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시 만드는 시술소

최초의 기록은 9세기 초 통일신라 흥덕왕 때 등장하며 이전에 환관이 존재했다 해도 허드렛일이나 했지 왕의 비서와 같은 내시부 입무를 맡지는 못했다.
15세기 후반에 들어서 성종이 경국대전을 반포하며 환관이 내시부 업무를 맡게 된다.
그리고 불법이지만 시술소도 있었는데 부모에게 물려받은 몸은 털끝 하나라도 소중히 여기라는 성리학적 사상이 지배하는 나라였기 때문에 암암리에 진행됐다.
주로 비가 오고 천둥이 치는 날 한양 외곽에서 지금의 영등포 일대의 음막에서 비밀리에 진행됐다고 한다. 원로향토 사학자 김동복 씨 증언에 따르면 고종 34년(1897년) 갑오경장으로 내시제도가 폐지되기 전까지 영등포쪽 용추라는 연못 옆에 내시를 양산하는 움막 시술소가 있었다고 한다.
음경은 남겨놓고 고환만 제거했는데 비명소리가 새나가지 않게 주로 비오는 날, 우르르쾅쾅 천둥번개가 칠 때 했다고 한다. 한 생명의 중심을 도려내는 일에 어찌 하늘의 반응이 없을 것일까만.
성공적으로 씨가 없어졌다고 해서 모두 환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신체검사와 구두시험을 통해 선발된 예비 환관들은 평소 내시부에서 심부름을 하면서 소양을 쌓다가 물고문 같은 인내력 테스트를 받기도 하고 왕과 왕의 가족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비밀을 지키는 제목이 될 수 있는지 검사를 받는다.
물론 테스트에 통과를 못하면 나가야했다.
환관을 양산했던 중국에서는 시술기록을 간혹 찾을 수 있는데, 자금성 서화문 밖에 ‘창자’라는 도자소에서 집도가 행해졌다. 정부에서 공인된 전문 시술인인 도자장이 은전 6냥을 받고 수술을 한 다음, 완치될 때까지 책임지는 곳이다. 형틀같은 곳에 사지를 묶은 후 보조시술자 3명이 허리와 두 다리를 누른 후 도자장이 예리한 칼로 한 번에 남근과 고환을 모두 도려낸다. 이후 3일 정도는 물 한모금 먹을 수 없다. 노폐물이 상처부분에 닿으면 염증으로 죽기 때문이다. 한달 후 붕대를 풀면 구멍만 남아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고려시대엔 내시와 환관은 다르다
내시와 환관은 의미 자체가 다르다. 내시는 왕의 측근에서 정무를 보는 사람을 뜻한다. 즉 성 상실과는 관련없는 관직을 이르는 말이다. 환관은 거세된 채 관직에 있는 사람을 말한다. 고려 중기까지는 환관과 내시가 구분됐지만 환관들이 관리직을 차지하면서 조선에 이르러 그 뜻이 동일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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