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가 僞書아님을 입증하는 史料고찰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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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연수의 제자 이유립이 보관하여 갖고 있던 원본 『환단고기』를 1949년 제자 오형기에게 정서(正書)시킨 것을 조병윤이 1979년에 ‘광오이해사’ 출판사를 통해 한문 원문의 필사본 『환단고기』를 출판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본 연구 논문에서는 『환단고기』의 편찬과 전래 과정을 검토하고, 『환단고기』가 위서(僞書)라고 주장하는 강단사학계 일부 역사학자의 논문과 출판된 저서들의 내용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청나라 이후 사용된 근대 용어라고 지목하는 『환단고기』에 기재된 특정 지명(예: 영고탑, 문화, 문명 등)과 역사 기술 사항 등이 위서론자들이 주장하는 사용 시기보다 더 오래 전에 사용된 증거들을 찾았다.
또한, 『환단고기』에 있는 역사적 내용과 지명 등이 현재까지 잘 알려 지지 않았던 일제강점기 이전에 출판되어 현존하는 역사서와 광복 후 발굴된 유물 등과 대조하여 진위를 확인한 결과 『환단고기』가 위서가 아님을 증명하였다.
특히 조인성 등 위서론자들이 1911년 계연수에 의하여 편찬된 『환단고기』의 원본이 없다는 것을 근거로 광복 후에 만들어진 위서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계연수가 1911년에 『환단고기』30부를 실제 출판했다는 것을 확실히 주장할 수 있는 『등사본 환단고기』의 존재를 확인했다. 이『등사본 환단고기』는 「삼성열기(三聖列記)」, 「단군세기」, 「북부여기 상, 하」만 수록되어 있다.
1979년 광오이해사 출판 『환단고기』「삼성기전 상」과 『등사본 환단고기』「삼성열기)」의 원문을 비교해볼 때 문장의 일부 다른 부분 있다. 『환단고기』「삼성기전 상」은 『등사본 환단고기』「삼성열기」의 원문 내용을 약 10% 정도 중요 부분을 수정, 추가 또는 일부 삭제됐으나 원문의 90%는 같은 내용이다. 「단군세기」, 「북부여기 상, 하」에도 중요 부분을 수정, 추가 또는 일부 삭제되어 있다.
『등사본 환단고기』는 한문 문장에 한글 현토가 달려 있고「삼성열기」를 보면 문장 끝에 “李沂註曰. –”이란 주해(註解)가 기재되어 있어 기존의 1979년 『환단고기』와 다르고 이유립이 아닌 제삼자의 소장본 『환단고기』를 보고 『등사본 환단고기』를 만든 것이라 생각된다. 어쩌면 『등사본 환단고기』가 1911년 계연수에 의하여 편저된 『환단고기』의 초본일 수도 있다고 추론하였다. 따라서 『등사본 환단고기』의 존재는 기존의『환단고기』가 1911년 계연수에 의하여 편저된 것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증거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환단고기』는 우리나라가 과거에 망실된 고대사를 복원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중요한 역사서라고 판단되며, 강단사학계나 재야사학계에서 역사를 전공한 전문가들이 위서론과 진서론의 투쟁을 종식하고 다함께 『환단고기』를 연구하여 우리나라 고대사에 왜곡되거나 부정확한 역사 내용이 있다면 이를 올바르게 바로 잡아 역사 발전에 기여할 것을 제안한다.

『등사본 환단고기』는 한문 문장에 한글 현토가 달려 있고「삼성열기」를 보면 문장 끝에 “李沂註曰. –”이란 주해(註解)가 기재되어 있어 기존의 1979년 『환단고기』와 다르고 이유립이 아닌 제삼자의 소장본 『환단고기』를 보고 『등사본 환단고기』를 만든 것이라 생각된다. 어쩌면 『등사본 환단고기』가 1911년 계연수에 의하여 편저된 『환단고기』의 초본일 수도 있다고 추론하였다. 따라서 『등사본 환단고기』의 존재는 기존의『환단고기』가 1911년 계연수에 의하여 편저된 것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증거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환단고기』는 우리나라가 과거에 망실된 고대사를 복원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중요한 역사서라고 판단되며, 강단사학계나 재야사학계에서 역사를 전공한 전문가들이 위서론과 진서론의 투쟁을 종식하고 다함께 『환단고기』를 연구하여 우리나라 고대사에 왜곡되거나 부정확한 역사 내용이 있다면 이를 올바르게 바로 잡아 역사 발전에 기여할 것을 제안한다.

