)을 가지고 어디를 가면 못 살겠느냐. 빨리 이곳을 떠나도록 해라’ 이에 주몽은 오이(烏伊) 등 세 사람을 벗으로 삼아 엄수(淹水)에 이르러 물을 보고 말했다.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하백(河伯)의 손자이다. 오늘 도망해 가는데 뒤쫓는 자들이 거의 따라오게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겠느냐?’ 말을 마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주어 건너게 하고, 모두 건너자 이내 풀어 버려 뒤쫓아오던 기병(騎兵)은 건너지 못했다. 이에 주몽은 졸본주(현토군과의 경계)에 이르러 도읍을 정했다. 그러나 미처 궁실(宮室)을 세울 겨를이 없어서 비류수(沸流水) 위에 집을 짓고 살면서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고(高)로 씨(氏)를 삼았다(본성本姓은 해解였다. 그러나 지금 천제天帝의 아들을 햇빛을 받아 낳았다 하여 스스로 고高로 씨氏를 삼은 것이다). 이때의 나이 12세로서, 한(漢)나라 효원제(孝元帝) 건소(建昭) 2년 갑신(甲申)에 즉위하여 왕이라 일컬었다. 고구려(高句麗)가 제일 융성하던 때는 21만 508호나 되었다.“

삼국유사에서는 화주(和州) 성씨(成州)가 아닌 졸본주(卒本州)는 요동(遼東)의 경계에 있었다.
삼국유사는 동이전을 인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건국 위치를 화주에서 요동으로 내렸다.
국사는 어떤 자료를 가지고 고구리 건국을 만주로 가르치게 했는가?
한국사 교과서에서 고구려 건국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을 인용한다고 했다.
삼국지권30과 후한서권85에서 동이는 황해 동쪽하고는 관계가 없다.

삼국지 동이전에서 제일 남쪽 와인(倭人)은 회계(會稽), 담이(?耳-南越), 주애(朱崖), 이주(夷洲), 단주(?洲) 등에 있다고 했는데 그곳은 양자강 남쪽이다.
삼국지 한은 주입해거한지자호한왕(走入海居韓地自號韓王)이라고 하여 한(韓) 제후국이었던 곳으로 해주(海州)에서 들어가다

와인(倭人)이 회계, 남월, 남쪽에 있는 것으로 밝혀진다. 그리고 기준이 한을 일으킨 곳은 해주로 들어가 옛날 한(韓) 제후국 땅이다.

와인(倭人)은 마한 50여국 중 ‘구로국’과 ‘비미국’이 발전한 국가이다

한과 예의 북쪽에 있는 고구리가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평정했고, 고구리 동쪽 옥저는 해주가 있는 곳이다. 삼국지 동이전은 삼국사권46 지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옥저 동쪽에 낙랑국 지역이 요하 동쪽이다. 즉 낙랑국이 존재할 때 고구리?백제?신라는 옥저 서쪽에서 건국했다.
그런데 고구려 건국을 만주에 정착시킨 사람은 삼국유사를 쓴 일연이다. 고구리는 곧 졸본부다. 혹은 말하기를 지금의 화주(和州) 또는 성주라고 하지만 이것은 모두 잘못이다. 졸본주(卒本州)는 요동(遼東)의 경계에 있었다’고 일연은 말했다. 화주는 쌍성총관부가 있는 곳이다. 이렇게 남만주를 고구리로 그리는 것은 삼국유사를 따른 것이다. 삼국지 후한서 동이전에서는 낙랑국이 있을 때 삼국사권 46장에서 고구리?백제?신라가 건국됐음을 삼국사와 동이전이 말하고 있는데 일연이 소동파의 지장도를 보고 삼국사와 동이전을 무시하고 옥저 동쪽에 있던 낙랑국으로 고구리?백제?신라를 덮고 고구리 건국을 만주에 비정한 것이다.
삼국지 후한서 동이전에서 고구리 건국은 남제서권58지역이고 삼국사기권46지역인데 고구리 건국을 만주에 만든다고 우리와 다른 여진족이라는 만주인의 조상 고구리 건국지는 될 수가 없다. 그런데 어찌 일연은 고구리 건국을 만주로 잡았는가? 바로 소동파의 지장도 때문이다.

일연은 소동파가 동이를 밀어낸 지도 지장도 때문에 삼국 위치를 만주와 한반도로 잡았고 고구리 건국지를 만주로, 삼한을 조선8도 남부로 보았다.
18사 동이전 기록이 있는데도 일연부터 현재까지 이 과오를 모른다. 이를 위하여 낙랑국을 한나라 낙랑군으로 덮고 동이전으로 덮어서 결국 삼국사권46을 덮어 버려서 낙랑국이 존재할 때 건국한 고구리를 만주에서 건국한 것으로 왜곡하고 말았다.
이를 어찌 바로 할 수가 있겠는가? 뺏긴 우리의 역사를 통탄할 뿐이다.

글| 오재성(삼국사연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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