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然스님, 어찌 한반도 상고사를 쓰지 않았나요?

대담 일연스님 <삼국유사 지은이>
오학림 <교감18사동이전> 저자
장소 삼국사연구회 사무실
일시 2024년 2월 15일 오후2시

학림 : <삼국유사>에 대하여 물어보고 싶어요.
일연 : 궁금한 것이 무엇이요?
학림 : <산해경>에는 해내에 조선이 있다고 했는데 그 조선과 <삼국유사> 단군의 조선이 같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지요?
일연 : <산해경> 해내경(海內經)에 조선이 있어?(東海之內北海之隅有國名曰朝鮮天毒其人水居偎人愛之:海內經)
학림 : <삼국유사> 단군조선과 <산해경> 조선이 같다면 중원에서 해내(海內)라 하면 조선반도가 들어 갈 수가 없으니 해외(海外)에 조선이 있어야 하므로 조선이 둘이 되어야 하지요
일연 : <위서(魏書)>를 인용했어(魏書云 乃往二千載 有壇君王儉 立都阿斯達 開國號朝鮮 與高同時)
학림 : <삼국지>동이 魏書인지 아니면 다른 남북조 시대의 <위서>인지는 구별이 안 되지만 <삼국지>권30에 단군 기록은 있지만 내용이 달라. 그런데 <산해경>은 지금도 확인이 가능한데 문제는 <위서>에 말하는 조선도 <산해경>의 조선을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일연 : 그럴 수 있겠네. 그것까지는 미처 생각 못했어. <위서>를 인용했으니 <산해경>의 조선이라고 할 수 있겠네.
학림 : 그럼 海內의 조선은 조선반도와는 무관하게 되버리는데 어떻게 할 것인지요. 해내 조선과 같아도 문제요. 다르다 해도 문제가 남는 것이지요.
일연 : <위서>를 인용했으니 선문(滿鮮:조선과 만주)의 조선으로 우길 수가 없네. 해결방법이 없을까?
학림 : 단군의 조선 이전 역사 기록은 찾으면 되지요.
일연 : 조선 이전의 역사 기록을 못 보았어. 그래서 단군을 기준으로 했는데
학림 : <사기>권1에 단군 이전 치우천자가 있고 국호가 구리(九黎)라는 기록이 있지요. (九黎君號蚩尤是也 蚩尤古天子)
일연 : 헌원과 치우가 전투를 했다는데. 그 역사는 송나라 역사가 아닌가?
학림 : 한무제 이전은 동이문화이고 순(舜)이 동이(東夷)이고 리(黎)는 동이국호(東夷國號)라고(史記卷40) 했는데
일연 : <史記>말고 다른 기록은 없는지?
학림 : <삼성기>에서 치우는 배달의 14대 환웅으로 되어 있고 <사기>권1에 헌원과 전쟁을 한 우리 임금인데 우리역사이지요.
일연 : <사기>를 못 보았어. 그리고 구리(九黎)가 어떻게 우리역사이지.
학림 : 지나는 요순(堯舜)시대를 지나 최초 나라가 하(夏)나라이지요.
일연 : 그렇게 알고 있지.
학림 : 순(舜)이 동이(東夷)이지요. 그러면 그 조상 헌원도 동이일 수밖에 없지요.
일연 : 그렇지.
학림 : 부여, 고구리, 예, 한, 백제, 신라, 외인(倭人)이 동이라고 했지요. 한나라 이전의 동이역사는 지울 수가 없지요. 하(夏)나라 이전, 조선 이전 나라가 바로 구리(九黎)이고 치우천자가 있는 것이지요.
일연 : 치우는 송나라 땅에서 살았던 분 아니요?
학림 : 그렇지요. 구리 치우천자가 살던 땅의 기자로 인하여 기자조선을 만들었는데 치우천자로 인하여 구리를 밝히는데 문제가 있나요?
