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사관과 민족개념의 탈피해야 삼국사와 동이전이 보인다

반도사관과 민족개념의 탈피해야 삼국사와 동이전이 보인다고리(高麗) 이전의 역사는 삼국사와 동이전으로 밝혀진다. 고구리는 연방으로 가한지역을 포함하는데 마립간도 가한이므로 조선8도에서 선비가 진출한 헝거리와 돌권이 진출한 튀르케까지 고구리 강역이었다. 또한 유‧연‧제‧로와 오‧월 지역까지를 포함한다. 그런데 이성계의 조선은 압록강–두만강 남쪽 사람들만을 동족으로 보고 삼국사와 동이전의 역사도 조선8도에 맞추어 왔다. 그리고 조선8도 사람만을 민족으로 보고 그 북쪽인을 다른 민족이라면서 여진족이라 말한다. 여진족은 고구리, 발해의 민족인데 그들을 배제하면서 역사는 우리역사라고 말하는 모순된 생각을 하고 있다. 결국 한(조선)민족은 이성계 조선인만을 기준으로 하면 1392년 독립한 민족이라 할 수

우리 역사 정사(正史)로 골격을 맞추자

골격을 완성시킬 자료는 정사(正史)다 고리 이전을 연구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이 사료이다. 고리 이전을 연구할 때 기본이 김부식찬<삼국사기(이하 삼국사)>와 <사기>에서 <당서>까지 18사동이전이다. 이 두가지가 없었다면 결코 고리 이전을 정립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일연부터 <삼국사>와 동이전을 믿지 않고, 창작에 힘써왔다. 이것을 간파하지 못한 후학들이 답습하며 광신자가 되기 때문에 바로 보지 못한 과오는 어쩔수 없다고 하자. 그러나 연구하지 않은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개인이 아무리 출중하다 해도 수명의 한계가 있고, 수집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사는 공개적으로

장보고의 활동 지명으로 본 삼국위치

장보고는 유연제노(幽燕齊魯)와 오월(吳越) 사이의 사로신라 인물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이하 ‘삼국사’로 표기』신라본기에 의하면 장보고는 언제 출생했는지는 알 수 없고 당나라 武寧(무 령)군 소장이 됐다가 신라로 돌아와 청해진(淸海鎭)대사가 되고 894년 무주 사람 염장에게 피살됐다는 것이다. 김부식이 기록하기 전에는 고리(高麗-고려)땅에는 장보고에 대한 소문도 기록도 없었다고 했는데 『삼국사』에 있으니 「당서」『두예문집』등에서 인용한 것으로 보아서 그는 유(幽)연(燕)제(齊)노(魯)와 오(吳)월(越)사이의 맥제(百濟)를 멸망시킨 황해 서쪽 사로신라인의 후예로 보아야 할 것이다. 1) 『당서(唐書)』 동이전(東夷傳) 신라(新羅)변한(弁韓)묘예(苗裔)也—금성(金城)環八里—장보고 기록 ‘開成5年(840)에 홍로사에 적을 둔 질자와 공부하던 학생으로서 연한이 다한 사람 105명을 모두 돌려보냈는데 장보고, 정년도 그

광복한 사로신라와 독립한 신라 분별

신라본기의 신라와 삼국지 삼한의 사로국(斯盧國)과 신라 건국을 분별해야 한다. 삼국지 사로국은 삼국사기권46지역의 신라로 최치원의 제왕년대력의 신라이다. 그리고 만주와 조선8도에 신라는 어떻게 건국됐는가? 황해 동쪽 신라는 503년 고구리로부터 독립 이후의 역사이며 32-502년까지는 고구리 可汗 만주와 조선8도에 신라를 밝히지 못할 것으로 여겨 거짓 역사는 만들어선 안 된다. 삼국사와 동이전 후예가 하나 되는 동족사를 전해야 한다. 신라사를 해석하기 이전에 백제의 건국과 패망을 먼저 확인해야 한다. 일연이 낙랑국을 낙랑군으로 덮은 결과는 조선8도 역사가 사라짐을 몰랐을까? 삼국지 후한서에서 낙랑국은 동이전 밖에 있었다. 일연은 ‘최치원글’에서 삼한과

경상도 경주는 사로국 신라의 금성이 아니고, 徐那伐(서나벌)은 국호?

