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당(扃堂)의 기원과 의의-조선의 성균관

고려의 국자감(國子監)1)은 1298년(충렬왕 24)에 원의 압박으로 성균감(成均監)으로 되었다가 1308년(충선왕, 즉위년)에 다시 성균관(成均館)2)으로 강등됐다.성균관은 황제 나라의 교육기관이었던 벽옹(辟雍) 또는 국자감보다 한 단계 낮은 이름이었다. 1356년 배원정책과 왕권 강화 일환으로 국자감으로 환원하였으나 1362년 다시 성균관으로 바꿨다. 성균관은 1910년 한일병탄 이후 경학원(經學院)으로 바뀌는 치욕적인 수난을 당했다. 학궁 또는 반궁이라고도 하였다. 이는 주나라 교육기관을 벽옹, 제후국은 반궁이라 부른데서 연유한다.개성에 있었던 성균관은 1398년(조선 태조 7) 서울(한양(漢陽)으로 이전했다. 성균관의 시설은 임진왜란 때에 모두 불타버리고 1601년(선조 34)부터 6년에 걸쳐 복구했다.소도(蘇塗) 자리에는 유학(游學)을 강의하는 명륜당(明倫堂)과 공자 및 중국과

연개소문과 조의선인

이 글의 목적은 동북아시아 최대 강국이었던 고구려의 조의선인(皂衣仙人) 제도와 연개소문으로 이어지는 부국강병의 근간을 살펴보고자 하는데 있다. 고구려의 중추 세력들의 활약상은 어디서부터 이어졌는가? 특히 고조선으로부터 고구려로 이어지는 교육 체계는 어떻게 이루어 졌는지? 그 의의는 무엇이었으며 고구려가 이룬 조의선인 제도가 백제, 신라의 교육 변화 경로가 조선으로 들어와 선인들이 백정(白丁)으로 추락, 오백 년 한(恨)을 쌓은 경로를 살펴본다. 동북아 최강대국 고구려고구려가 동북아 부국강병의 최강 대국으로 장장 900여 년을 존속했던 근간은 무엇이었을까? 고구려 고분의 벽화에 새겨진 수렵, 씨름, 기마행렬에서 보 듯 패기 넘치는 문화적 특징을

고대사서(古代史書) 분서(焚書)과정 4

1만 년 고조선의 흔적-《천문비기(天文秘記) BC 1916년 감성(監星, 天文臺)을 설치했다. 이 또한 2,548년 후인 632년 신라 선덕여왕이 첨성대(瞻星臺)로 이름을 바꾸었다. BC 1836년 11세 도해(道) 단군 때 천문경(天文鏡), 자명종(自鳴鐘), 양우계(量雨計), 측풍계(測風計), 황룡선(黃龍船), 양수기(揚水機), 자행륜거(自行輪車), 경기구(輕氣球), 자발뢰차(自發電車), 조담경(照膽鏡) 등 26종의 발명품이 나왔다고 『단기고사(檀奇古史)』는 전하고 있다.곽수경(郭守敬, 1231~1316)이 수시력(授時曆)을 만들기 위해 간의(簡儀), 규표(圭表), 앙의(仰儀) 등 12종의 관측기구를 설계, 제작했다고 했다. 곽수경이 석각(石刻)에 탁본된 연화루(蓮花漏, 시계의 일종)를 보고 그 제조 원리와 방법을 유추해 냈다는 기록에서 확인되듯, 단군조선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1434년(세종 16) 해시계 앙부일구(仰釜日晷), 청동 물시계(경점기),

고대사서(古代史書) 분서(焚書)과정

사서(史書)가 불태워 졌음[悉燒之]을 알렸다이규경(李圭景)❶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 서(五洲衍文長箋散稿序) 인사편(人事篇) 비위도참변증설(祕線圖讖辨證說)에는, 태종 11년 (1411) 1월 서운관의 참서를 불태운 상황과 1457년(세조 2년), 1469년 12월 9일 성종조의 수거령과 사서 목록(凡十九書目)을 같이 기록하여 고조선비사(古朝鮮史)가 참서류에 포함, 수거되어 불태워(悉燒之)❷졌음을 암시했다. 이 같은 확증은 여러 곳에서 드러난다. 북부여기(北扶飮記)를 저술한 범세동(范世東)❸의 화동인물총기(東人物叢記)에는 수많은 사서가 불태워 졌음이 기록되었고, 조선조 27대 왕조마다 수거령과 수(水), 불(火)에 의한 사서 처리가 진행되었으며, 때마다 조심스러운 증언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대표적인 예로 성종조에 서거정(徐居正)이 ‘삼경(三京)·삼소(三蘇)’라 하여 신지비사(神誌秘詞)❹의 내용을 거론하며 “지금 그런 글을 얻는다면 오히려 불살라야 마땅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