일연 : 없지만. 요순보다 더 오래된 역사가 만선에 있었다고 보기 어렵지. 요순시대를 기준으로 해도 夏나라 보다 오래되지 않았어.
학림 : 장안에서 堯舜보다 더 오래된 우리역사를 <사기>권1에 기록하고 있는데 부정할 필요가 있는지요. <예기>권55에도 있어요.
일연 : 그래도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학림 : 그들의 기록으로 그들보다 더 오래된 우리역사를 찾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없지요.
일연 : 그런데 주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周以封箕子爲朝鮮)했다고 하는데
학림 : 기자(箕子)의 子는 작호(爵號)이고 조선에 살았다고 <사기>, <한서>, <후한서>, <삼국지>에 있어도 왕이라는 기록은 없고, 조선반도에 왔다는 것은 어디에도 없어요.
일연 : 전한조선전(前漢朝鮮傳)에 위만이 번조선왕 기준의 왕위를 찬탈했는데 기비-기준 등 번조선 역사에 관한 기록은 안했어.
학림 : 번조선 역사를 축소해 버렸어요. 기자의 후예로 북부여 때 번조선왕으로, 기비의 뒤를 이은 기준(箕準)의 기록이 있으나 기후-기윤-기비-기준으로 이어지는 기록이 없어요.
일연 : 그것은 몰랐어.
학림 : 또 북부여도 해모수만 말하고.(古記云 前漢書宣帝神爵三年壬戌四月八日 天帝降于訖升骨城(在大遼醫州界) 乘五龍車 立都稱王 國號北扶餘 自稱名解募漱 生子名扶婁 以解爲氏焉) 그 후 扶婁-東明으로 이어진 것으로 했지만 모수리-고해사-고우루-동명왕(고두막)-고무서-주몽으로 이어짐을 생략하였지요.
일연 : 동명왕과 동명성왕의 구별을 몰랐어.
학림 : 번조선과 북부여 말고도 낙랑국을 낙랑군으로 덮어 묻어버렸지요.
일연 : 낙랑국과 낙랑군은 같은 것으로 보았어.
학림 : 한사군의 낙랑은 고구리 예의 서쪽에 있었고, 낙랑국은 고구리 예의 동쪽에 있던 옥저 가까이에 있었으니 결코 혼돈 될 수 없음에도 낙랑국에 낙랑군을 덮어 버렸어요.
일연 : 낙랑군은 <한서>, <후한서>를 그대로 믿었어.
학림 : 송나라 동이전 밀어내기를 배웠는지 (단군)조선 이전 九黎를 삭제하고, 기준의 번조선을 묻고, 북부여를 축소하고, 낙랑국을 지워버림으로서 세 나라시대를 묻어 버렸지요
일연 : 북부여시대 낙랑국을 몰랐고, 기후의 번조선도 잘 몰랐어.
학림 : 그런데 위만이 번조선왕 기준을 쫓아내고 조선왕을 칭하니, 남쪽 해주(海州)로 들어가 기자의 옛 땅에 한(韓)을 세웠고, 북부여, 낙랑국 4국시대도 몰랐지요.
일연 : 더구나 韓을 馬韓 七十二國 卞韓百濟 辰韓(亦作秦韓)을 각각 하여 韓 전체를 볼 수 없게 하였지요.
일연 : 韓을 <삼국지>나 <후한서>동이전을 인용하려고 했지요.
학림 : 스님은 <삼국지>지나 <후한서>의 동이전과 같은 체계도 못했지요. 또 이부 북대방 남대방 이서국(二府 北帶方 南帶方 伊西國)을 따로 <25사>동이전 보다도 더 잘못된 우리역사체제를 만들었지요.
일연 : <삼국사>가 우리역사체계가 없어서 만들어 보려고 했어.
