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시 만드는 시술소

최초의 기록은 9세기 초 통일신라 흥덕왕 때 등장하며 이전에 환관이 존재했다 해도 허드렛일이나 했지 왕의 비서와 같은 내시부 입무를 맡지는 못했다.15세기 후반에 들어서 성종이 경국대전을 반포하며 환관이 내시부 업무를 맡게 된다.그리고 불법이지만 시술소도 있었는데 부모에게 물려받은 몸은 털끝 하나라도 소중히 여기라는 성리학적 사상이 지배하는 나라였기 때문에 암암리에 진행됐다.주로 비가 오고 천둥이 치는 날 한양 외곽에서 지금의 영등포 일대의 음막에서 비밀리에 진행됐다고 한다. 원로향토 사학자 김동복 씨 증언에 따르면 고종 34년(1897년) 갑오경장으로 내시제도가 폐지되기 전까지 영등포쪽 용추라는 연못 옆에 내시를 양산하는

19세기 조선사람들 조혼의 이유

19세기 조선사람들이 어떻게 살았을까? 지금 읽어드릴 부분은 영국의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라고 1894년 갑오경장 전후로 해서 왔던 분인데 와서 조선에서 만주까지 여행을 다 해보고 쓴 책이 <조선과 그 이웃들>이라는 아주 유명한 책이 있다. 이 책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차별받는 사람들이 천민들, 여성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차별을 받았다.그때에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나 언더우드 목사 부인이나 수많은 의사 간호사로 왔던 서양 여성들이 조선의 여성들을 봤을 때에 정말 얼마나 처참해하고 슬퍼했는지 모른다.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에서와 같이 조선에서도 풍속이 무섭게 부패해 있으며 그 필연적인 결과로 여성의 처지는

복본(複本)

복본(複本)을 위한 두 가지 전제‘마고’는 ‘인간의 본질’로 설정되어 있고 복본을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전제를 설정한다. 하나는 마고로 들어갈 수 있는 주체로 자기 자신이 거듭나기 위해서 수증(修證)을 해야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부도의 구성원’이 되는 것이다.즉 ‘수증’과 ‘부도’를 통해서 마고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이 부도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 첫째는 부도 구성원의 자격을 갖출 만큼의 1차 수중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은 부도의 구성원으로서 마고에 돌아갈 수 있는 2차 수증이 필요함을 <부도지>는 말한다.‘스스로 수증하기를 열심히 하여 미혹함을 깨끗이 씻어 남김이 없으면, 자연히

망나니와 희광이

백정을 망나니로 만들어 살생의 주범으로 몰아갔다 고려 때 사형을 집행하는 망나니를 ‘희광이’라 불렀다. 망나니는 본래 망량(怒崯)’이라 는 괴물을 지칭했던 말인데, 죄인의 목을 베던 ‘회자수(劊子手)’의 뜻으로도 전의 됐고, 뒤에 ‘망냥이>망냉이>망나니’로 변음되어 쓰이게 됐다. 하회탈 가운데 ‘백정 탈’이 만들어 지고, ‘희광이’가 여기에 녹아든다. 회 칼로 사형수(死刑囚)의 목을 치던 사람을 회자수(劊子手)라고 하는 데 ‘희광이’의 ‘희’는 ‘끊을 회’의 변음이다. 이 놀이에서는 살생을 하고는 늘 죄의식 속에서 살다가 천둥벼락이 치는 날 결국은 미쳐버리는 역할이다. 고려조에 과거에 응시자격이 주어졌던 백정 층을 양수척으로 같이 묶었다. 이들을 ‘희광이’로

죽음과 생명의 여신 서왕모

도교에서는 서왕모 여신이라고 말하는데 우리민족 신앙에서는 삼신 즉 마고로 변용된다. 초기엔 마귀 할망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표범의 꼬리 호랑이 이빨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역할은 죽음과 형벌의 여신으로 좀 음산한 이미지였다. 견우 직녀의 열렬한 사랑을 깨고 은하로 갈라놓는 형벌을 관장했다.나중에는 젊고 예쁜 여성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아마 대중들의 욕구에 의한 변용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젊고 예쁜 모습으로 갈 적에는 능력도 달라졌다. 불사약을 가진 생명의 여신이 됐다. 생명을 점지하고 탄생시키는 역할이 담당했다.생명의 여신, 죽음과 생명이란 이 양면성을 한 여신이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다물(多勿), 구리-조선(고)-고구리의 연방제도의 복원계승

다물(多勿)을 구토회복이라는 말로만 해석되어 지고 있다. 그러나 다물은 땅에 대한 희망하고 구리-(고)조선-고구리의 국가경영체계의 계승을 의미한다.즉 국가경영에서 현대의 소련식연방제방식의 모태가 있었다. 소비에트연방에는 자치국과 자치주가 있었다. 아메리카방식은 자치주의 연합이니 다르다. 그러나 옛 조선-고구리에서는 연방 속에 있으면서도 국호와 사직을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자치국과 자치주가 있었다.이것은 영연방방식에서도 볼수 있는 모태인 것이다구리-조선-고구리시대의 연방제방식 통치제도를 구체적으로 연구하고 현대에서도 활용할 수가 있을 것이다. 지방자치가 활발한 민주주의시대에도 적응이 될 수 있는 방법인 것이다.지역의 자치를 활성화하면서도 전체가 하나같이 하여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분열된 체제보다는

한자는 동이문자

한문의 어순 주무왕 이후에 바뀐 듯 한문의 어순이 언제부터 한국말과 달라졌나? 정확한 시기는 알기 어려우나 주무왕 이후로 판단되어진다. 이 부분은 이견도 상당부분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한자는 ‘동이고자(東夷古字)’이고 속칭 ‘한자’이다. 즉, 동이민족이 원래 사용하던 문자라는 뜻이다. 부루단군(단군 2세:기원전 2240년)이 우(禹)를 도산에서 가르쳤으니 가르친 사람이 속한 나라의 언어였을 것이며, 한자라는 말이 있기 전이다. 한나라가 건국된 BC 206년 훨씬 이전에 가르쳐 주었으니 우리선조가 만든 글자가 아닌가? 갑골문자가 출토된 안양은 구리시대엔 ‘거화(치우 부인의 무덤)’, ‘동명’의 서쪽이고 ‘탁록’의 남쪽이고, 고조선 시대엔 ‘서화’와 ‘몽성’의 북쪽이며 백제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