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여성성의 연원과 여성문화의 뿌리

동북아 여성성의 연원과 여성문화의 뿌리

치우군진 내 군사악무와 생황, 그리고 ‘어아’의 의미

여와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악기가 바로 생황이다.
이 생황과 연관된 문화 축제가 지금도 묘족사회에 전승되는 점은 주목할 점이다. 묘족에 관한 설화를 기록한 《묘족사(苗族史)》를 보면, 운남성(雲南省) 문산(文山)의 마관(馬關) 등지에서는 매년 전통절에 ‘채화산(踩花山)’이란 연희를 베푼다고 소개한다. 이 연희의 내용을 보면, ‘채화산은 치우를 제사하고자 베풀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생존 당시에 군사 수장이던 치우는 황제(黃帝)와 싸우다 실패하여 동쪽으로 나아갔고(사기에서 왜곡), 깊숙한 산 빽빽한 숲 속에 후퇴하여 들어서 각처로 흩어져 간 묘족 무리를 소집했다고 한다. 그래서 묘족 두령이 산 위에 뿌리가 긴 나무장대를 세워 일으키고, 그 위에 붉게 채색된 허리띠를 매었고, 청년 남녀로 하여금 꽃 장대(花杆)를 돌고 생(笙)을 불고 뛰며 춤추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에 각 지역 부락 사람들이 전해 듣고서 찾아오기를 시끌시끌했고, 대가(大家)에서는 깃발과 북(鼓)을 무겁게 떨치었고, 황제부족(黃帝部族)과 전투를 진행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꽃 장대(花杆)를 돌고 생(苼)을 불며 뛰어 춤추는 악무(樂舞)가 뒤에도 이어져 ‘채화산(踩花山)’이라는 풍속을 이루었다는 게 설화의 골자이다.
황제 헌원의 군진에 맞서 전투를 벌인 것으로 전하는 치우의 군진 안에서 전세 회복과 사기 진작의 의도로 베풀어진 군사 악무에 생황이 동원된 점은 치우 세력이 문화적으로 여와에 맞닿고 있었던 것인지 조심스럽게 고민하게 이끈다.
한편 설화 속에서 위업을 드러낸 여와의 위난 극복과 치유 활동(治癒活動)에 따른 적극적 개선과 회복의 정신을 함축하는 듯한 표현이 있어 주목된다.
곧 ‘어아(於我)는 무엇인가? 그 알맹이가 있음을 있게 함이고 그 이름의 사라짐을 사라지게 함이니, 바람과 빛은 옛날에 따르지만 강과 산은 제각각인 바가 있다. 즐거움은 다른 이에게서 얻음이니 함께함이 착함이다.’라는 내용이 그러하다.
이 부분은 여와설화와 그 신앙에 반영된 속뜻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데에 소중한 실마리를 제공하기에 충분하다.
여와가 설화 내용 속에서 제후들의 권력다툼의 결과 하늘의 기둥이 부러지고, 홍수 따위의 자연 대재앙을 겪는 난국에 꿋꿋한 치자의 의지로 네 기둥을 세우고 찢겨진 하늘도 보수하여 마침내 ‘있음을 있게 함’을 실현한 측면은 《태백진훈》에서 말하는 ‘있음을 있게 함과 사라짐을 사라지게 함을 고스란히 알려주기 때문이다.


한국상고시기의 후토 제의(祭儀)가 지닌 의미
후토(后土)로 지칭되는 여와는 현재 중국 각 지역에 후토사(后土祠)라는 사당의 조형물 안에 모셔 있어 일반인들이 그 전통적 맥락을 가시적으로 느끼는 데에 무리가 없는 상태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지금 한반도의 지역에서 후토사의 모습을 찾기란 쉽지 않다. 다만 《태백진훈》에는, 치우가 바로 한민족의 선대 조상의 하나로 거론됨에 주목된다. 더욱이 치우와 그 사회의 성원들은 ‘가을에 교(郊)에서 신(神)을 맞이했는데 아홉 맹서로써 나라는 하나가 되었다는 내용도 주목된다.
딱히 후토에 대한 제의인지는 분명치 못하지만 치우와 그 세력이 교(郊)에서 신(神)을 맞이했다는 내용임에는 분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토에 대한 제의와 연관된 제의로 볼 수 있는 여지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 또한 치우를 한민족의 선대 조상의 한 갈래로 파악하는 《태백진훈> 등의 내용을 보면 생황을 사기 진작과 구성원 간 단결의 목적으로 사용한 점에 주목할 필요를 느낀다. 생황이 여와가 만든 악기이고, 그 악기를 치우의 군진에서 적극 활용했고, 한민족 역시 치우 후예의 한 갈래로 인식한다면 여와의 상징성은 한민족에게도 연관된다고 추정함은 큰 억지는 아닐 터이다.
더불어 단군의 손길에 의해 조영되었다고 전해지는 강화도 ‘참성단 중수비’를 근거로 말한다면 참성단이 후토에 대한 제의와 연관됐을 개연성이 조금 있기도 하다.
한편으로 《고촌선생문집》(乾)을 보면 ‘단군이 바닷가를 순행하고 후토(后土)에 제사지냈다.(君巡于海上祀后土)는 기록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고촌선생문집》(乾)을 보면, 단군이 바닷가를 순행하고 후토에 제사 지냈는데, 두 붉은 용이 있어 바닷가에 드러냈고, 두 신녀(神女)가 푸른 공중으로부터 와서 자주 빛 금합(金植)을 전했다. 이에 바닷가 언덕에서 단군은 놀라고 기이하게 여겨 나아가 열어 보니 붉은 비단 옷의 사내아이가 있었다는 내용이다.
이 아이를 본 단군은 돌아보며 신하와 백성들에게 말하길, 이는 반드시 황천(皇天)과 후토(后土)가 정성과 공경함에 감동되어 이 신이한 아이로써 영명하고 기이한 자취를 보이는 것이다’고 하며 삼가 후녀(厚女)로 하여금 길렀다.
나이가 15세에 이르러 체모가 장대해지고 기력이 웅건해졌다는 내용이 보여 단군 당시의 정신세계와 제의 문화가 지닌 성격의 일부를 추정케 하는 단서를 보인다. 곧 단군이 황천과 후토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남방으로 순행을 다녔는데, 해안가에서 두 적룡(赤龍)과 두 신녀(神女)를 만났고 그 과정에서 신이한 사내아이를 얻어 그 아이를 후녀(厚女)를 통해 양육케 했던 점을 알 수 있다.
이 전승을 통해 단군 당시에 황천(皇天)과 후토(后土)에 대한 제의가 이루어졌고 단군은 당시의 한 신이한 세력으로 존재했던 신녀 세력과 만났고, 신아(神兒)의 양육을 위해 후녀에게 임무를 맡긴 점은 당시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이 적지 않았음을 추정케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황천(皇天)은 남신(男神)이고 후토(后土)는 동북아 역사상 한 여신(女神)으로 추앙받는 여와를 일컫는다. 여와를 모신 사당이 바로 후토사(后土祠)인 점을 통해 그 같은 점은 쉽게 확인된다. 따라서 왕검 조선의 사회에서 남성 위주가 아닌 여성성의 존중 경향성이 존재했음을 감지할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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