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의 유배 길에 얽힌 설화 및 유적

단종은 조선조의 여섯 번째 임금으로 어린 나이에 아버지인 문종이 승하하자 왕위를 이어받게 된다. 문종의 동생 수양대군에 의해서 거의 강제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된다. 단종은 영월의 청령포로 귀양을 떠나게 되고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런 슬픈 이야기를 통해 유적들과 설화들이 영월에 남아 있음을 찾아 볼 수 있다. 이러한 단종의 유적들을 찾아서 단종의 유배 길과 그에 얽힌 설화를 유적과 연결해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단종의 유배길은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 황둔리 솔치재 입구에서 청령포에 이르는 총 43㎞ 구간이다. 1구간 통곡의 길, 2구간 충절의 길, 3구간 인륜의 길로 조성되어 있다. 통곡의 길인 솔지채는 10.5㎞ 구간이다. 단종의 유배 행렬이 유배지인 첫 번째 장소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1455년 제6대 임금 단종은 1457년에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청령포에 유배되었다. 1457년 10월 강원도 영월군에서 죽음을 맞이하는데, 단종의 유배길에 얽힌 유적 및 설화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유배 길에 얽힌 유적
“산신령으로 모셔지고 마음 아파하는 대상으로 섬김을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지역을 초월하는 문화 현상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조선시대 뿐 아니라 우리 민족사 전체를 보았을 때 장릉만큼 애틋한 사연과 수많은 유적들을 지니고 있는 왕릉은 없을 것이다.”
단종은 주천면에 도착하여 마을에서 우물물로 목을 축였다. ‘임금이 물을 마셨다’라는 의미의 어음정(御飮井)이 남아 있다. 충절의 길은 배일치 마을에 이르는 17㎞ 구간으로 단종이 느티나무 아래에서 쉬었다는 쉼터가 나온다. 당시 한 노인이 이곳에서 250m 떨어진 샘물을 진상하였다고 한다. 느티나무 쉼터를 지나가다 단종 행렬은 군졸이 “임금이 오른 고개 군등치”라는 유래가 전한다. 방울재는 말에 달린 방울이 떨어져도 넘어갔다는 이야기이다. 인륜의 길은 15.5㎞ 구간으로 배일치재는 남면에 있는 고개로, 가던 길을 멈추고 기우는 해를 향해 절을 하였다 하여 배일치(拜日峙)라고 부르게 되었다. 배일치재를 넘으면 바로 옥녀봉이다. 단종이 정순왕후를 생각하며 직접 이름을 붙였다. 청령포는 삼면이 강물로 둘러싸여 있다. 서쪽에 육육봉이 솟아 있어 나룻배를 타지 않으면 출입할 수 없는 외딴 섬과 같은 곳이다. 단종은 1457년 6월 28일 청령포에 도착하여 유배 생활을 시작하였다. 우래실 마을은 안세 내 서쪽에 있는 마을로 명라곡(鳴羅谷). 단종이 영월로 갈 때 말이 울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008년 12월 26일 명승으로 지정된 영월 청령포에는 단종이 머물렀던 어소(御所)를 비롯하여 금표비(禁標碑), 단묘유지비(端廟遺址碑), 망향탑(望鄕塔), 노산대(魯山臺), 청령포 관음송(觀音松) 등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강 건너편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로 유배지가 보인다. 관음송(觀音頌)은 단종의 슬픈 사연을 보고 듣고 했다는 소나무다. 단종의 유배지 서쪽에 있는 큰 나무다. 망향탑은 왕비를 생각하며 서울을 향해 쌓아올린 탑이 서쪽 강가 절벽에 우두커니 서 있다. 망향대는 망향탑 옆에 있는 바위이다. 절벽을 바라보며 고향생각을 했을 것을 것이다.

망향탑


왕방연은 사약을 가져간 금부도사였는데, 유명한 시조를 남겨서 청령포 나루터 옆에 시조비가 서 있다. 청령포가 건너다 보이는 강가 언덕에는 그가 지었다는 시조,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온님 여희옵고 내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마음과 같아서 울며 밤길을 가는 구나’라는 시조를 새기고 왕방연시조비라고 새겨 놓았다. 왕방연이 가지고 온 사약을 받은 장소는 영월 시내에 있는 관풍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관풍헌 바로 앞에는 자규루가 있다. 세종 10년에 군수 신권근이 창건하여 매죽루라 하였는데, 단종이 이곳에 올라 자규 시를 읊었으므로 자규루라고 한다.

