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신라 지도

6-9세기에 동양을 방문한 중동인이 그린 두개의 신라 지도
2005년 11월 18일 KBS에서 방송된 한 장의 지도에 신라가 둘이 표시되어 있다. 이집트박물관에서 발견된 고지도에 어찌하여 신라가 동서에 나란히 그려져 있을까?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지도는 삼국시대를 바로 풀 수 있는 열쇠가 됨을 모르고 있다
<삼국유사>에 이르기를 자장법사가 신라에 왔을 때 선덕여왕이라고 했고 다른 편에는 보천과 효명이라는 두 왕자를 둔 정신대왕이 있었다는 서로 다른 기록이 있었다는 점을 의심하지 않고 지나쳐 버렸다. 그런데 이 지도는 위치와 모양이 다른 지도이다
최치원이 말하듯 고구리‧백제가 남으로 오‧월, 북으로 유‧연‧제‧로를 통치했다고 한 그곳의 신라와 만주와 한반도를 통치한 신라를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는 지도이다. 호박처럼 생긴 신라는 유‧연‧제‧로가 있는 지역의 사로에서 발전한 사로신라이고 길쭉한 오이처럼 생긴 신라는 만주와 한반도에서 존재한 신라를 나타낸 지도로써 이 지도는 6세기에서 9세기 사이 이 지방을 다녀간 이방인이 만든 귀중한 지도이다. 최치원제왕년대력의 사로신라와 김부식이 본 거칠부의 신라를 구별하는 자료이기도 하다.
가라‧백제‧고구리에서 광복한 유‧연‧제‧로-오‧월 사이의 신라와 고구리에서 독립한 만주와 한반도의 신라를 구별하여 삼국시대를 재정립해야 할 것이다.
분명히 이 지도로 알 수 있는 것은 지도 작성인은 503년 이후 900년 사이에 두 신라를 다녀갔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지나18사>東夷倭는 韓의 卑彌國과 狗盧國으로 眞番의 동쪽에 있었다
<지나18사동이전>은 <삼국사기> 권제46을 입증하는데 그곳에는“高句麗‧백제가 전성할 때 强兵 100만으로 남으로 吳越(오월)을 다물(侵:침범)하고, 북으로 幽燕齊魯(유연제로)를 多勿(撓:점유)하여 장안의 걱정거리였고 수(隋)나라의 멸망도 요동정벌에 기인한 것이다.(高句麗百濟全盛之時强兵百萬南侵吳越北撓幽燕齊魯爲中國巨蠹隋皇失馭由於征遼)”고 했는데 高句麗 백제뿐만 아니라 사로신라와 倭도 그곳에 있었으므로 검증을 해야 한다.
우선 <지나18사동이전>이 <삼국사기> 권46을 입증하는가 여부를 검증하고 倭가 오월에 있음도 동이전을 통하여 검증을 해야 한다.
수나라의 요동정벌도 유‧연‧제‧로-오‧월이었음을 검증해야 한다. 또한 18사 倭의 유‧연‧제‧로-오‧월 지역이었음을 검증해야 한다.
지나18사 동이전 지명 검증을 위하여 송나라 때 우적도를 지나지도와 검증해야 한다. 다음으로 지나지도 범위에서 유‧연‧제‧로-오‧월 지역에서 18사 동이전 지명을 찾아 한다. 그리고 삼국사기 지명을 유‧연‧제‧로-오‧월에서 찾아야 한다.

