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피첩(霞帔帖)’ 강진 유배시절 다산이 만든 서첩

그대 치마 있거든 내게 보내주오

오래되고 빛바랬다고 버리지 않았다면

헤진 것이라고 버리지나 마소

당신의 체취 스민 것 더욱 가치가 있겠지요

우린 저마다 하나씩 하피첩을 하나씩 만들면 어떻겠소.

그대는 그 자체로 오직 나의 하피첩이 되어 주소

-그대는 그대로 나의 하피첩-

남양주의 다산 부인 홍씨는 왜 강진으로 치마를 보냈던 것일까.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이 유배 생활 10년째인 1810년, 남양주에 있는 부인 홍씨가 강진 다산초당(茶山草堂)으로 5폭짜리 빛바랜 치마를 보내왔다.

시집 올 때 입었던 명주 치마였다.

정약용은 남양주 시절부터 비단으로 책 표지를 종종 만들었다고 한다. 오래된 천이나 치마에 글씨를 써 이를 아담한 서첩으로 만들어 종종 지인들에게도 선물했다. 그래서 부인이 강진 유배지로 자신의 해진 치마를 보낸 것이다. 남편의 글쓰기 습관을 잘 알고 있던 부인은 글쓰기로 시련을 견디는 남편을 위해 빛바랜 치마를 보낸 것이다. 그건 결국 홍씨 부인의 진한 그리움이었다. 거기에 정약용은 하피(霞帔)란 이름을 붙였다.

난데없이 부인이 보내준 그 치마를 받아든 정약용은 치마를 오려 남양주에 두고 온 두 아들 학연(學淵. 1783~1859)과 학유(學游.1786~1855)을 위해 작은 책자를 만들었다.

치마를 책장(12x16cm) 크기에 맞춰 여러 장으로 잘라 한지를 포개어 붙인 후에 얄팍한 서첩 4권을 만들고 거기 가르침을 주는 글을 써 내려갔다. 그게 바로 하피첩이다.

여기서 ‘하피’는 노을빛 치마라는 뜻으로, 정약용은 부인이 보내준 빛바랜 치마에 이렇게 멋진 이름을 붙였다.

‘하피첩’ 1첩의 머리말을 보자.

내가 강진(탐진)에서 귀양살이하고 있는데 병든 아내가 낡은 치마 다섯 폭을 보내왔다.

그것은 시집올 때 가져온 훈염(纁袡·시집갈 때 입는 붉은 활옷)이다. 붉은빛은 이미 바랬고 황색마저 옅어져 서첩으로 쓰기에 알맞았다. 이를 잘라 마름질하고 작은 첩을 만들어 붓 가는 대로 훈계의 말을 지어 두 아들에게 전한다. ‘하피첩’이라 이름 붙인 것은 ‘붉은 치마’라는 말을 바꾸고 숨기기 위해서다.

(余在耽津謫中 病妻寄敝裙五幅 蓋其嫁時之纁袡 紅已浣而黃亦淡 政中書本 遂剪裁爲小帖 隨手作戒語 以遺二子 庶幾異日覽書興懷 挹二親之芳澤 不能不油然感發也 名之曰霞帔帖 是乃紅裙之轉讔也)

유배 생활을 하면서 정약용이 가장 걱정한 것 가운데 하나는 폐족(廢族)이었다.

자신과 자신의 형들 때문에 집안이 풍비박산(風飛雹散) 난다면 이보다 더 큰 죄가 어디 있을까. 이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두 아들 학연과 학유가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두 아들에게 늘 근면과 수양, 학문을 독려하는 편지를 보냈고 이렇게 하피첩까지 만들었던 것이다.

하피첩에 나오는 내용 “경(敬)으로 마음을 바로잡고 의(義)로 일을 바르게 하라(敬直義方․경직의방)” “내가 너희에게 전답을 남겨 주지는 못하지만 평생을 살아가는 데 재물보다 소중한 두 글자를 주겠다. 하나는 근(勤)이요, 또 하나는 검(儉)이다. 무엇을 근이라 하고 무엇을 검이라 하는가” “명심하고 당파적 사심을 씻어라” “사대부가의 법도는, 벼슬에 나아갔을 때는 바로 산기슭에 거처를 얻어 처사(處士)의 본색을 잃지 않아야 하고, 만약 벼슬이 끊어지면 바로 서울에 살 곳을 정해 세련된 문화적 안목을 떨어뜨리지 말아야 한다” 정약용은 아들을 위한 훈계를 세세하게 적었다. 때론 엄격하고 때론 자상하다. 공부하는 법과 마음가짐뿐 아니라 집안이 몰락해도 자존감을 잃지 말고 훗날을 도모하라는 당부도 빠뜨리지 않았다. 하피첩은 유배객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주는 교육적 메시지였다. 두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그리움과 당부가 절절하면서도 담담하게 녹아 있다.


하피첩은 남양주에 있는 정약용의 생가 여유당(與猶堂)에 보관하고 있던 중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유실될 위기를 맞았다. 그해 여름 한강이 범람하면서 여유당 마당으로 물이 밀려들었다. 정약용의 4대손 정규영은 하피첩과 다산의 서궤(書櫃)를 안방 다락방으로 옮겼다. 밤이 되자 한강물은 안방으로 넘어 들어와 허리에 찼다. 급보를 들은 마을의 구조선이 와서 “어서 나오라”고 소리쳤다. 정규영은 “다산 전집을 건져내지 못하면 죽어도 못나간다”며 응답하고 서궤를 등에 짊어지고 헤엄쳐서 집을 나와 배에 올라탔다. 그는 배에서 내려 집 뒤 언덕을 올라가 다산 묘소에 책 궤짝을 내려놓고 일장통곡을 했다.

여유당 등 한강변에 있는 집들은 가끔 있는 홍수에 대비해 주춧돌이 높았다. 4차례나 어사(御史)로 나가 부정한 관리들을 적발했고, 병조판서를 지낸 박문수의 아흔아홉칸 집이 여유당 근처에 있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 박문수 집의 주춧돌을 보면 높이가 50cm~1m나 된다. 그렇지만 한강물이 지붕마루를 넘어간 을축 대홍수에 높은 섬돌과 주춧돌은 아무 쓸모가 없었다. 정규영이 빠져나온 후 여유당은 배가 되어 떠내려갔다. 이렇게 목숨을 걸고 다산의 저작을 구한 이야기는 최익한(당시 동아일보 조사부장)이 동아일보에 1938년 12월부터 반년 동안 연재한 글 ‘여유당 전서를 독(讀)함’에 들어 있다.

그렇게 한 고비를 넘겼지만 하피첩에 또 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6·25 전쟁 때였다. 정약용의 5대손이 피란길의 와중에 수원역 근처에서 하피첩을 잃어버렸다. 하피첩을 정성 들여 피란 보따리에 싸고 수원역으로 피란길에 올랐으나, 수많은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그만 분실하고 말았다. 하피첩이 2006년 TV 프로그램 ‘진품명품’ 녹화장에 등장했다. 나중에 국립민속박물관이 낙찰 받았다.

글 | 김민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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