학림 : 한당간(漢唐間)시대도 <삼국사>와 비교도 안되지요. <삼국사>는 503년 구구리간(高句麗干)에서 독립하여 신라왕이 되었지요. 고구리는 서력32년 4월에 낙랑왕 최리가 항복함으로써 고구리 간지역이 됐으며 서력 503년에 독립함으로서 고구리연방에서 떨어져 나온 것을 숨겼지요.
일연 : <삼국유사>는 조선반도의 상고사를 쓰려고 했지요.
학림 : 그런데 <삼국유사>는 한반도상고사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지요.
일연 :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지.
학림 : <삼국사>는 우리역사를 秦唐間으로 나타낸 유일한 우리역사책이지요. 천년의 역사를 기록한 우리역사이고 우리무대를 유‧연‧제‧로-오‧월에서 하남(可汗)지역과 마립간(麻立干)지역을 아우르는 지역으로 했으나 <삼국유사>가 조선반도에 맞추려고 했으나 <삼국사>와 <18사>동이전의 공통부분은 조선반도 기록이 아니고 <삼국사>권46지역이므로 <삼국유사>에는 한반도상고사가 없다고 했던 것이지요.
일연 : <삼국유사>도 <조선상고사>처럼 한반도상고사가 없다니, 나를 답습한 자도 있네.
학림 : 약 7백년의 백제를 단 몇 줄로, 천년의 고구리사를 단 몇 줄로 나타내고, 90%가 신라와 가락국을 기록하면서 <삼국유사>라고 한 의도는 무엇인지요?
일연 : <삼국사>에 가락국기가 없어서 기록했고 신라중심으로 기록했지.
학림 : 백제, 고구리 패망은 <삼국사><구당서><신당서>에 있는데 이런 부분은 자세하게 했더군요.
일연 :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으니 당연히 기록하게 되었지.
학림 : 김유신의 三韓一統은 <삼국사>권46 지역이지 조선반도의 상황이 아닌데 어찌 조선반도에 맞추려고 했는지요?
일연 : 김유신의 활동지역이 조선반도가 아니라고? 말이 되는지.
학림 : <삼국사><구당서><신당서>의 어떤 곳에서 김유신의 활동무대는 <남제서>권58 지역으로 나타내고 있고 가계로 보나 치우-기자-김유신은 같은 지역에서 활동하던 것을 조선반도로 옮긴 이유는 무엇인가요?
일연 : 김유신이 소호금천씨가 살던 청양의 남북에서 활동했다는 것을 몰랐어!
학림 : 고구리에서 독립한 서라벌쪽 신라는 631년에 이미 광령에서 길림의 동쪽까지 다스렸고 산해관에서 부여성까지 장성의 서쪽 고구리가 대치하며 장성을 구축했었지요.
일연 : 그러면 백제 패망 30년 전이네.
학림 : 그렇지요. 백제 패망을 주도한 김유신은 조선반도 사람으로 한 것은 어떤 근거도 없지요. 김유신은 <삼국사>권46 및 <남제서>권58범위에서 이루어진 것인데 조선반도 인물로 만들었지요.
일연 : 김유신이 조선반도 사람이 아니라고? 말도 안되는 소리지!
학림 : 그렇지요. <삼국사>권41 및 <삼국사>권46을 읽어 보셨는지요?
일연 : 생각이 안나는데.
학림 : 金富軾撰三國史권46 上大師侍中狀(상대사시중장)에 ‘高麗(고구리) 百濟(맥제)가 강성할 때 남으로 吳(오)‧越(월)을 다물(侵침)하고, 북으로 幽(유)‧燕(연)‧齊(제)‧魯(로)를 다물(撓점유)하여 장안의 큰 두통거리였고 수나라가 망한 이유도 遼의 동쪽을 정벌한 때문이다.(高麗百濟全盛之時强兵百萬南侵吳越北撓幽燕齊魯爲中國巨蠹隋皇失馭由於征遼)’라고 하여 고구리 백제가 오‧월∼유‧연‧제‧로에 있었다고 하였지요.
