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祈禱)

사전적 정의는 신이나 절대적 존재에게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기를 비는 것이라 했다. 갑골문에서는 빌 기(祈)의 보일 시(示)는 해, 달, 별이 받쳐져 있고 제사상 위에 제물을 올려놓은 형상이다. 한 알의 곡식을 위해 해, 달, 별의 노고를 그린 것이다. 시경(詩經)에 ‘斤은 斤斤其明이고 明은 심(心)이다’ 했으니, 곧 마음이다. 마음을 다스림이 지감(止感)이고 이후 육감(六感)이 열린다. 빌 도(禱)의 목숨 수(壽)는 몸이다. 몸과 마음이 깨끗하여야 하늘의 은총을 받음이다. 모든 종교의식에서 행하는 기도(祈禱)는 이 같은 육신의 고백을 통해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고대로부터 우리 선조들이 성(聖)스럽게

성씨(姓氏)

성〈姓〉은 혈족적(血族的)이고, 〈氏〉는 영토적이다. 성(姓)은 모계씨족사회 시기에 발생했다. 같은 성(姓)을 가졌다는 것은 동일한 여자 조상을 가졌다는 의미이다. 성(姓)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씨(氏)다. 부계씨족사회 초기에 성(姓)과 氏는 부계씨족 혹은 부락을 표시했다. 계급사회에 들어와서 또는 씨(氏)는 귀천을 구별하는 의미가 있었으며, 귀족 남자만이 가질 수 있었다. 씨의 칭호는 대개 지명(地名)에서 부터 유래한 것이다. 춘추전국 시기에 사회적으로 큰 변화가 생겨나면서 성씨제도 역시 혼란이 발생하였다. 진나라 이전의 시기에는 성(姓)과 氏가 달랐다. 한대에 이르러 점차 평민들도 姓氏를 갖게 되었다. 진한(秦漢) 이후 姓 氏가 점차 하나로 합쳐졌다.

인삼/ 蔘, 參, 심

인삼의 기원과 한자 표기 변화는 언제부터였을까? 최초의 기록이 부도지(符都誌)에 보인다. 16절에 ”사람들은 영주(瀛州) 대여산(岱與山) 계곡에서 삼영근(三靈根)을 얻으니, 곧 인삼(人蔘)이었다. 그것을 영주해삼(瀛州海蔘)이라 하였으며… 이러한 것은 부도의 지역이 아니고는 얻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방삭초(方朔草)라 하니 세상에서 불사약이라 하는 것이 이것이다“ 라는 기록, ‘蔘’자를 썼다. 임검(壬儉) 때다. 단군세기에는 기원전 2137년 태백산에서 “삼신(三神)께 제(祭)를 올리고 영초(靈草)를 얻었는데 이를 인삼(人蔘) 또는 선약(仙藥)이라고 한다”라고 했다. ‘參’이라는 표기는 전한(前漢) 때인 기원전 33년 사유(史游)가 지은 급취장(急就章)에 처음으로 보인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인삼(人蔘), 상(上)에 난다”고 했다. 상(上)은 산서성(山西省)의 한 지방 이름이다.

염병할…/ 원숭이의 경고

염병에 원숭이가 등장했다. 두창(痘瘡)이다. 허준은 전염병이 나타나는 것은 바로 자연의 섭리가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원숭이와 관련, ‘원숭이 禺’자에 관련된 한자가 새삼스럽다. 산해경 전에서 ‘우‘는 큰 원숭이로 붉은 눈에 긴 꼬리를 가졌고 강남 산중에 많이 있다고 했다. 여기서 강남은 중국 저장성(浙江省) 지역이다. 배필 우(偶)자와 만날 우(遇)자를 보자. 배필 ’우‘자는 사람 人변에 원숭이가 든 특이한 한자다. 만날 ’우‘자에서 공자는 우불우시(遇不遇時)라 해서 만날 ’우‘자를 썼다. ’만나고 못 만나고는 때이다‘는 뜻이다. 아무리 재덕이 출중한 사람도 어려운 때를 당하는 경우에 그 상황을 정확하고

밀물과 썰물

‘밀물과 썰물’의 본딧말은 “미세기”다. 흔히 조석이나 조수라 한다. 이 미세기가 드나드는 곳을 우리말로 ‘개’라 한다. 강이나 내가 바닷물과 만나는 넓은 곳으로 ‘너븐개’라 부른다. 지금은 ‘개’를 한자말 ‘포(浦)’로 바꿔 땅이름으로 쓰고 있다. 강가나 바닷가 등 물 가장자리에 휘어서 굽어진 곳을 ‘포’라 한다. 목포는 ‘목개’ 무창포, 삼포 등도 ‘무창개’, ‘삼개’로 불렀다. 간석지는 바닷물이 드나드는 물가의 개흙 즉 개펄을 한자말로 이르는 말이다. 간척지는 호수나 바닷가에 둑을 쌓아 그 안의 물을 빼내고 농경지로 만들어 놓은 땅이다. 즉 간척하여 염전으로 만들어 소금을 얻다. 농토를 만들다처럼