삼국사기 편찬 이래 한 번도 재현해 본 사실이 없다.
기가 막힐 일이지만 <삼국사기> 편찬 이후에 단 한 번도 재현해보는 연구는 없었다. 다만 <삼국사기>가 한반도에 일치하는가 하는 연구는 2014년까지 한국과 동일본에서 연구되어 왔고 한국인은 동일본의 학자들에 의하여 좌우되어 왔다.
현재까지 <삼국사기>를 재현해 보는 것이 아니고 한반도에 맞추어 연구하다보니 한반도에 일치하지 않는다는 불평만 늘어놓게 됐다.
내용에서 다른 자료와 상충되는 것도 있고 한국의 고고학 자료와 맞지 않는다던지 사관의 문제라든지 인용 자료에 대한 것이라든지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다고만 할뿐 한 번도 삼국사기 그 자체를 해석하려고 하지 않았다. 더욱이 자체의 상충문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고 왜 논찬에서 어려운지를 알 수가 없도록 되어 있다. 그 자체만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삼국사기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검증을 다음과 같이 하면 된다.
우선 장안의 사서 한나라에서 당나라까지 사서 즉 <지나18사 동이전>은 <삼국사기> 권46을 입증할 뿐이라는 선언은 검증을 해야 한다. 다음으로 삼국사기를 유‧연‧제‧로-오‧월과 한반도에 각각 대입하여 기록된 지역을 정리해야 한다. 지명은 당나라가 망한 후 송나라대 제작된 우적도와 우적도 범위의 현 지나지도 그리고 혼일강일역대지도 팔도도 대동여지도로 삼국시대를 재현될 지역을 찾는다.
다음으로 삼국사기와 지나18사 동이전이 일치되는 것은 공통부분으로 나머지는 비공통 부분으로 정리한다.
다음으로 비공통부분이 공통부분과 하나 되는 방법을 찾고 비공통부분의 역사도 정리한다.
다음으로 <삼국사기>와 <지나18사 동이전>과 다른 자료를 통합하여 秦‧唐‧間 우리역사를 정리하고 삼국후예가 하나 되는 언어의 발굴, 홍보로 하나 되게 해야 한다.
다음으로 삼국후예가 하나 되기 위하여 그 이전 조상의 역사를 복원하여 소호와 고신 이전에서 역사의 시작을 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삼국사기>를 바르게 재현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검증을 제안하는 것이다. 제도권에서 하지 않으므로 검증하여 국민의 의사를 보여야 한다.
<삼국사기> 검증이 일 단계 <지나18사동이전>이 <삼국사기> 권46을 입증할 뿐 한반도 기록이 단 한 줄도 없다는 선언에 재현해 보는 검증을 해야 한다.

호태왕 비문연구에서 高句麗‧백제가 유‧연‧제‧로-오‧월을 통치하고 남제서가 입증하는데도 무시
광개토대왕 비문을 연구하는 모든 사람들은 호태왕 때 백제‧신라‧가라는 한반도에 있고, 倭는 일본열도에 있다는 전제조건으로 연구를 하고 있다.
그러나 호태왕 탄생 전에 편찬된 삼국지 동이전과 붕어 후에 편찬된 후한서 동이전에서는 동이는 유‧연‧제‧로-오‧월에 있음을 분명히 하여 삼국사기 권46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그럼에도 호태왕 때 백제는 한반도 한강 이남으로 국한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런 삼국사기 권46에 “高句麗‧백제가 강성할 때 강병 백만을 보유하고 남으로 오‧월을 다물(侵:침범)하고 북으로 유‧연‧제‧로를 다물(撓:점령)하여 장안의 큰 두통거리가 되었고 수(隋)나라의 멸망도 요동정벌에 기인한 것이다. (高麗百濟全盛時强兵百萬南侵吳越北撓幽燕齊魯爲中國巨蠹隋皇失馭由於征遼)”라 했고 남제서에서 백제가 광양군, 청하군, 안국 성양군, 광릉군을 통치했다고 말하는데 모두 유‧연‧제‧로-오‧월 지역에 있는 지명들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호태왕 때 백제 정벌을 한반도에만 맞추기 하지 말고 유‧연‧제‧로-오‧월과 한반도에 각각 대입해 보면서 진실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해보지 않는 연구가 진정한 연구라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지나18사동이전이 삼국사기 권46을 입증하는 자료인지를 검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1905년 이전 사피수, 하피수, 아피수가 어떤 해명도 없이 1905년 이후 아리수로 변경된 것도 함께 검토돼야 한다.
<지나18사 동이왜>는 결코 일본열도가 아니었으므로 호태왕비문에 아리수로 변조한 것도 아무 소용이 없는 장난이었음을 검증을 통해 밝혀야 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호태왕비문은 백제가 유‧연‧제‧로-오‧월에 존재했으니 그곳에도 맞추어 보고 한반도에도 맞추어 보아서 진실을 가려야 할 것이다.
<지나18사동이전>이 삼국사기 권46을 입증하는지를 검증하지 않으려는 것도 사서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도 모든 역사자료를 한반도에 맞추기 하는 연구버릇 때문에 진실을 가리려는 것이다. 손으로 하늘을 언제까지 가릴 수 있다고 할 것인지 모르겠다.
서울시에서는 이미 2004년에 아리수는 검증을 받은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지나18사 동이전>이 <삼국사기> 권46의 고구려‧백제가 유‧연‧제‧로-오‧월을 통치했다고 하는데 이것도 검증을 해서 서울 한강이 아리수라는 것을 어떻게 검증받았는지를 공개해야 할 것이다.

