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여성성의 연원과 여성문화의 뿌리

고구려 오회분 4호묘 벽화 속의 월신(月神, 여와)

지금 길림의 집안에 있는 고구려 오회분 4호묘에는 여와 그림이 그려져 있다. 해당 무덤의 널방 천장 고임부 하단 삼각고임 중 북서쪽 측면에는 가운데에 천정을 받치는 용을 사이에 두고, 왼쪽에는 용을 탄 신선, 오른쪽에는 달의 신이 그려졌다. 그 가운데 달의 신이 그려진 모습이 바로 여와의 모습이다. 이 신상은 흰 얼굴에 입술을 붉게 칠한 여자로 묘사됐는데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머리 위로 등근 달을 받쳐 들었다. 달 한가운데에는 두꺼비가 있다. 해의 신과 마찬가지로 하반신은 용의 모습이다. 용의 몸이 오색으로 빛나며, 발을 앞뒤로 힘차게 뻗어 나갔다.
우리는 고구려 오회분 벽화에서 볼 수 있는 달의 신(여와)의 모습을 통해 중국의 여타 지방에서 드러나는 여와도상과 부분적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무엇보다 중국 측의 여와도상에서 보이는 지물(持物 그림쇠 혹은 曲尺)이 보이지 않고 달의 둥근 형상이 묘사된다는 점이다. 맞은편의 해의 신(복희)이 해의 형상을 다루는 점과 비교가 되는 모습이다. 또한 달의 신과 해의 신은 그 하부의 뱀 꼬리 부분이 서로 꼬이지 않은 점도 중국 측 여와복희도상과 다른 점이다. 더욱이 달의 신이 걸친 복식은 그 옷깃이 한복의 일반적 형태와 매우 닮아 있고, 옷소매는 그야말로 새의 날개처럼 그 갈기의 모습이 완연하다. 이러한 모습은 일제강점기에 유통된 단군왕검의 어진에서 보게 되는 풀잎이 마치 날개의 깃털로 연상됨과 맥을 같이 한다고 하겠다. 물론 단군의 영정에서 보이는 풀잎의 이미지는 신농 등의 여타 신인상에서도 발견되어 결코 단군왕검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특징은 아니다. 도리어 풀잎 등으로 날개나 깃털의 이미지를 연출코자 했다면 그것은 상고시기 동북아사회의 보편적 양상으로 이해할 측면일 터이다.
한편 고구려 벽화 속에서 복희는 해의 신으로, 여와는 달의 신으로 각각 묘사된 점은 동북아 사회에서 음양이론을 과연 누가 주체적으로 구현하며 문화에 적용했는가 하는 문제에 심각한 재고찰을 고민하게 한다. 중국 측의 도상에서 음양의 주인공이라기보다는 천지 만물의 주재자
로서 지물을 들고 그 위업을 집행하는 존재였다면, 고구려 벽화에서 복희와 여와는 남성신과 여성신, 그리고 밝은 태양과 어두운 밤의 달 등으로 ‘이원적 의미를 대표하는 이미지를 드러낸다.

여와는 상고 이래로 동북아 지역 여성성의 뿌리였다
이제껏 동북아 상고시기 여와의 상징성과 한국 상고문화 속의 ‘어아(於我‘)노래와 후토제의(后土祭儀)에 관해 소략한 검토를 전개해 보았다. 결론적으로 동북아의 상고 이래 태동한 여와 신앙은 중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에까지 퍼진 점을 알 수 있고, 한국의 경우에는 단군 시기의 후토에 대한 제의가 이루어진 점을 언급한 《고촌선생문집》의 내용을 주목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후토가 여와에 대한 별도의 지칭인 점을 두고 볼 때 그러한 견해는 자연스럽다 하겠다.
따라서 한국 상고 역사에서부터 후토 제의는 존재했을 개연성이 있다.
《태백진훈》을 보면, 치우가 한민족(韓民族)의 한 선대 조상으로 언급되고 치우가 교(郊)에서 신(神)을 맞이했다는 내용은 치우 당시 후토 제의와 연관한 제의가 존재했을 개연성이 있기도 한 점을 거론하였다. ‘어아(於我)’의 의미를 설명하길, ‘그 알맹이가 있음을 있게 함이고, 그 이름의 사라짐을 사라지게 함이란 내용을 여와가 훼손된 세계를 적극적 행위로 치유와 회복을 달성한 열정과 그에 담긴 사상적 의미를 해석하는 데 한 바탕으로 거론한다. 그러므로 ‘於我’의 의미가 바로 여와의 삶을 정의 내려 줌을 은연중에 드러낸 셈이다. 결국 여와(女媧)를 ‘어아(於我)’와 같은 맥락에서 헤아릴 수 있는 여지는 충분히 논의가 가능하다.
더욱이 고구려의 오회분 4호묘의 벽화에서 보이는 달의 신(여와)의 경우, 중국의 전통적인 여와도상과 차이가 존재하는데, 우리 고구려의 도상에서는 음양적(陰陽的) 관념에서 그 특징을 드러낸다고 볼 여지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해당 여신(여와)이 여성성을 지니고 있는 달(月)의 형상을 다루고 있음을 통해 그러한 견해를 밝혔다.
그러나 양적으로 많은 후토(后土祠)가 시기를 달리하며 조영되어 온 중국 현지의 사정을 고려할 때, 과연 한국과 일본의 경우 여와 신앙의 주체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가는 상당한 회의감을 들게 한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후토(여와)에 대한 제의 행위의 다과(多寡)를 논하자면 한국과 일본은 그 존재감 정도나 겨우 거론할 입장임을 숨길 수 없다.
하지만 한민족(韓民族)의 태동 공간이 반드시 지금의 한반도에 국한할 수 없음을 두고 볼 때, 자연 재앙의 대위기 속에서 치유와 회복을 위한 열정적 투혼을 드러낸 여와의 정통성이 반드시 중국에만 한정되어 거론되는 것에는 결코 동의하기 어렵다.

글 | 김영해(한국민속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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