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과 용이 만난 해, 갑진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설날 아니 ‘작은 설’. ‘아세 설’. ‘까치설’이 지나고 설이 됐습니다. 요즘 설이 생기면서 동지는 동지설날이 됐겠지요.
자- 일어나 새로운 양의 기운을 받읍시다. 그 중심에 태양이 있지요. 태양의 빛과 따뜻함은 모든 생명의 소생과 보호의 근원으로 작동합니다. 세계의 모든 인간은 태양숭배 의식을 갖게 된 것입니다. 유럽으로 가면 성탄절이 되고 동양에선 동지가 되지요. 동지부터 점점 길어지는 태양의 부활. 밝음과 붉음으로 삿된 것을 물리치고 소생하는 갑진년(甲辰年) 새해를 맞습니다.
용은 가장 포스트 모던한 사유의 결정체라는 생각입니다. 그걸 스스럼없이 받아들입니다.
그리스 로마 시대의 사유를 신화로 세탁하면서 합리성으로 받아들이면서 폼을 잡는 서양사고방식에도 웃음이 나옵니다.
서양은 나는 것에 무조건 날개를 달아야 하고 용을 괴물로 치부해 처치해야할 대상물로 놓았지요.
동양은 어떤 자연의 기운현상으로 상징하며 현란한 상상력의 결집체 즉 포스트 모던한 사유를 미리부터 시작했지요.
어떤 자연의 기운 현상으로 놓고 날개 없이도 하늘로 오르고 인간의 감정에도 감응하는 정신적 합일체로 여기는 용이 힘의 원리일 테죠.
좀 더 월등한 능력을 지닌 초자연적인 힘의 보강으로 받아들이는 거죠.
올해는 유독 음기운이 강하다고 하는 데 양기운이 강한 양말. 손수건 등을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하라고 하는군요. 그래서 양말과 장갑을 주변에 선물했지요, 그렇게 음양의 균형도 잡고 새해를 도모했지요. 그리고 서울도성의 좌청룡이라는 낙산둘래길도 둘러보고 흥인지문(興仁之門)의 ‘지(之)’에 매달리기도 했지요.
이런 풍속은 의미가 없지만 수천 년간 선조들이 의미를 투사해온만큼 민족의 문화적 에너지가 형성된 상징성이겠지요. 당시 선인들이 고단한 삶을 살아낸 사유체계입니다. 그 사유체계가 축적돼 민족원형을 만들고 전통을 만들고 흘러 흘러 지금 내 삶의 정체성을 만들었겠지요. 균형을 잡아주는 현재 우리 삶의 방식을 만듭니다. 그런 사유 무시하면 그만이겠지요. 굳이 이 지구별에서 한자리 민족공동체 이루어 애꿎게 살 필요 없이 우주를 둥둥 떠다니면 되겠지요.

Share:

Facebook
Twit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