관란정

단종의 유배 길에 얽힌 설화
단종의 유배 길을 따라 가면 지명 등의 전설이 있다. 강을 따라 계속 내려가면 서면 신천리에서 평창강과 만나게 된다. 이 때부터 강은 상당히 커져서 물이 많아진다. 신천리에는 단종과 관련이 있는 설화들이 있는데 주로 지명전설로 전해 온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단종은 일찍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아버지인 문종마저 일찍 승하하자 어린나이에 왕위에 오르게 된다. 강제로 왕위를 물려주고 영월로 귀양 가는 단종을 지켜보면서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마음 아픈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이 시기에 단종설화는 시작되었다.
관란정(觀瀾亭)은 서면 신천리 강가에 있는 정자다. 영월군과 제천군의 접경지역에 있는데 상당히 높은 절벽 위에 지어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원호가 지은 정자는 만학강 가에 있다고 가련정이다. 원호는 가련정을 만학강 가에 지어놓고 단종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원호의 무덤은 주천면 무릉리에 있다. 관란정 아래 절벽 중간에는 뾰족하게 튀어나온 바위가 하나 있는데, 아이고 바위이다. 전설은 이 바위에 올라서서 ‘아이고’를 세 번 외치면 빠져 죽는다고 한다. 이 바위를 자살바위라고 하니 목숨이 그리 쉬운지, 참 안타까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신하들이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움직임이 보인다. 집권세력들은 세조를 졸라 단종에게 사약을 보냈다. 사람들은 청령포 앞에서 강을 건너기 전에 사약을 물에 던져 버리고 자살하는 일이 생겼다. 단종 자신이 죽을 결심을 하게 된다. 단종은 복덕이에게 ‘내가 이번 여름에 기가 쇠하여서 몸이 좋지 않으니 시내에 들어가서 개를 한 마리 사오너라.’ 이 말을 듣고 복덕이는 영월에 가서 개를 한 마리 사 왔다고 한다. 복덕이에게 다시 이르기를 ‘개는 목을 졸라서 죽여야 맛이 좋으니 문지방 밑에 구멍을 뚫고 너는 밖에서 명주 끈을 힘껏 잡아당기면 내가 안에서 개의 목에 끈을 걸어서 잡고 있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무지한 복덕이는 죽이는 일이란 것을 전혀 모르고 밖에서 땀이 나도록 명주 끈을 열심히 잡아당겼다. 한참을 이렇게 하다가 복덕이는 생각하기를 ‘이 정도면 개가 죽었을 것인데….
문을 열어 보았다. 단종은 이미 혀를 빼물고 죽어 있는 것이었다. 복덕이는 정신을 차리고 단종이 늘 올라가서 고향을 바라보던 절벽 위에 올라갔다. 그곳에서 복덕이는 영월 쪽을 향하여 크게 외치기를 ‘영월 사람 들으시오. 단종대왕 승하했소.’ 이렇게 외치고 난 복덕이는 그대로 절벽 끝으로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단종이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들은 시녀들도 동강에 몸을 던져 단종의 뒤를 따랐다. 이곳을 낙화암이라 부른다. 영흥2리에 있는 바위절벽이다. 금강정 동쪽이며, 층암절벽이 깎아지르고 있다. 그 밑으로 동강이 흐른다. 단종의 죽음으로 궁녀들이 이 바위에서 모두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그 주변에는 민충사, 성인암, 금강정 등이 있다. 그 옆에 창열암이 있는데, 투신한 사람들의 충의를 빛내기 위하여 새긴 글자가 있다.
민충사는 금강정 뒤에 있는 사당으로, 단종이 세조 3년에 승하하자 동강 절벽에서 투신하여 죽은 종신, 시녀 99명의 충혼을 봉안하고 매년 한식과 10월 24일에 제를 올린다.
엄흥도의 충절과 장릉, 단종의 시신에 손을 대는 사람은 삼족을 멸한다. 오랜 기간 강가에 버려진 채로 그냥 물에 잠겨 있게 된다. 아무도 손을 대지 않던 단종의 시신을 목숨을 걸고 용감하게 장사를 지낸 사람이 있다. 영월 호장(戶長) 엄흥도였다. 단종이 살아 있을 때 가끔 놀러 가서 말동무도 되어 주곤 했다. 눈이 와서 천지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하얗고 캄캄한 밤이다. 혼자 엄흥도는 단종의 시신을 지게에 지고 산으로 올라갔다. 온통 세상이 하얗다. 땅은 얼어 있고, 땅을 팔 수 있은 곳이 없었다. 한참을 이리 헤매던 엄흥도의 앞에 갑자기 부스럭 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슴 두 마리가 누워 있다가 사람의 기척을 듣고 놀라서 피해 간다.
사슴이 누웠던 자리에 눈은 없다. 약간의 온기만 있을 뿐이다. 엄동설한이라 깊이 땅을 팔 수는 없다. 주위의 흙을 대강 긁어모아서 시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만 묻었다. 집으로 돌아온 엄흥도는 길을 재촉한다. 그날 밤 아내와 자식을 데리고 전라도 땅으로 내려가 숨어 버린다. 그로부터 200년 넘게 숨어 살던 엄씨 집안은 단종의 복위에 힘입어 그 죄가 없어졌다. 영월 땅으로 돌아오게 됐고, 엄흥도는 영월 엄씨의 시조가 된 것이다.
단종의 유배 길에 얽힌 유적 및 전설을 찾아보면서 산신령이 된 단종은 역사적 인물이면서도 설화적인 인물로 형상화됐다는 것을 보게 된다. 고귀한 신분을 지니고 태어나 집권세력에 의해 버림받고, 어려운 고통을 겪는다. 착한 사람이 비극적으로 억울한 죽음을 당해야 한다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문학의 현장을 찾아 살펴본 바, 유적 및 전설은 한국문학의 귀중한 유산이며 높이 평가돼야 하는 자료라고 생각해 본다.

글 | 홍정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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