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초식 / 양수반족고신요(兩手攀足固腎腰)

5초식 / 두 손으로 발을 쥐어 댕겨서 신장과 허리를 단단하게 만든다 인간의 몸은 복잡하다. 현대의학이 발달했다고 하지만 인체의 정체는 아직도 말 그대로 신비(神秘)한 영역이다. 모르니까 탈이나면 병원에 가고, 약국에 간다. 내 몸의 구조나 생김새, 작동원리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마치 자동차가 고장이 나면 보닛 한번 열어볼 생각하지 않고 정비소로 직행하는 것과 같다. 스스로 치유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됐다. 결국 평생 열심히 일해 돈을 저축해 놓았다가 결국은 병원에, 요양원에, 약국에 가져다 준다. 이것이 현대인의 질병 치료 이데올로기이다.내 건강을 위해 평소에

제4초식 / 오로칠상왕후초(五勞七傷往後焦)

4초식 / 몸을 뒤틀어 뒤를 돌아 몸의 다섯 가지 피로와 일곱 가지 상처를 치유한다 몸을 뒤틀어 뒤를 돌아 몸의 다섯가지 피로와 일곱가지 상처를 치유한다 서서 걷는 것은 인간이라는 동물의 특성이다. 인간이 선다는 것은 사실은 ‘기적’이〈? 오랜 시간 네 발 달린 짐승이 진화를 해서 이룬 엄청난 성과이다. 비록 네 발 달린 짐승보다는 빨리 달리지 못하지만, 서서 좀더 높은 시선으로 멀리 볼 수 있고, 가장 중요한 잇점은 두 손을 쓴다는 것이다. 손가락을 마음대로 움직이며 도구를 발명하고 이용하며 만물의 영장이 됐다. 인간은 설

제3초식 / 조리비위수단거(調理脾胃須單擧)

3초식 / 한 손을 머리 위로 들어올려 비장과 위장을 다스린다 민족 종교인 대종교를 창시한 나철((1863~1916) 선생은 평생 몸과 마음의 수련에 힘썼다. 문과에 급제한 뒤 승문원, 승정원 등의 관직에 근무했던 선생은 일제의 조선 침략이 본격화되자, 관직을 사임하고 유신회라는 비밀 단체를 만들어 구국운동을 시작했다. 을사늑약에 체결되고 나철 선생은 을사오적 암살단을 조직했으나 거사에는 실패했다. 그후 대종교를 창시해 민족 정신 운동을 펼쳤고, 구월산에 들어가 수도에 전념하다가 숨졌다.선생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알려졌다. 자결 방법은 폐식(閉息). 숨을 스스로 멈추는 것이다.선생은 자신을 잡으러 온 일본 헌병들이

좌우개궁사사조

제2초식 / 좌우개궁사사조(左右開弓似射雕)

2초식 / 기마 자세에서 좌우로 활을 당겨 독수리를 쏘아 잡는 동작. 임진왜란 당시 조선은 왜국의 침략과 약탈을 당했다. 무기의 열세였다. 바다에서는 거북선을 앞세우고 뛰어난 전략으로 왜국의 해군을 제압한 이순신 장군의 노력이 있었지만, 조총을 활로 맞서긴 역부족이었다. 앞선 문명에 당한 것이다. 하지만 조총에 나오기 전까지 활을 그야말로 ‘최종병기’였다. 멀리서 날아오는 활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칼과 창을 아무리 잘 휘둘러도 허공을 가르고 날라오는 뾰족한 활살촉을 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민족을 중국에서‘동이족’이라고 부른데는 활이 큰 역할을 했다.동쪽의 큰 활을 다루는 민족’을 지칭했기 때문이다.

제1초식/양수탁천 리삼초(兩手托天 理三焦)

1초식 / 두 손으로 하늘을 받쳐 올려 삼초를 다스린다. 홍길동은 소설 속의 인물이 아니다. 실제 존재했던 역사 속의 인물이다. 그는 뛰어난 무사였다. 의적 무리의 우두머리였다. 그의 이름은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한다. 실록에 따르면 연산군 6년인 1500년 10월22일 정승들은 “강도 홍길동을 잡았다고 하니 기쁨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백성을 위해 해독을 제거하는 일이 이보다 큰 것이 없으니 청컨대 이 시기에 그 무리를 다 잡도록 하소서”라고 아뢨다. 이후에도 실록에는 선조 21년인 1588년까지 홍길동이라는 이름이 여러차례 등장한다. 당시 연산군의 폭정으로 백성들이 큰 어려움이 빠졌을 때 전국

팔단금

비단처럼 아름다운 팔단금(八段錦)

조선시대 최고의 학자로 꼽히는 퇴계 이황(1501~1570)은 만 70세가 되던 해 숨을 거뒀다. 그날 아침 평소 사랑하는 매화에 물을 준 뒤 앉아서 세상과 하직했다. 퇴계의 마지막은 그의 생전 성과에 가려 그리 조명되지 않고 있지만 당시 30살 정도의 평균 수명에 비해 크게 장수한 점과 누워서 숨진 것이 아니라 앉아서 숨을 거둔 것은 평범한 세상과의 하직이 아님이 분명하다. 생전 관직 생활과 운둔, 사화에 연루돼 귀향을 반복하며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단한 삶을 살았던 퇴계가 장수와 함께 도인, 신선들만의 점유물로 알려진 좌탈입망(坐脫立亡)의 모습을 보일 수 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