한오백년

“한오백년”은 ‘강원도 산간지방의 정서가 새겨진 민요’라 풀이 되어 있다 그럴까? 고려, 발해 멸망 후 수많은 유민들이 조선으로 유입됐다 역성혁명으로 민심은 흉흉했다 조정은 이들을 반정세력으로 몰아 도성 90리 밖으로 이배, 감시 감독을 강화했다 세종은 1423년 음력 10월 8일 “백정”이라 명명했다. 이조실록 기록이다. 이 들은 추위와 기근에 시달리며 죽어갔다. 흩뿌리는 무서리는 수의가 되었다. 산자는 풀뿌리 산짐승을 잡아 연명했다. 불가촉자로 낙인, 짐승처럼 취급했다 BC2269년 부루태자가 소도 옆에 세운 “경당”의 수련자들은 ‘조의선인’이었다. 연개소문, 을지문덕이 맥을 이었고 그 유전인자를 이은 자들이 백정이었다. 1923년 진주에서 형평사가

갱헌

‘갱헌(羹獻)’은 제사과정에서 ‘국을 올림’을 말한다. 공자는 ‘무릇 종묘에 제사할 때는 개고기를 올린다’고 예기편에 썼다. 설문에 갱헌은 ‘크고 살찐 개고기’라 설명했다. 춘추전국시대까지 개는 희생 제물이었다. 헌(獻)자의 앞글은 ‘솥 권’자, 뒷 자는 ‘개 견犬’인 상형문자다 솥에 개고기를 삶아 국을 만들어 神과 조상에 바쳤다. 공자는 이를 최고의 예법으로 보았다. 큰 개는 견 오 곤 황, 작은 개는 ‘구(狗)’라 부른다. 종교계에서 쓰는 헌금, 헌성, 헌화와 헌시, 헌공, 헌수, 헌식, 헌배, 헌혈 등 쓰임새가 다양하다. 북두칠성 개자리인 천랑성, 북극성을 구진대성이라 하여 개와 연계했다. 개장국은 이처럼

여사(女史)

여사(女史)의 사전적 의미는 결혼한 여자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 달리 학덕이 높은 부인으로 불린다. 그러나 고대에는 궁에서 근무하는 여성의 직책이었다. 왕후나 중전의 행적기록과 문서를 맡아보던 여관(女官)으로 일종의 사관(史官)이다. 춘추전국시대 왕의 아내는 후(后), 제후의 아내는 부인(夫人), 대부(大夫)의 아내는 유인(孺人), 선비(士)의 아내는 부인(婦人), 서민의 아내는 처(妻)라고 했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호칭도 변한다. 하(夏)·은(殷)·주(周) 시대 대부(大夫)의 아내를 일컫었던 유인(孺人)은 그 뒤 원(元)·명(明)·청(淸)대에 들어서 7품의 처까지 내려졌다. 숙인(淑人)·석인(碩人)·영인(令人)·공인(恭人)의 호칭은 송나라 때다. 군군(郡君)을 4등급으로 하여 그 부인을 호칭하고, 현군(縣君)을 3등급으로 하여 의인(宜人)·안인(安人)·유인(孺人)이라 했다. 조선의 경우 1396년

즘생

짐승의 본딧말이다. ‘즘’자는 乍(잠깐 사)와 心(마음 심)이 합쳐진 모양(怎)으로 음이 즘이다. 매우 독특하다. ‘어찌 즘’이라 풀이한다. 10세기 문헌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한자다. 우리는 거의 쓰지 않고 중생(衆生)으로 쓴다. 중생은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을 지칭한다. 움직이거나 꿈틀거리는 미물에서부터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생명체를 갖고 있는 것은 모두 중생의 범위에 속한다. 길짐승, 날짐승, 물짐승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허나 짐승에서 사람은 제외했다. 그럴까? 옛 사람들은 북두칠성이 생사를 주관한다고 믿었고, 그 별에 십이지(十二支)를 새겼다. 그리고 저 별은 내 별이라 꿈을 그렸다. 선인들은 북두칠성에 개자리인

참(站)

우리민족이 사용하는 말들의 원형을 찾아가는 작업은 중요하다. 인간이 내뱉는 말에는 어떤 의지와 파동이 스며 있다. 말에는 역사적 전통과 어떤 기운이 서려 있기 때문에 언어의 원형을 왜곡하고 잘못된 것은 그 말이 갖는 에너지와 역사성이 사라진 기능적인 역할만 활용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