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의 주인공들이 하나의 민족 명칭인 선조로 남고또 후손으로 전해야 한다

조선민족과 여진족을 가른 신채호의 조선국가사관으로는 우리역사를 복원할 수 없다. 高句麗(고구리) 발해 역사를 밝히면 무엇하나? 이미 한민족과 여진족으로 분리해 버린 후에는 삼국후예가 하나 되는 것을 포기한 것이다. 현재 한민족과 여진족이라는 분리 개념으로는 한국 땅의 역사는 만들지 몰라도 삼국의 역사를 재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유구한 역사를 계승한다고 하는 우리는 기준을 현대에 두면서 어떻게 유구한 역사를 계승한다고 하는가? 역사는 재현하는 것이지 결코 국토에 맞추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국토사관으로 조상들을 욕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현재 우리는 대한인으로 그리고 삼국후예가 하나 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광개토대왕 비문 연구에서 배제된 최치원의 高句麗, 백제 유‧연‧제‧로-오‧월 지역 존재
광개토대왕 비문을 연구하는 모든 사람들은 호태왕 때 백제, 신라, 가라는 한강 이남에 있고 왜는 일본열도에 있다는 전제조건으로 비문을 연구하고 있다.
그러나 호태왕 탄생 전에 편찬된 삼국지 동이전과 붕어 후에 편찬된 후한서 동이전을 먼저 해석을 바로하고 난 이후에 비문 해석을 해야 하는데 아무도 새로운 해석이 보도되지 않았다.
좀 더 새로운 제안을 하려고 한다.
삼국사기(이후 삼국사로 표기) 권46에 “고구려, 백제가 강성할 때 강병 백만을 보유하고 남으로 오‧월을 다물(侵:침범)하고 북으로 유‧연‧제‧로를 다물(撓:점령)하여 장안의 큰 두통거리가 되었다.(高麗百濟全盛時强兵百萬南侵吳越北撓幽燕齊魯爲中國巨蠹)”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서 나타나는 유연제로-오월에 고구려 백제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고 호태왕비문을 풀어보자는 것이다.
1905년 이전에 나타나지도 않는 ‘아리수’로 수돗물 명칭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1905년 이전 사피수, 하피수, 아피수가 어떤 해명도 없이 1905년 아리수로 변경된 것은 동이 왜와 사로신라의 제로와 오월의 분쟁을 마치 이 땅의 역사로 왜곡하면서 1920년부터 1990년까지 ‘아리수’는 ‘속임수’라는 국어사전의 기록도 외면하며 아리수를 수돗물 이름으로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 호태왕비문연구에서 高句麗, 백제가 유‧연‧제‧로-오‧월에 존재한다는 기록을 외면하고만 있을까? 이것은 지나18사가 삼국사기 권46을 입증하는 것을 검증도 외면하기 때문에 발생된 현상일 뿐이다.

삼국후예가 하나 되기 위해서는 삼국 이전 九黎(구리)서 명칭을 찾아야
조선시대 秦‧唐間(진나라 당나라) 우리역사를 이 땅으로 옮긴 것은 조선과 명의 국가사관이 일치했기 때문이다. 명은 지나 땅을 하나로 통치하는데 秦‧漢‧隋‧唐이 그렇게 했기 때문에 당연하다는 논리를 펴기 위해서 동이역사를 만주와 한반도로 몰아버렸다. 조선은 동이역사를 대동여지도에 맞추기 위하여 안간힘을 다하였다. 삼국사를 부정적으로 보면서 이 땅에 맞추기를 계속하여 왔다. 또한 열도의 일본은 지나18사 ‘동이 왜(東夷倭)’를 일본열도의 역사로 하기 위하여 명‧조선의 역사왜곡에 동참했다.
영원히 감추고 싶어서 남제서 백제기록을 삭제하는 우를 범하면서까지 왜곡하려고 했다. 그러나 지나18사가 있고 삼국사도 있고 호태왕비가 있는 한 결코 완벽하게 왜곡시킬 수가 없었다.
