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포만필> 형식이 자유로운 사상적 글쓰기

김만중의 문학사상을 전통적인 성리학적 문학관의 비판과 문학이 주는 감동의 기능, 자국어문학의 우월성 등의 관점에서 파악하고자 한다.

김만중은 피난 가는 배 안에서 유복자로 출생했다. 김만중은 일찍부터 모친의 엄격하고 자애로운 훈육 속에서 성장하여 모친에 대한 지극한 효심이 있었다는 것을 작품 속에서 보여준다. 만평(漫筆 ; 일정한 형식이나 체계 없이 느끼거나 생각나는 대로 글을 쓰는 일. 또는 그 글. 대체로 글 속에 사물에 대한 필자의 풍자나 비판이 들어 있다)이라고 하는 것은 형식이 자유로운 사상적 글쓰기가 가능했던 <서포만필>에는 당대의 소통수단이었다고 하는 점을 인정하면 서포의 주장은 급진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확정된 기존 관념의 뒤집기라는 말로 집약될 수 있다.

표의문자에 대한 표음문자의 우월성, 불교와 유교의 상대적 가치 인정, 한문학에 대한 자국어 문학의 가치인식, 기록 문학을 뛰어 넘어서 전개되는 구비문학을 근거로 한 일반론, 인심도심설과 같은 정통 성리학의 근본개념을 부정하면서 전개되는 감동의 문학관, 문학작품 수용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문학의 중층적 의미에 대한 식견, 화이론 속의 우열관계에 대한 반론 등은 당대 문인 학자들의 상식적인 사상과 식견에 전문적인 비판과 역전을 시도하는 중요한 출발선상에 올랐다고 본다.

김만중 / 위키백과사전

문학은 한문학을 중심으로 확정된 규범 속에서 그 가치의 우열을 평가했다. 한문학은 곧 한자라고 하는 표의문자를 수단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조선 사람의 사상과 정서 등을 온전하게 드러내기에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불편한 점이 많았다. 서포는 당시에 확정된 한자와 한글의 우열관계를 뒤집기 위한 방편으로 표의문자와 표음문자의 가치에 특별한 논법을 진술하기로 했다.

언어문자의 이치를 따지면 한자와 같은 표의문자는 그 한계가 명확하다는 것이고, 글자를 생성시키는 원리가 초성, 중성, 종성의 합용에 따라 무궁무진하다는 사실과 언어문자의 이치가 다른 민족들 사이에서도 기본원리로 작용할 수가 있다고 보았다. 표의문자에 대해 표음문자가 갖는 보편적 언어문자의 생성원리가 우월하다는 것은 서포의 문학관이 확대되어 가는 토대가 된다고 본다.

문학적 근원적 요소로서의 말과 자국어 문학의 가치를 서포는 문학의 가장 근원적 요소로서 문자가 아닌 말의 가치를 인식하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이 입에서 나오는 말이 된다. 말이 절주를 가지면 歌, 詩, 文, 賦가 된다. 사방에 말은 비록 같지 않으나, 말을 할 줄 아는 자라면 각기 그 말로써 절주를 삼아, 모두들 천지를 움직이고 귀신을 통화할 수 있다. 중국에서만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다(西浦漫筆).

말은 보편적인 것이어서 어느 민족에게나 존재한다. 말로 된 문학을 긍정함으로써 중국의 한문학에 한정된 문학론을 극복하는 논리를 마련할 수 있게 한 점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문자를 배워야 기록문학 행위를 할 수 있으며 그렇지 못한 사람은 구비문학으로 한정될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 구비문학은 문학이 아니거나 문학이어도 좋다는 별로 볼 것 없는 가치가 떨어지는 문학으로 볼 수 있는 당시의 현실에서는 매우 진보적이고 파격적인 인식의 전환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의 문학 관습에서 가장 높은 가치는 한문학에 있었다고 본다. 국문문학은 그 하위에 있었으며 구비전승의 문학은 가장 열등한 위치에 있는 것이었다. 서포는 가장 높은 문학과 가장 낮은 문학을 함께 거론하며 둘 사이의 관계를 역전시키는 파격적 논리를 전개했다.

