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의선인의 시원, 경당(扃堂)의 기원과 의의

경당의 육례(六禮) 교육 육례(六禮)를 살펴보자. ‘독서(讀書)’는 단순 글 읽기가 아니다. 천경신고1)를 익히고 인문, 역사, 과학, 기술을 망라하며 산천을 보고 익히는 것 또한 독서이다. 이 때 ‘국자랑(國子郞)’2)의 스승으로 있던 유위자가 계책을 올려 말하길, 생각하옵건대 우리의 신시(神市)는 실로 한웅천왕께옵서 개천하시고 무리를 거두심에 온전하게 하는 것으로 가르침을 세워서 백성들을 교화하셨습니다. 고하여 대종(大倧)의 가르침을 읽히는 등 독서의 범위가 광대하였음을 보여준다. 당시의 글자는 어떠했을까. 태백일사에 신전(神篆)’이 있었으니 이들 글자는 널리 쓰였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문자의 보급 또한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활쏘기’는 활을 당김도 그저 과녁을 맞히는

기자 동래설(箕子東來說)의 허구

기자의 무덤은 대륙에 있다 (1) 기자의 무덤(箕子墓): 몽현(懸현 하남성 상구시) 梁國蒙縣有箕子塚. -《史記》권30, 蒙縣:秦置 今河南商丘市東北, 漢, 晉屬梁國, 永嘉 後廢. – “중국에만 기자묘가 세 군데 있는데 어떻게 평양에 기자묘가 있는가” (2) 《사기(史記)> : 주나라의 신하가 되지는 않았다 (而不臣也). (3) 정해 37년(BC 1114년, 단군조선 제25대 솔나 단군 37년)에 기자가 서화에 옮겨와 살면서 사람 대하기를 사절했다” (4) 기자가 망명한 땅은 단군조선의 번조선 땅. (5) BC 323 기후(箕詡)가 군사를 일으켜 번조선의 왕이 됨. (奇子朝鮮 BC 1285~BC 323-962년) (6) 정해 37년(BC 1114 단군조선 제25대 솔나 단군

기자조선(箕子朝鮮)은 환작(幻作)됐다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왕으로 봉했다[武王封箕子於朝鮮]라는 《상서(尙書)》, 〈홍범장>에 기록된 이 여덟 글자는 고조선의 역사를 송두리째 흔들고 동이족의 근간을 뒤집어 놓았다. 조선시대 500여년동안 지속된 환작된 ‘기자조선’설은 천하를 지배하는 수단이 됐고 통치자의 방패 수단으로 전락됐다. 그러나 그 원문에는, ‘기자가 일찍이 나는 은이 망한 후에 주 무왕의 임명을 받는 신복이 되지 아니하였다고 말했다.(<한서> 권28. 지리지 제8하)’는 대목 중에서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왕으로 봉했다’고 문장을 조작한 데서부터 역사는 소용돌이를 치게 된다. 위작의 근원이 밝혀지자 《시경》의 구절을 인용한 〈잠부론(蠶夫論)>을 근거로 다시 ‘한씨조선’설을 부각시켜 한반도를 기자의 후예

고대사서와 함께 사라진 잠견지

종이의 이전 기록에서 우리의 것을 찾아보자. 갑골문을 썼던 商(은)나라는 동이 겨레이며, 단군조선의 제후국이었고 『고사변(古史辯)』1)에서도 “동이족은 은나라 사람들과 동족이며 그 신화 역시 뿌리가 같다[東夷與殷人同族 其神話亦同源].”라고 했다. 기원전 3500년경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은 한웅시대 태호복희 직후 여와 황제 때 이룩한 것이며, 1천년 후 이집트 문명권이 형성됐다. 이들 문명권에서 쓰여진 헬라어의 상형문자는 우리의 문자와 유사하고, 희브리라는 말은 ‘강을 건너 온 자’라는 어원으로 보아 동이 겨레의 진출에 따른 결과이며 천손민족의 얼이 깊숙이 배어있다. 흔히 종이 역사를 다룰 때마다 105년 후한 때 처음으로 채륜에 의해 제지술이 발명됐다고

세계 최고(最古)의 고려 ‘잠견지’ 고대사서와 함께 사라지다

고려지(高麗)의 이름 잠견지(蠶繭紙). 고려지라 했으나 이는 고구려를 칭한다. 고구려는 또 고조선의 문화를 계승 발전시켰다. BC 1419년 ‘뽕나무 껍질(桑皮)로 종이(紙)를 만들었다’ 단기고사의 기록이다. 이 기록으로 보면 고조선 문자를 남기기 위해 종이 제작은 꾸준히 이루어 졌다는 추론이 충분하다. 이 기록만으로도 종이 제작은 세계 최초요, 최고(最古)다. 전북 남원 실상사 극락전에 안치된 조선시대 건칠불(乾漆佛) 좌상의 머리 안에서 14세기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시대 불경이 발견됐다. 대한불교조계종 실상사와 불교문화재연구소에 따르면 컴퓨터 단층촬영 결과 불경은 뽕나무 종이에 은가루로 쓴 ‘대반야바라밀다경’이라고 최근 밝혔다. 19대 구모소(緱牟蘇) 단군 때 ‘뽕나무

상고 문자학의 기원 5

진서 발전계도(眞書發展系圖) 진서(眞書)는 참된 글자이다. 예부터 한자를 진서라 불러 왔다. 인류창조의 역사와 함께 말씀과 무늬 글자는 한자로 발전되어 왔다. 마음의 생각이 입으로 통해 나오는 소리, 즉 말씀이 언(言)이며, 무늬 채색 얼룩 말씀을 그린 조각이 문(文)이다. 이를 언문(言文)이라 한다. BC 7197년 한인(桓因) 시대로부터 시작, BC 3897년 문자(文字) 발전과정과 운서(韻書) 변천내용을 보면 어제신전(御製神篆)으로 한웅천황(桓雄天皇)의 명에 의하여 인류 최초로 문자가 발명되었다. 신교 문화를 깨우친 후 이를 다시 풀어 『음부경(陰符經)』을 펴냈다. 이 책은 원래 3편(三篇)의 녹서(鹿書)로 썼다. 그러나 원문은 전해지지 않고 다만 후세 사람들이

상고 문자학의 기원 4

조선(朝鮮)이 본 고조선의 문자 고조선의 역사성은 배제됐다 조선은 어떤 관점에서 문자를 보았을까? 미수(眉叟) 허목(許穆)은 기언(제6권) 고문(古文)편에 더욱 상세하게 서술했다. 그러나 고조선의 역사성은 배제되어 있다. “창힐(蒼顔)이 새의 발자국을 보고서 조적서(鳥跡書)를 만들고, 전욱(顓頊)이 과두문자(科斗文字)를 만들었다. 주(周)나라 때 매씨(媒氏)가 분서(墳書)를 만들고, 백씨(伯氏)가 종정문(鍾鼎文)을 토대로 수서(殳書)를 만들었으며, 또 기자(奇字)라는 고문이 있는데 출처를 모르겠고, 사주(史籒)가 고문을 변형하여 대전(大篆) 15편을 만들었으니 주서(籒書)이다. 황제 헌원씨 이후로 기린서(麒麟書), 봉서(鳳書), 귀서(龜書), 용서(龍書), 가화서(嘉禾書), 운서(雲書), 조(鳥書), 성문서(星文書) 등은 다만 상서(祥瑞)를 기록한 것일 뿐이어서 문자로 사용할 수가 없다. 진(秦)나라 때에는 이사(李斯)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