문제는 우리 내부에 있다.
지나인들은 짧은 기간에 건국하고 패망을 되풀이하다 보니 당나라 때까지 당과 고구려‧백제‧사로신라와 대립되는 상황이었고 천년의 高句麗(고구리)‧백제가 패망하면서 역사가 감춰지는 것으로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가라, 고구리, 백제에서 광복한 사로신라를 엎고 고구리, 백제를 패망시켰다. 그러나 사로신라에 계림도독부로 만들고 그 역사를 고구리에서 독립한 신라에 묻으려 했다.
그러나 삼국사와 삼국유사 그리고 지나18사 호태왕비문 그리고 이집트박물관에 보관된 지도로 세상에 본 모습을 나타나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 압록강-두만강 이남을 나타낸 대동여지도에 우리역사를 맞추려 하면서 그 북쪽에 살고 있는 동포를 끌어안지 못하고 여진족으로 분리하고 말았다.
조선민족과 여진족을 분리한 그것부터가 실수인 것이다.
고구리, 백제, 사로신라, 신라 그리고 왜(倭)는 조선의 후예국이다. 그렇다면 그들을 하나로 부르는 명칭을 찾고 전수했어야 한다.
고구리는 우리역사이고 만주인은 우리와 다른 여진족이라는 사상으로 어떻게 고구리, 발해를 우리역사라 할 수 있는가?
통일신라를 외치면서 어떻게 고구리, 발해 역사를 우리역사라 말할 수 있는가?
삼국인이 하나 되는 명칭이 없는 것이 아니다. 삼국이전의 역사를 복원하면 되는 것이다. 즉 현재 대한민국은 분단국이 아니다. 그럼에도 통일을 외치는 것은 대한제국의 전신 조선의 분할을 분단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민족이라 하다가 국호 때문에 한민족이라 한다.
삼국으로 분할됐다면 분단 이전의 국호를 찾으면 된다. 고구려 이전은 (고)조선이다. 그런데 삼국은 전통계승을 전 국가 (고)조선으로 하지 않았다. 전전국가(구리)를 계승하고 있는 흔적을 찾았다.
高句麗는 구토회복을 다물이라고 했는데 이제 건국한 나라라면 구토(舊土)가 있을 수 없다. 이것은 전전국가 구리(九黎)의 땅을 회복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전전국가 국호 구리의 음을 따서 句麗(구리)와 구리후예 중에서 제일 높다는 의미의 高를 부쳐 高句麗(고구리)로 했다.
그런데 백제는 고구리가 국호를 취하므로 국호가 아닌 건국자를 취하여 수도 이름으로 하였다. 즉 九黎의 최초 천자가 거발한이었는데 거발과 한을 수도 명칭으로 하여 거발성 또는 한성으로 붙였다. 그러니까 신라는 전전국가의 국호와 건국자를 선점하지 못하고 그 백성 명칭을 취하여 묘예(苗裔)라 하게 된 것이다.
서로 전국가 (고)조선이 아닌 전전국가 구리에서 전통계승의 명분을 찾았다.
우리는 신라와 高麗(고리)의 후예를 여진족과 한민족으로 나누어 버렸고 삼국후예를 한족, 몽고족, 장족, 묘족, 이족, 위구루족, 티벳트족, 여진족, 한민족 등으로 분리하고 말았다.
삼국지 동이예전에서 한 무제가 동이에서 분리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오랫동안 유지하므로 장안조정보다 역사를 정리해서 편찬할 시기가 없었다. 그러나 장안 조정은 당나라 이전까지 수십 년의 짧은 건국과 패망이 연속되므로 역사를 정리하면서 동이를 분리하여 왔다. 그것이 진 당간 1200여년 역사이다. 이를 기록한 것이 삼국사이다. 그러나 명과 조선은 국가사관에 충실하려고 유구한 역사를 외면하여 전하므로 현재 삼국후예가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다른 것처럼 되어 왔다.