『등사본 환단고기』와 1979년 출판된 『환단고기』를 비교 검토하고, 한문 원문에 ‘한글 현토’하여 등사 출판한 시기 및 등사기의 출현과 사용시기 등을 종합적으로 연구한 결과 『등사본 환단고기』가 1911년 이전에 만들어진 이기의 『환단고기』한문 초고(草稿)를 일제강점기 때 등사기로 인쇄한 것으로 판단했으며 그 근거는 다음의 추론과 같다.
1905년 대일항쟁시 독립운동가 단조사고(1911년)

추론3 : 등사기는 1886년에 발명되어 1890년부터 미국과 유럽에 사용됐으며 1910년 전후하여 조선에도 일제에 의하여 들여와 사용되기 시작했다. 등사기 를 사용하여 소책자나 시험지 및 안내문 등을 소량 인쇄하기 위하여 일제 강점기 초부터 광복 후 70년대 초까지 사용됐었는데 1950년대 이후는 지방이나 학교 등 에서 간혹 사용됐었다. 3?1운동 때도 독립선언서와 격문 등이 등사기로 인쇄하여 배포된 사례도 있다.

한문에 한글 현토(懸吐)를 달아 한정본을 인쇄하는 것도 주로 일제강점기 때 인쇄하는 방식으로서 해방 후에는 한문에 현토하여 인쇄하는 것이 순수 한글로 인쇄하는 경향에 따라 1950년대에 없어졌다. 인쇄된 한문본의 한글 현토(예: ‘하다’, ‘하야’ 등)를 보면 대한제국시대와 일제강점기 이후가 구분이 갈 정도로 다르다. (첨부 사진 참조) 따라서 『등사본 환단고기』의 종이 변색 정도와 한글 현토의 형태를 감안할 때 인쇄시기가 일제강점기로 볼 수 있다.

1905년 대일항쟁시 독립운동가 / 단조사고(1911년)

그러나 계연수에 의하여 출간된 『환단고기』진본이 아직 공개가 된것이 없음으로 『등사본 환단고기』가 계연수에 의하여 출간된 『환단고기』의 초고라고 추정되지만 『등사본 환단고기』에는 판본 내용이 없어 초고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운 상태이다.
따라서 『등사본 환단고기』의 원본을 여러 역사학자와 서지학 전문가에 의하여 감정하고 좀더 깊이 있게 연구하여 『환단고기』의 진본 여부 또는 『등사본 환단고기』의 정확한 출판 연대를 밝혀야 할 일이라 생각한다.

1899년 『보통교과 동국역사』와 1914년 『신단실기』
일제 강점기 정감록 등사본과 1959년 동사략

          

Ⅴ. 결론
『환단고기』는 우리나라 상고사를 재 조명해볼 수 있는 중요한 사서로 판단되며 기존의 사서와 비교하여 연구할 가치가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민영현 교수는 『환단고기』의 가치에 대해서 그의 논문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철학과 문화 그리고 역사를 말함에 있어 『환단고기』의 가치는 결코 소홀하지 않다. 비록 근대 실증주위의 학문 방법론 속에서 사학계가 이를 위서로 규정한다고 하여도, 『고기』와 관련된 상고사의 문제는 더 이상 실증만으로만 해결할 수 없는 다양한 내적 문제들을 던져 주기 때문이다. 역사는 언제나 살아 있는 현실로서 통시적으로 작용한다. 철학이 역사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이해한 역사가 자신의 사론(史論)에 대한 것이다. 동일한 삼국의 역사를 기록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있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다른 내용을 전달해 준다. 『고기』는 결국 다른 사서들과 기본적으로 그 관심의 영역을 달리하는 것이다. 이 것을 이해할 때 밝혀지지 않는 상고시대를 파악함에 있어 『환단고기』는 결코 소홀히 다루어서는 안 된다.”1) 59)

