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산의 지명 유래와 역사

성황사, 양천향교, 고성지 성터 서울 강서구 가양동 올림픽대로와 접한 한강변에는 해발 74m 높이의 나지막한 산이 있다. 이 산은 조선시대 양천현의 본거지로 궁산(宮山)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는데, 과거 삼국시대에는 근처의 지명을 따라 파산이라고 불렀으며 산 위에 쌓은 성이 있다 하여 성산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렸다. 그밖에도 관산, 진산이라고도 불렀다. 관산 성황사(關山 城隍祠) 이 사당(祠堂)은 성황사 신(神)의 위패를 모신 묘당(廟堂)이다. 성황사의 신(神)은 여신(女神)으로 이곳 마을 사람들은 옛부터 도당(都堂)할머니로 모시고 있다. 일찍이 조선시대 중종 25년(서기 1530년)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 東國與地勝覽)에 이르기를 양천현의 사당인 성황사는 성산에 있다(城隍祠。在城山)라고 했다.

임금은 본디 맑은 흐름을 좋아하지 않네

성희안, 시로써 연산군을 축출을 기획하다 ‘임금은 본디 맑은 흐름을 좋아하지 않네(聖心元不愛淸流)’ 서강 강가 월산대군의 정자에서 폭군 연산군과 술을 마시던 성희안(成希顔:1461~1513)이 써낸 시 구절이다. 일인 군주국에서는 왕의 한마디가 법인 시대에 감히 이렇게 비판적인 시를 써서 왕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조선 선비의 칼날은 혀에도 숨겼지만 주로 글 특히 시에서 드러냈다. 폭군이라고 알려진 연산군을 향해 이러한 비판적인 시를 읊조리는 건 자칫 자신의 머리가 뎅겅 날아갈 수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성희안은 그대로 시에 자신이 평소 품고 있던 칼날을 풀어 내던졌다. 연산군은 크게 화를 내어

겨울철 영묘사 옥문지에 개구리가 울다

여음이 있던 곳이 부양이고 지금은 영주(潁州) 진평왕은 사로국(斯盧國)를 기록한 <북사>에서는 진평까지 30세이다. 하지만 <삼국사>에서 4대가 빠진 것은 사로국(斯盧國) 시대 4대가 빠진 것이다. 18사동이전은 <남제서>권58지역의 역사이다. 겨울철에 개구리가 모였다. 현재 <삼국사記>卷46지역에는 여음(女陰)이 여음곡일 때는 가능성이 있다. 여음이 있던 곳이 부양이 되고 지금은 영주(潁州)다. 20세기 여음(汝陰)에는 이런 지형이 있다. 진평 기록은 <북사>에서 사로국의 30세 진평에 이른다 했으니 4대가 바로 사로국(斯盧國)시대 역사인 것이다. 진평은 18사동이전과 공통부분이다. 제27대 덕만(德曼-曼)은 혹 만(萬)으로도 쓰는데 시호는 선덕여대왕이니 성은 김씨이며 아버지는 진평왕이다. 정관6년 임진에 왕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린

도화녀(桃花女)와 비형랑(鼻荊郞)

날고뛰는 모든 귀신의 무리, 이곳에는 아예 머물지 말라 제25대 사륜왕(四輪王)의 시호(諡號)는 진지대왕(眞智大王)으로, 성(姓)은 김씨(金氏), 왕비(王妃)는 기오공(起烏公)의 딸 지도부인(知刀夫人)이다. 대건(大建) 8년 병신(丙申; 576, 고본(古本)에는 11년 기해(己亥라고 했는데 이는 잘못이다)년에 왕위(王位)에 올랐다. 나라를 다스린 지 4년에 주색에 빠져 음란하고 정사가 어지러워지자 백성들이 그를 폐위시켰다. 이보다 먼저 사량부(沙梁部)의 어떤 민가(民家)의 여자 하나가 얼굴이 곱고 아름다워 당시 사람들은 도화랑(桃花郞)이라 불렀다. 왕이 이 소문을 듣고 궁중으로 불러들여 욕심을 채우고자 하니 여인은 말한다. “여자가 지켜야 하는 것은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 일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있는데도 남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