자국어 문학은 자국어로써 형상화할 때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는 논리로 보았다. 우리말로 된 송강의 가사는 한문으로 옮겨지면 그 아름다움이 사라진다고 한문으로 번역된 의미만이 아니라 한문학의 전통 양식 가운데 어느 하나로 전환되면 더욱 본래의 아름다움은 사라진다고 하는 논리이다. 한문만이 권위와 품격을 갖추었다는 당대의 인식은 편견에 불과하며 송강의 가사처럼 한문으로 번역할 수 없는 그 자체로 아름다움은 지닌다고 보았다.

송강의 가사 작품 중 <후미인곡(속미인곡)을 으뜸으로 치는 것은 다른 두 편에 비하여 한자어의 사용이 적고 우리말을 더욱 아름답게 구사했기 때문이다. 서포에게 있어 문학작품은 그 뜻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선행돼야 할 것은 말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해 낼 수 있는 자국어문학의 요건을 충족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해석과 수용의 다양성이란 문학작품이 독자에게 수용될 때, 단선적이고 일방적인 경로를 통하는 것이 아니다. 작품을 향유하는 사람 하나하나가 자기방식대로 그 의미를 해석하고 수용하는 다양성을 인정해야 문학이 갖는 해석이 다양하게 확대된다고 본다. 독자가 문학 작품을 통하여 자기발견의 감동을 가지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드러난다. 자기발견의 감동은 개개인의 삶의 방식이 다르고 체득하고 있는 삶의 위치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일률적인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문학 작품의 다양한 해석과 수용이 작품의 다면적인 가치를 드러내는 데에 소용이 되면 그 자체로 의의를 지닌다고 하는 독자적 중심의 문학론과 이어지는 지점이며, 감동의 문학론으로 나아가는데 있어 중요한 근거가 되어 진다.

감동의 문학론에서 인심은 발현됐을 때,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한 것이어서 심성의 수양을 통하여 바른 곳으로 나아가고 옳고 선한 것으로 발현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요체이고 문학이라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으로서 가치를 지닌다고 하는 것이 절대적 지위를 누렸다. 서포는 이를 근본에서부터 부정했다. 광해군의 일화를 기존의 인심도심설을 부정함으로써 가능해지는 자신의 문학론을 전개하기도 했다.

감동의 문학론은 당시로서는 배경론의 대상이었던 통속소설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으로 확대된다. “『동파지림(東坡志林)』에 말하기를 거리의 어리석은 아이들은 그 집에서 싫어하고 괴롭게 여기는 바다. 문득 돈을 주어 모여 앉게 해서는 옛이야기를 들려준다.『삼국지』이야기를 해 주는데 유현덕이 패했다는 말을 들으면 얼굴 찡그리고 눈물을 흘리는 아이도 있으며, 조조가 패했다는 말을 들으면 즉시 기뻐 소리치니 이것이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진수(陳壽)의『삼국지』, 온공(溫公)의 『통감』을 가지고 무리를 모아 가르친다면”,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이치는 인심과 도심의 관계로 설명하고 문학과 같은 갈래는 본디 갖고 있는 감동의 요인으로 접근해야 가능하다는 인식이다. 자기발견의 감동은 일반 백성이나 선비, 남녀노소, 고금을 막론하고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문학의 향유 층을 특정 계층에 제한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열어놓는 문학론의 출발점을 서포가 마련하고 있다.

<사씨남정기>는 인현왕후와 장희빈 사이에서 매끄럽게 행하지 못한 숙종을 풍자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졌다고 일반적으로 보고 있지만 이후에 많은 논의가 보충되어 최근 연구에서 다른 측면을 많이 강조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숙종을 풍자하여 숙종에게 깨닫게 하려고 했다면 국문으로 썼다는 것이 우선 납득하기 어렵고, 악인으로 묘사되는 교씨가 장희빈과는 일치되는 점이 적기 때문에 선악의 대립과 천리와 인욕의 대립을 작품에서 드러내려고 한 것으로 보고 있다.

<구운몽>은 초기에는 불교의 空사상을 주제로 파악했으나 결말 부분에 있어서는 속세의 성취가 다 허망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 같아서 아쉽다.

문학적 근원적 요소로써의 말과 자국어 문학의 가치를 서포는 문학의 가장 근원적 요소로써 문자가 아닌 말의 가치를 인식하고 나아가서는 감동의 문학론은 당시로써는 배경론의 대상이었던 통속소설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으로 확대된다는 점이다.

글 | 홍정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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