시조의 성은 박씨이며, 이름은 혁거세이다. 전한 효선제 오봉 원년 갑자 4월 병진[정월 15일 이라고도 한다.]에 왕위에 올랐다. 통치자는 거서간(거서한)이라 한다. 이 때 나이는 열 세 살이었으며 나라 이름은 서라벌이었다. (始祖, 姓朴氏, 諱赫居世. 前漢孝宣帝, 五鳳元年, 甲子, 四月丙辰[一曰正月十五日], 卽位, 號居西干, 時年十三. 國號徐那伐.) 삼한의 진한이니 삼국지권30과 후한서권85 삼한지역이다. (先是, 朝鮮遺民, 分居山谷之間, 爲六村: 一曰閼川楊山村, 二曰突山高墟村, 三曰觜山珍支村[或云干珍村.], 四曰茂山大樹村, 五曰金山加利村{加里村}, 六曰明活山高耶村, 是爲辰韓六部.) 이보다 앞서 조선의 후예들이 산골 사이에 분산되어 살면서 여섯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첫째는 알천의 양산촌이라 하고, 둘째는 돌산의 고허촌이라 하고, 셋째는 취산의 진지촌[혹은 간진촌이라고도

진번인(眞番人)과 재일동포, 왜노(倭奴)와 중화민국

역사는 반복되는가? 어떻게 반복되는가? 한사군(漢四郡)으로 등장하는 진번(眞番), 그러나 <사기>에는 진번군이 없고 <한서>부터 진번군이 등장한다. 그렇다고 진번이 <사기>에 없는 것이 아니다. 진번 임둔은 이미 <사기> 조선전에 등장한다. 분명 한사군 명칭이 없다. 조선인들을 봉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위만이 조선왕위를 어떻게 됐는지를 설명하지 않지만 위만이 왕이 된 이후에 진번과 임둔이 복속하는 기록이 있다. 한서는 定朝鮮爲四郡대신하여 定朝鮮爲眞番臨屯樂浪玄菟四郡이라 했다. 그런데 <한서>권95 위만전 앞쪽에서는 진번과 임둔이 복속했다고 했는데 뒤에 한사군에 명칭을 넣었으나 <한서>권27에서는 개삼군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조선 우거왕 때 내부 반란에 의하여

삼국사(기) 권46 상대사시중장과 계원필경의 上太師侍中狀의 문장비교

上太師侍中狀에 대하여 조선학자들은 외면하여 왔다. 그리고 조선국가사관과 민족사관으로는 결코 밝힐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삼국사>권46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계원필경집>에도 있으나 그 진실여부를 놓고 연구된 것도 없다. 그러나 <삼국사>권46 상대사시중장을 입증하는 사서가 <남제서>권58이다. 아울러 <사기>에서 <오대사>까지 18사동이전을 <남제서>권58지역과 한반도에 각각 대입해 보면 한반도에는 가능성이 적고 전자에 일치하고 있다. 그러므로 상대사시중장은 바르게 해석돼야 한다. 伏<以>(聞)東海之外有三國其名馬韓卞韓辰韓馬韓則高麗卞韓則百濟辰韓則新羅也 말씀을 드리면 동쪽 넓은 곳에 세 나라가 있는데 마한‧변한‧진한이다. 마한은 高句麗이고 변한은 백제이고 진한은 신라이다. 高麗百濟全盛之時强兵百萬南侵吳越北撓幽燕齊魯爲中國巨蠹隋皇失馭由於征遼 고구리‧백제가 전성할 때 강병(强兵) 100만으로 남으로 오‧월(吳‧越)을 다물(침범)하고, 북으로 유‧연‧제‧로(幽‧燕‧齊‧魯)를 다물(多勿

고구리는 만주에서 건국하지 않았다

만주인은 여진족인가?우리는 한반도 한민족이라고 한다. 그리고 국사 교과서에서는 만주인은 여진족이라고 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한반도 한민족’이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고리시대를 보면 만주에는 여진족이 있다고 했고 조선시대에도 조선8도 밖에는 여진이 있다고 가르친다. 그렇다면 만주에 살고 있는 만주인은 여진족이라고 하여 우리와 다른 민족이다. 만주인의 역사인 발해와 고구리는 여진족의 역사이다우리는 고구리(高句麗), 발해 역사를 우리역사라고 하면서도 만주인을 끌어안지 않고 여진족으로 밀어냈다. 이런 경우가 있는가? 사람은 받아들이지 않고 역사만 가져오는 심보는 무엇인가?오늘은 고구리는 어디서 건국했는가?고구리는 어디서 건국했을까? 국사를 보면 만주에서 건국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진족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조선8도에서 삼국통일은 없었다

조선8도에서 삼국통일은 없었다. 현재 일본 속담에 “거짓도 백번하면 참이 된다.(100番 主張すれぱになる)”는 말이 있다고 한다. 우리말에 진실은 꼭 밝혀진다는 말은 있지만 속담을 찾아도 신통한 것이 없다. 과연 거짓도 백번하면 참이 되는가? 그렇다면 거짓과 참의 경계는 무엇인가? 김부식은 진삼국사표에서 “지금의 학자와 관리들 가운데 오경 제자의 서적과 진․한의 역사에 대해서는 정통하여, 이를 자세하게 설명하는 사람도 있지만, 정작 우리나라의 사적에 대해서는 그 전말을 알지 못하니 이는 심히 개탄할 일이라고 생각하시게 되었습니다.(今之學士大夫其於五經諸子之書秦漢歷代之史或有淹通詳說之者至於吾邦之事却茫然不知其始末甚可嘆也)”라고 했는데 그야말로 삼국사편찬이후에 우리역사를 바로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일연의 삼국유사부터 단재의 조선사연구초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