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여성성의 연원과 여성문화의 뿌리

동북아 여성성의 연원과 여성문화의 뿌리

치우군진 내 군사악무와 생황, 그리고 ‘어아’의 의미 여와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악기가 바로 생황이다.이 생황과 연관된 문화 축제가 지금도 묘족사회에 전승되는 점은 주목할 점이다. 묘족에 관한 설화를 기록한 《묘족사(苗族史)》를 보면, 운남성(雲南省) 문산(文山)의 마관(馬關) 등지에서는 매년 전통절에 ‘채화산(踩花山)’이란 연희를 베푼다고 소개한다. 이 연희의 내용을 보면, ‘채화산은 치우를 제사하고자 베풀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생존 당시에 군사 수장이던 치우는 황제(黃帝)와 싸우다 실패하여 동쪽으로 나아갔고(사기에서 왜곡), 깊숙한 산 빽빽한 숲 속에 후퇴하여 들어서 각처로 흩어져 간 묘족 무리를 소집했다고 한다. 그래서 묘족 두령이 산 위에 뿌리가

문질빈빈(文質彬彬)의 삶 그것이 한국인의 정서였다

문무겸전 사상의 뿌리는 어디서부터였나?내용과 바탕이 모두 조화된 상태를 공자는 ‘문질빈빈(文質彬彬)이라 표현하여 그 뜻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한 세계관과 정서는 한편으로는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정신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우리 한민족의 역사에서 문무겸전의 기원은 어디서부터 언급이 가능할까?<태백진훈>에는 신지가 언급됐는데, 신지는 사슴 발자국을 보고서 곧 그 글자를 만들었다”고 했고, 더불어 “후대에 은혜를 남겼고 많은 복을 끼쳤고 그의 문화적 공덕을 기념하여 사황(史皇)으로 불러 상숭상했다고 밝힌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바로 ‘사황(史皇)이라는 표현이다. 왜냐하면 사황은 중국의 옛 학자들로부터 창힐(蒼頡, 倉頡)이라는 상고시기 설화적 인물을 두고 숭상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