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단산과 검단의 용어는 어디서 온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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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운홍

천년고찰 검단사(경기 파주읍)의 명칭은, ‘신라 문성왕 9년(847) 혜소(慧昭)가 창건했다. 혜소는 얼굴색이 검어 흑두타(黑頭陀) 또는 검단(黔丹)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찰 이름은 그의 별명에서 유래한다(두산백과사전). 검단사가 먼저 지어져 그 산을 검단산이라 했는지, 검단산에 사찰을 지었기 때문에 검단사라 했는지, 어느 쪽이 먼저인지 궁금하다.

하남시에 검단산(黔丹山, 657m)이 있고, 그 인근 남한산성이라는 청량산(淸凉山) 남쪽에도 검단산(黔丹山, 535m, 성남시 은행동)이 있다. 경기도 김포시에 검단면(黔丹面)이 있고, 인천시 서구에도 검단면(黔丹面)이 있다.

대동여지도(김정호)에 양주 검단산(黔丹山, 현 남양주시 철마산)과 충주 달천진(達川津) 인근에 검단(黔丹) 마을(현 달천역 부근, 이유면)이 있다. 동여도지(東輿圖志, 김정호)에 해주 근방 달마산 아래 검단(黔丹) 마을과 검단천(黔丹川)이 있다. 또 다른 고지도에 교하 검단산(黔丹山. 현 교하읍 탄현면 성동리)이 있다.

양주 검단산(黔丹山, 현 철마산) 북편에 검단마을(팔야1리)과 웃검단(검단마을 윗마을, 팔야4리) 마을이 있고, 그 인근에 검단천(黔丹川)이 흐르며, 금단이들(검단이 들판)도 있다. 검단마을 북쪽에 진접 검단이고개(능고개)가 있다.

웃검단이 동쪽에 수동 검단이고개가 있으며, 이 고개를 넘어가면 수동면 검단골이 있다.

또 하나의 ‘검단마을’은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남한강변 검천(劍川)3리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에도 있다. 이렇게 수많은 ‘검단’이란 명칭이 서울 주변에 흩어져 있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필시 무슨 사연이 있거나 의도가 깔려 있는 것이다.

대저, 검단(黔丹)과 봉수(烽燧)는 둘 다 목적과 개념은 같지만 국적과 문화가 다른 데서 출발한 용어라고 본다. 그래서 두 가지 용어가 만나면 충돌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고대(古代) 거대한 한문화(漢文化)의 각종 제도와 서책 등 한류(漢流)가 토종 언어를 삼켜버렸다고 봐야 한다. 검단이란 용어가 이 상황에서 사라진 언어라고 본다.

우리가 예리하게 파악해야 할 점은 서책과 한문화를 타고 들어온 한자 이전에 이미 한자로 표기된 지명이 어떤 형태로든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그 남아 있는 편린 하나가 검단이란 이름의 지명이다. 지명 이름이 아니었더라면 사라져 없어질 용어였다.

서울 인근에 흩어져 있는 검단이란 지명과 충주의 검단을 대강 묶어보면 Y자 형태의 연결선을 이룬다. Y의 중심점이 하남의 검단산이라 본다. 하남검단산에서 북쪽으로 남양주시의 철마산(검단산)과 2개의 검단마을, 2개의 검단이 고개와 검단골, 그리고 금(검)단들(野)로 연결된다.

철마산과 하남 검단산과의 거리는 약 22km이다. 검단(봉수)의 신호를 시력이 좋으면 맨눈으로 볼 수 있는 거리이고, 그 사이 한 곳(예봉산)에 중계지를 둘 개연성도 있다.

또 하나의 연결선은 하남 검단산에서 서북쪽으로 김포의 검단마을과 파주의 검단산, 해주 검단 마을이 있다. 해주는 제쳐두고라도 하남의 검단산에서 김포 검단이나 파주 검단산까지 직선거리는 각각 약 66km이다. 이 두 곳의 위수방위 신호를 이으려면 적어도 3, 4곳의 중개 지점이 필요한 거리이다. 우선 첫 중계지로 안남산(南山현 인천-김포의 게양산 395m)과 심악산(현 파주의 심학산 194m)을 상정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먼 거리인데 하남의 검단산과 연결된 군사방위 체제로 볼 수 있느냐 하는 의문점이 있다. 하남의 검단산과 가까운 미사리, 암사, 풍납, 몽촌, 송파, 석촌, 잠실, 삼성 등 한강 중 하류 유역에 자리 잡고 있는 세력과 그 주민들에게 한강은 편리한 교통로이며 장삿길이다. 이는 또한 적군이 내습할 수 있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당시(BC930년 전 중국과의 교역 해상로가 가능한 만큼 중국방면 선진세력의 침투는 새로운 병기 등 결정적 위협이 될 수 있다. 따라서 한강 입구인 김포 검단과 파주 검단산이 하남과 멀리 떨어져 있지만 수도방위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라고 본다.

하남의 검단산에서 동남쪽으로는 연결되는 검단체제는 광주시 남종면의 검단 마을과 광주시와 성남시 경계를 이루는 남한산성 남쪽의 검단산(535m), 그리고 충주의 검단이 있다. 이들은 하남의 검단산과 가까이 10km 정도 거리에 있다. 그리고 멀리 충주의 검단마을은 남종면 검단

마을과 80km나 떨어져 있다. 충주 검단이 남한강으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검토할만하지만, 서울 지역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재고의 여지도 있다.

Y자 축을 이루며 산재한 검단이란 지명들의 중심이 하남 검단산이라면, 이 산은 여러 곳에 산재한 검단과의 통신체계 중심에 있는 것이다.

위수방위 목적에서 이뤄진 검단이란 통신체계와 그 중심에 있는 하남 검단산을 필요로 하는 지점은 어디이며, 누구인가? 검단산 가까이(5㎞)에 있는 이성산성을 지목하지 않을 수 없다.

검단이란 용어는 적의 이동을 파악하고 알리는 군사적 위수방위 체제이며, 조선시대의 봉수제도에는 미흡하지만 비슷한 개념이다. 검단이란 지명은 한반도의 삼국시대 이전, 선사시대(BC930경)에 붙여진 한자식 명칭이라고 본다.

이 글을 소개하는 까닭은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이 형성되기 이전, 한반도 중부 이남에 한자를 사용하는 군장국가 이상의 나라가 있었다는 것을 밝히고, 사학계의 관심과 연구를 끌기 위한 것이다.

한반도의 청동기시대에 이미 중국 동안(東岸)과의 문자공유가 있었다는 추론이 가능하고, 문자공유에 따라 우리식으로 문자(한자)를 사용했다는 새로운 가설을 도출할 수 있다. 또 하나 서울을 중심으로 하여 경기 · 인천의 한정된 지역에서 출토되는 청동기시대 유물 중에 한자관련

유물이 발견된다면 시대가 다른 유물이 교란된 것이라 단정할 일이 아니라 신중하게 검토할 일이다. 이 점을 강조하고 싶다. 검단에 대한 더욱 세심한 연구와 한자 사용 시초에 대한 발전적 연구가 있기를 기대한다.

글 / 오운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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