지금은 분할됐어도 과거 하나로 있었다면 미래에도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九黎(구리) (고)조선, 고구리의 干(汗 韓)제도와 같은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누릴 수 있게 고대에서 하나 되는 명칭을 찾아야 한다. 왕검 조선 때는 아시아가 조선과 하, 조선과 주의 2분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그 이전 구리 때는 아시아에서 오직하나 밖에 없는 국가였다. 황제 헌원은 구리 제후의 아들이고 구리의 치우는 천자였다고 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이제 한국인, 중화인, 몽고인은 하나 되는 호칭으로 미래의 이정표를 세워야 할 것이다.

지나18사 동이전을 정립해 당서 이후의 사서에서 인용부분을 재정비해야 한다
高句麗(고구리), 백제가 망하고 사로신라가 당나라의 계림도독부가 되어 인사권마저도 간섭받는 지경에 이르면서 동이역사는 숨겨지기 시작했다.
당나라가 망하고 그 땅이 요‧송으로 금‧송 2분됐다가 원이 일통을 하면서 우리역사는 왜곡되기 시작했다. 사로신라 역사는 신라사에 편입시키고 사로신라 역사는 감추어지는 듯 했다. 다행히도 삼국사와 삼국유사 그리고 지나18사가 있었기에 사로신라와 신라를 구별하여 우리역사를 밝혀질 수 있게 되었다.
요사부터 지나18사동이전을 인용한 부분은 우리가 다시 보아야 한다.
예로 기자가 만주에서 활동한 것처럼 왜곡되고 있다. 또 기후-기준의 번조선은 요의 동쪽 역사가 숨겨지고 위만의 하북성 북부지역 역사를 한반도로 옮겨버리고, 秦 이후에 동이는 한반도와 만주로 쫓겨 가는 식으로 역사가 위조되고 있다. 분명히 고구리, 백제는 유‧연‧제‧로-오‧월을 통치했다. 청나라 이전에 동이역사가 탄로 날까 두려워 남제서 백제전 서두를 지우지 않았는가?
지나18사는 삼국사기 권46을 입증할 뿐 한반도나 만주 기록은 없다. 그럼에도 지나18사를 한반도까지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 삼국사기 권46은 삼국사기 50권 중 하나이므로 삼국사기를 기준사서로 하는 검증을 먼저 해야 한다.
압록강-두만강 이남의 대한인을 한민족이라고 하고 그 북쪽에 여진족이 산다는 민족사관으로는 결코 우리역사를 복원할 수가 없다. 지나18사 동이전을 제자리에 놓고 나서야 秦唐間의 우리역사를 복원할 수가 있을 것이다.

7세기 이전 倭人(와인)은 일본열도인이 아니다
東夷倭人은 朝鮮과 韓의 후예이며 진번군의 동쪽이며 귀주성 동쪽에 있었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倭人이 일본열도인이 아니라는 말은 믿을 수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삼국사기의 倭人과 지나18사 東夷倭는 일본열도인이 아니다. 이런 말을 하면 잘못된 것으로 치부할 것이다. 그러나 2가지 검증 방법으로 해볼 수 있다.
지나18사 동이전이 삼국사기 권46을 입증하고 있으니 이를 검증하면 고구려, 백제 그리고 사로신라와 왜의 위치도 검증된다.
또 하나 삼국지 후한서 동이전으로 각 국가의 배열도를 만들고 각각의 지명을 대입하고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우적도로 1차 찾아보고 2차로 우적도의 범위 지나지도에서 그 위치를 찾아본다.
또 하나 삼국지 와인(倭人)전과 사기 월왕구천전을 대입하여 倭人의 정의를 내릴 수 있다.
또 하나 한서에서 진번(眞番)과 남월(南越)의 담이(儋耳)의 기록으로 우적도에서 그 위치를 찾는다.