본래 역사학자가 아닌 본인도 민영현 교수의 논지에 공감하며, 위서론자들이 주장하는『환단고기』의 주요 지명(영고탑, 상춘 등)이나 단어(문화, 문명 등)들에 대해서 현존하는 역사 문헌과 지도에서 그 지명과 단어들의 사용 유래를 정확하게 밝혔다. 따라서 위서론자들이 주장하는 근거가 원천적으로 잘못 되었으며, 『환단고기』위서론은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의 탐구 노력이 없는 얕은 지식과 편향적 사고의 산물이라 판단된다.

위에서 논술한 “Ⅱ.『환단고기』가 위서라고 주장하는 근거와 반론” 내용과 “Ⅲ.
『환단고기』가 위서가 아님을 입증하는 사료”의 연구에서 현존하는 각종 사료(史料)와 지도 및 문헌에 있는 움직일수 없고 조작도 불가능한 증거들을 제시함으로서 『환단고기』가 위서(僞書) 아님을 입증하였다고 판단한다. 따라서『환단고기』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연구하면 외침과 내부적인 문제로 망실된 우리나라 상고사의 역사적 사실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을 갖게 되었다.

또한, 계연수가 1911년에 30부 발간하였다는『환단고기』원본은 찾지 못했지만, 『환단고기』의 초고로 판단되고 일제강점기 때 등사기로 인쇄한 것으로 추정되는『등사본 환단고기』를 발굴함으로써『환단고기』가 광복 후 1979년 사이에 이유립이 만든 창작 위서(僞書)가 아니라는 것과 계연수가 편찬한 『환단고기』의 실체가 있었음을 확인하는 성과를 얻었다.

본 논문에서 규명한 여러 가지 연구한 내용을 최종적으로 검토해본 결과 『등사본 환단고기』가 1911년 이전에 만들어진 이기의『환단고기』한문 초고(草稿)를 보
고 등사기로 인쇄한 것으로 판단하였으며 그 근거는 “Ⅳ. 『환단고기』가 위서가 아님을 입증하는 사료 10. 등사본 『환단고기』”에서 논술한 내용으로 다음과 같이 요약한 것이다.

  1. 1979년에 출간된 『환단고기』의 범례(凡例)에는 이기(李沂)가 감수를 했 다고 기술 되어 있고 이 내용과 일치하는 것이『등사본 환단고기』「삼성 열기」「단군세기」「북부여기)」에서 중요한 문장마다 작은 글씨로 “이기주 왈 — (李沂註曰. –)”이란 감수결과가 기재된 사항 2.『등사본 환단고기』의 한문 원문이 초고로 판단하는 추론 1), 2), 3)의 내용 과 “한글 현토”하여 등사기로 출판한 시기(일제강점기)의 추정

따라서 『등사본 환단고기』가 1911년 계연수에 의하여 출판된 『환단고기』의 초고로 판단된다.

1979년 출판된 『환단고기』「삼성기전 상편」,「단군세기」,「북부여기상, 하」의 내용이 많은 부분에 있어서 『등사본 환단고기』의 내용을 수정, 변경, 추가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앞으로 여러 역사학자들이 심도있게 더 연구해야할 부분이라 생각된다. 아울러 『등사본 환단고기』가 1911년 계연수가 편찬한 『환단고기』의 초고인지 여부와 인쇄시기 등을 역사학과 서지학적으로 규명하는 것이 학계의 중요한 과제라 생각된다.

본인은 강단사학계나 재야사학계에서 역사를 전공한 전문가들이 다함께 우여곡절과 수난 속에 전래된 귀중한 역사서인『환단고기』를 폭 넓고 깊게 연구하여, 우리나라 고대사에서 왜곡되거나 부정확한 역사 내용이 있다면 학계와 정부 당국이 긴밀히 협조하여 우리나라 역사의 틀을 바로 잡는 노력을 할 것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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