일연 : 吳(오)‧越(월)과 幽(유)‧燕(연)‧齊(제)‧魯(로)는 송나라에 있는데 어찌 그것을 믿을 수 있겠소.
학림 : 그러면 <남제서>권58에서도 고구리, 백제는 <삼국사>권46과 동일한데 그것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일연 : 그래도 감히 송나라 땅을 차지했다는 것을 믿기 어렵네.
학림 : 그러면 <삼국사>와 <사기>에서 <당서>까지 18사동이전을 다시 볼 생각은 있는지요?
일연 : 어떻게 보면 되는데?
학림 : <삼국사>와 18사동이전에서 공통부분과 나머지로 정리를 해야지요.
일연 : 그렇게 하고난 다음은?
학림 : 그러고서 <삼국사>권46 즉 <남제서>권58 지역과 조선반도에 공통부분을 각각 대입해보면 어느 쪽에 일치되는가를 살펴보는 거지요. 먼저 지명부터 살펴보시지요.
일연 : 18사와 <삼국사>에 등장하는 지명 특히 김유신시대 전쟁 지명이 중화지도에는 있는데 조선반도에는 없다 이거지.
학림 : 그렇지요. <삼국사>권41 김유신전도 <삼국사>권46 지역에는 일치되는데 조선반도에는 맞질 않아요.
일연 : 그러면 다음은?
학림 : 김유신이 살아생전에 신라의 무역품을 살펴보면 목화를 고구리에 주었으며, 자석과 바늘을 당나라에 주었고, 비단을 하사했으며, 노(弩)를 생산했는데 당나라보다 기술이 뛰어 났다고 하지요. 이러한 특산물이 <삼국사>권46 지역에서는 가능하지요
일연 : 목화씨를 문익점이 가져왔는데 그 전이니 그렇게 볼 수 있겠군.
학림 : <김유신>의 가계를 <삼국사>권46지역과 조선반도에 대입해보면 조상 소호금천씨가 살던 청양이나 묘가 있는 곡부가 <삼국사>권46 지역에 있고 수로왕 관련 지명도 청양 근처에 있으며 김유신의 전쟁터도 청양 근처가 제일 많으며 지금도 궤지(潰池)라는 지명이 있는데 潰는 상자를 의미하고 상자하면 금관을 생각하게 되므로 금관국으로 볼 수 있는 지명이지요. 또 허촌과 구자산(九子山)이 있고 묘수(廟首)가 있어 수로왕 관련된 지명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지요.
일연 : 그러면 김유신이 활동하던 무대가 조선반도가 아니라는 말인가?
학림 : <18사>동이전은 <남제서>권58 범위를 벗어나서 일어난 일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지요. 송나라 때도 대만을 그리지 못하는 지리 상식인데 그 이전에 조선반도를 기록하거나 그릴 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지요.
일연 : 신라통일의 주역들인 화랑도가 있지 않았나?
학림 : 고리(高麗)에서 화랑을 보았는지요?
일연 : 못 보았어.
학림 : 高麗 땅에 신라 화랑으로 보이는 무리를 못 보았던 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화랑은 <삼국사>권46 지역의 인물들이니 당연히 화랑의 유습을 高麗지역에서 볼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일연 : 화랑 이야기도 조선반도에서의 일이 아니라고?
학림 : 20세기까지도 <삼국사>권46지역은 화랑으로 넘쳐나지요. 소림파니 무당파니 모두 화랑의 유습이지요.
일연 : 그러면 신라가 중원에 있었다고? 믿어지지 않어.
학림 : 그렇지요. 사로국(斯盧國)에서 출발하여 백제, 고구리를 패망시킨 사로신라는 <삼국사>권46 지역에 있었지요. 김유신의 전쟁터, 특산물, 김유신의 가계 등으로 살펴보아도 믿어지지 않나요?
