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안(Arian)의 연구 2

한국에서 집단으로 건너간 이주민이 세운 나라들 5)게드로시아(Gedrosia -새로운 달의 집단) 알렉산더 대왕과 그의 후계자에 관한 책에서 게드로시아 (Gedrosia)라는 지역은 인더스 강에서 호르무즈 해협의 남쪽 가장자리 까지 이어진다 . 그것은 Bactria , Arachosia 및 Drangiana 국가의 남쪽에 직접 있었다, Carmania 국가의 동쪽 과 Indus River의 서쪽에 위치하여 서부 인도와 자연의 경계를 형성했다. 8)https://en.wikipedia.org/wiki/Gedrosia Gedrosia를 통해 Alexander의 정복을 보여주는 지도 By Fielding Lucas, Jr. – scanned from Plate 12 of A general atlas containing distinct maps of all the known countries in

도담삼봉

누정(樓亭)문화

자연과 함께하는 쉼(休)의 문화 우리 옛 선비들은 그 마을에서 가장 풍광이 좋고 아름다운 자연을 조망할 수 있는 비교적 높은 곳에 누각과 정자를 세웠다. 그 건물은 그들의 휴식과 풍류생활의 공간이며, 시문 창작의 산실이었다. 또한 벗을 만나 주연을 베풀고 자연과 하나가 되어 다정스럽게 시를 짓고는 서로 공감하며 고달픈 삶을 달래는 장소이기도 했다. 여유가 된다면 아름다운 한강이니 예나 지금이나 물가에 집을 짓고 살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조선 초기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에 의하면 전국의 누정 수는 57개였으나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전국 1,023개의 누정이

아리안(Arian)의 연구

Ⅰ, 고대 그리스의 기록에서 나타난 아리아나(Ariana-거룩한 태양의 사람들) 아리안은 우리 민요에 나오는 아리랑(Arirang)과 그 어원이 같거나 흡사하다고 본다. 독립군 군가로 불렀던 애국가에 “우랄(Ural)산에서 대마도 까지”란 가사는 우리 민족이 고대에 흑해 연안에서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2010년 하버드 대학교 아시아 연구소에서 펴낸 책(한국인의 기원)에 예맥족은 흑해 연안에 있었다고 발표한 적이 있다. 그리스, 로마시대의 학자들이 제시한 아리아나, 아리안 민족이 인도-이란인으로 연구됐다. 지리적 용어로 Ariana는 그리스 지리학자 Eratosthenes(기원전 276년–기원전 195년)에 의해 소개됐다. 그리스 지리학자 Strabo(기원전 64/63 년–AD 24)에 의해 완벽히 설명됐다. Eratosthenes’정의에 따라,

선유야 선유야 봉우리를 내 놓아라

한강 속의 풍류의 섬 ‘선유도’ 선유봉을 전설로만 묻어 놓을 것인가? 선유도에 봉우리가 두 개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가? 서울을 관통하고 흐르는 강, 지금은 한강으로 통일하고 다만 두 줄기로 나눠서 흘러오는 강을 남한강 북한강으로만 구분하고 두물머리에서 합수해 오면 한강으로 뭉뚱그려 놓았다. 과거엔 강의 이름을 세분화시켜서 서울로 흘러들면 경강이라 했다. 그리고 더욱 세분화되면서 용산에서 마포 앞 강가를 또 서강이라 했다. 그런데다가 선비들의 풍류의식은 더욱 발달해 굽이쳐 흘러가던 물결이 잠시 머무는 곳을 호수로 비유하는 시적변용으로 자신의 기개와 풍류의식을 드러냈던 것이다. 압구정 앞쪽을 동호라 했고

일본 열도 뒤덮은 한국지명, 일본은 한국이 세운 나라

고대 일본 열도에 존재하던 여러 소국들, 한국에서 집단으로 건너간 이주민이 세운 나라들 지명이 한국 옛 지명 본뜬 것, 무덤도 한국식 『일본 고대사의 진실』 일본 열도의 원주민과 초기 왜국들 일본 열도의 초기 왜국들에 대하여 언급하기에 앞서 이미 그곳에 존재하던 일본 원주민에 대하여 한마디 해 둘 필요가 있을 듯하다. 일본 원주민은 남녀 모두 얼굴과 팔에 문신을 하고 맨발로 다녔으며 문자도 없었다. 여자 옷은 홑옷으로 만들어 중앙에 구멍을 뚫어 머리에 뒤집어 써서 입는 관두의貫頭衣의 판초형으로 된 것이었다. 남자 옷은 가로나비가 긴 천을 단지

하피첩(霞帔帖)’ 강진 유배시절 다산이 만든 서첩

그대 치마 있거든 내게 보내주오 오래되고 빛바랬다고 버리지 않았다면 헤진 것이라고 버리지나 마소 당신의 체취 스민 것 더욱 가치가 있겠지요 우린 저마다 하나씩 하피첩을 하나씩 만들면 어떻겠소. 그대는 그 자체로 오직 나의 하피첩이 되어 주소 -그대는 그대로 나의 하피첩- 남양주의 다산 부인 홍씨는 왜 강진으로 치마를 보냈던 것일까.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이 유배 생활 10년째인 1810년, 남양주에 있는 부인 홍씨가 강진 다산초당(茶山草堂)으로 5폭짜리 빛바랜 치마를 보내왔다. 시집 올 때 입었던 명주 치마였다. 정약용은 남양주 시절부터 비단으로 책 표지를 종종 만들었다고 한다.

김만중

<서포만필> 형식이 자유로운 사상적 글쓰기 김만중의 문학사상을 전통적인 성리학적 문학관의 비판과 문학이 주는 감동의 기능, 자국어문학의 우월성 등의 관점에서 파악하고자 한다. 김만중은 피난 가는 배 안에서 유복자로 출생했다. 김만중은 일찍부터 모친의 엄격하고 자애로운 훈육 속에서 성장하여 모친에 대한 지극한 효심이 있었다는 것을 작품 속에서 보여준다. 만평(漫筆 ; 일정한 형식이나 체계 없이 느끼거나 생각나는 대로 글을 쓰는 일. 또는 그 글. 대체로 글 속에 사물에 대한 필자의 풍자나 비판이 들어 있다)이라고 하는 것은 형식이 자유로운 사상적 글쓰기가 가능했던 <서포만필>에는 당대의 소통수단이었다고

김시습을 논하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세로(世路)의 말(末)’이란 김시습이 말년에 세상을 등지고 방랑을 떠났던 시절을 말한다.매월당 김시습이 박제상이 쓴 증심록을 읽고 난 뒤 징심록추기(澄心錄追記)를 쓰면서 제1장에서 <세로의 말(世路의 末)>을 언급했다 ‘세로의 말을 당하여 천리 밖으로 유랑한다’는 말을 적었다. <세로의 말>은 세상의 길 즉 인생의 끝자락에 섰다는 뜻이다. 매월당이 말년에 세상을 등지고 방랑을 떠났던 시절을 말한다. 자유분방한 김시습이 세상의 조악한 틀을 놓아버리고 인간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자유로이 ‘유무극지야(遊無極止野)’의 경지로 들어섰다는 말이 된다. 격랑의 시대를 치열하고 굴곡진 인생을 살아왔던 매월당이 활연한 세상살이의 뜻을 훤히 간파한 인생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