<삼국사기>를 한반도에 맞춰야 하나? <삼국사기>에 일치되는 곳을 찾아야 하나?
현재까지 <삼국사기> 연구는 한반도에 맞추기 연구였다. 宋‧元‧明‧淸‧조선‧동일본 모두 <지나18사>동이전을 만주와 조선에 맞추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삼국사기>를 한반도에 맞추기를 하면서 부정하기 시작했고 조선의 지식인들도 그에 동조하고 있었다. 그래서 삼국시대 사서를 한반도에 맞게 취사선택하면서 스스로 역사책을 부정하고 마치 자기들이 쓴 책이 옳은 것처럼 해 왔다.
삼국시대라고 하는 그 시대는 우리역사에서 허리에 해당한다.
허리가 구부러지면 몸 전체가 균형을 이루지 못하듯 그 시대를 바로 하지 않으면 우리역사가 바로 정리될 수 없다.
<삼국사기>를 <지나18사>동이전을 한반도에 맞추기 하지 말고 <삼국사기>나 <지나18사>동이전을 바르게 해석하여 그 위치를 찾아서 정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지나18사>동이전이 <삼국사기>권46을 입증하는지를 검증해야 한다. 그리고 <삼국사기>를 <지나18사>동이전과 같은 것과 다른 것으로 정리하고 같은 것과 다른 것이 하나 되는 방법을 찾아보아야 한다. 그렇게 검증을 하자는 것이다.
<삼국사기>나 <지나18사>동이전을 한반도에 맞추는 연구만 언제까지 할 것인가? <지나18사>동이전이 <삼국사기>권46을 입증하고 있으니 검증을 하자는 것에도 언제까지 외면만 할 것인가?
여진족 한민족이라는 민족사관으로는 안 된다. 족보사관이어야 한다.
지나 역사는 한족의 역사로 알고 있는데 정리된 것을 보면 한족역사만이 아니다. <지나25사>를 보면 한족이 아닌 주변의 역사도 모두 지나 역사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송나라 이전 짧은 건국과 패망으로 반복된 역사를 통하여 항상 통합의 역사를 위하여 노력한 사관들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우리는 건국과 패망의 순환이 오백년에서 천년사이의 오랜 기간의 역사를 이어 오다보니 통합의 역사를 정리하지 못하고 高麗 이후 국가사관에 빠지기 쉬운 상태에서 신채호의 ‘我와 非我’의 분류에서 삼국후예가 조선민족과 여진족으로 분리됨으로서 씻을 수 없는 왜곡의 민족사관이 만들어지고 말았다. 현재의 국가사관에 충실하려다 보니 유구한 역사를 포기하는 듯 비쳐지게 되고 스스로 사서를 부정적으로 보고 취사선택하는 아주 나쁜 버릇으로 채워져도 잘못된 것인지 모르고 있다. 삼국후예가 하나 되지 못하는 신라통일사관이 판을 치고 여진족과 한민족이라는 이분법으로 역사를 오도하게 되어 스스로 고구려‧발해를 포기하는 듯 보이게 된 것이다.
한민족과 여진족이라는 말은 19세기 민족이라는 말을 처음 만들어 져서 시작된 것인데 민족이라는 것을 강조하면 스스로 왕정시대를 포기하는 듯한 인상을 남긴다. 그러므로 민족이라는 말이 들어간 민족사관이 아니라 족보사관 즉 최초의 후예는 하나로 보는 사관으로 나아가야 한다.
상식으로 삼국후예인 만주인을 여진족이라 하고 高句麗(고구리)‧발해 후예이지만 여진족이라며 우리가 한민족이라는 시각으로는 우리역사를 바로 할 수가 없다.
우리역사에서 <삼국사기>에서 나타내듯 삼국인이 전통의 기준으로 했던 전전국가 九黎(구리)시대를 기준으로 하는 족보사관에서 우리역사의 전통을 정립해야 한다.
남북이 싸웠어도 하나로 보듯 병자전쟁(병자호란)도 역시 하나로 보고, 원나라와 고리전쟁도 하나로 보고, 요나라와 고리도 하나로 보는 사관으로 우리역사를 정립할 때야 비로소 <삼국사기>의 후예들은 하나로 될 것이다.
秦‧漢이전의 역사도 한무제 이전은 우리역사였다. 한무제가 독립하겠다고 정리했지만 동이에서 분리된 것은 틀림이 없다. 삼국이 전통계승의 모델로 했던 九黎(구리)의 후예는 하나의 역사로 정립해야 한다.

글|오재성(삼국사연구회장, 우리역사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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