일연 : 확실히 신라가 중원에 존재감을 알리는 것에는 무엇이 있는지?
학림 : 신라 명절이지요. 당나라 때까지 중원에는 중추절이나 중구절도 없었지요. 두 명절은 오직 신라만이 있었지요. 그런데 지금 아시아에서 중추절을 가장 잘 지내는 나라는 지나(支那)예요. 즉 명절 휴가도 하루가 아니고 한 달씩이나 주지요.
일연 : 8‧15명절, 99절이 모두 신라의 명절이라고?
학림 : <삼국사>와 <입당구법순례기>에도 분명하게 신라명절이라 했지요. 송나라이후 생겨났다면 기록이 있을 텐데, 송나라 이후 정한 사연도 없지요. 바로 신라의 유습으로 밖에 설명이 안되지요.
일연 : 지명으로 보나 특산물로 보나 김유신의 가계(家系), 명절까지도 <삼국사>권46을 뒷받침하고 있으니 김유신의 신라를 조선반도로 볼 수가 없는데 내가 거짓을 참으로 만들려고 노력한 것 밖에 안 되는구먼.
일연 : 자장법사 때 선덕왕과 정신대왕으로 두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더니 그래서 그랬구먼.
학림 : 이성계 조선 500년 동안 <삼국유사> 때문에 더 거짓을 말해 왔었다고요.
일연 : <삼국유사>를 집필하기 전에 <삼국사>, <18사>동이전을 <삼국사>권46 즉 <남제서>권58지역과 고리 땅에 각각 대입하여 검증만 했어도 그러한 오류를 범하지는 않았을 것인데. 나의 오만이 우리역사를 흔들어 버렸구먼.
학림 : 결국 <삼국유사>는 한반도상고사가 없게 하는 역할을 한 것이지요. 어찌 그런가 하면 <삼국사>권46지역도 숨기고, 조선 아흘 천제(天帝)가 황숙인 고불가(固弗加)를 낙랑왕에 봉하고부터 최리왕까지 최씨 왕국 역사를 묻어 만선(滿鮮)역사를 찾는데 도움이 안되니까요.
일연 : 아미타불 중생의 죄이지요.
학림 : <삼국사>후예는 吳(오)‧越(월)과 幽(유)‧燕(연)‧齊(제)‧魯(로)에서 서북으로 可汗지역과 동남으로 서라벌까지 하나가 되어야지요. 이것은 구리(九黎)시대 그리고 조선시대를 거쳐 고구리(高句麗)까지 하나였지요. 그런데 송나라 이후 우리역사를 만선으로 축소하려고 노력했지요.
일연 : 송나라가 18사동이전을 만선으로 몰아내는 것을 몰랐어.
학림 : <남제서>권58 지역이 18사 동이전 지역임을 지우려 했어요.
일연 : 18사 동이전을 滿鮮으로 몰아내는 것을 몰랐고 동이전이 <남제서>권58 범위인 것을 몰랐어.
학림 : <25사>동이전이나 <삼국사>를 조선반도에 맞추려는 생각에 재현해 볼 생각을 못했어요.
일연 : 서희와 소손령의 담판처럼 구리(九黎)-고구리(高句麗)를 계승하려는 정신을 잃어버린 것으로 보아야 하겠네.
학림 : 그렇지요 <삼국사>는 전전국가를 계승하겠다고 하면서 우리역사를 개척하여 왔으나 <삼국유사>이후에는 만선사관으로 우리 역사는 축소되고 왜곡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일연 : 내가 우리상고사를 조선반도사로 만든 장본인이 됐다는 것이 부끄럽고 한심하게 생각되는구먼.
학림 : 송명의 18사동이전을 만선으로 몰아내려는 것을 파악하지 못하고 만선에 맞추라고 부추긴 상황을 모르고 우리고대사가 고리 땅에서만 이루어진 것으로 착각하여 생긴 일이니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Share:

Facebook
Twit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