또 하나 삼국지 와인전(倭人傳)의 비미국(卑彌國)과 구노국(狗奴國)과 한전(韓傳)에서 비미국(卑彌國)과 구노국(狗盧國)으로 연관성을 찾는다.
또 하나 삼국지 후한서에서 倭의 지명으로 儋耳, 朱崖, 澶洲, 夷洲, 會稽 등 지명이 우적도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 결과 우적도에서 倭는 眞番의 동쪽 남월, 주애, 단주, 이주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고 高句麗 백제의 남으로 오‧월, 북으로 유‧연‧제‧로를 통치하고 그 사이에 최치원의 신라가 있었다. 또한 진번의 동쪽이므로 번조선인이고 한의 일부이므로 동이 즉 우리역사인 것이다.
그러므로 지나18사 동이전과 삼국사기와 사기 우적도 등으로 삼국시대 倭史는 결코 일본열도로 왜곡될 수가 없다.
이렇게 외쳐도 절대로 검증을 하지도 않고 지금까지의 잘못된 역사교육으로 일관하려는 것은 대한암흑기 역사를 배운 잔존 세력들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제 연구를 하는 모든 사람들은 지나18사 동이전이 삼국사기 권46을 입증하는지 검증을 해야 한다. 그리고 삼국사를 유‧연‧제‧로-오‧월과 한반도에 대입하여 18사동이와 공통부분의 위치와 비공통부분으로 정리하여 그 위치를 찾고 공통부분과 비공통부분이 하나 되는 방법을 찾으면 된다. 분명히 東夷倭가 일본열도인이 아니고 귀주성 남월 동쪽 사람이라는 것은 충격적이라 할 수 있다. 또 그들은 조선인이고 한의 후예라는 것도 놀랄 일이다. 이렇게 된 데는 15세기 조선국가사관이나 원‧명‧청의 국가사관 일본열도의 국가사관으로 삼국시대 倭가 일본열도인 것처럼 만들므로 인하여 우리역사가 정립하지 못하고 우리 사서마저 비판대상이 되어 왔다. 조선시대에 역사책을 쓴 모든 사람들이 일본열도인을 삼국시대 倭로 잘못 풀이함으로서 스스로 우리사서를 부정적으로 보는 습관을 갖게 됐다. 이것은 宋‧元‧明‧淸의 동이역사 밀어내기와 자국내 秦‧漢‧隋‧唐의 일통론을 기정사실화하기 위한 작업이다. 이에 고려의 국가사관, 조선과 대한의 국가사관에 스스로를 한반도로 확정시키면서 倭를 일본열도역사로 인정하고 삼국사기와 18사동이전을 한반도 역사로 확정하면서 왜곡의 길을 걸어오게 됐던 것이다.
일본열도가 국호 일본을 시작한 것이 그들이 쓴 조선통신사에 의하면 1403년 명나라가 일본이라는 국호를 인정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현대의 우리는 경상도와 일본열도의 역사로 오인하는데서 풀리지를 않고 있다. 삼국사와 지나18사동이전의 倭를 밝히지 않으면 秦唐間 우리역사는 정리될 수가 없다.
그래서 검증을 해야 함에도 검증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검증에 동참을 호소하는 것이다. 언제까지 학교에서 거짓을 가르치는 것을 보고만 있을 것인가?

모두가 조선 국가사관을 벗어버리려 하지 안는다. 민요수집도 팔도강산
우리들은 (고)조선, 高句麗, 발해, 백제, 신라가 우리역사라고 말하는데 행동은 헌법영토에 맞추고 있다. 적벽가를 부르고 있지만 우리민요를 팔도강산에 맞추고 있다.
스스로 高麗와 조선의 만주통치도 지워버리고 있다. 강감찬장군의 구주대첩이 만주의 龜州(구이)의 사건이고 윤관의 여진평정 출발도 장춘이었는데 단 하나의 만주민요가 수집된 것이 있는가? 高句麗, 백제가 남으로 오‧월 북으로 유‧연‧제‧로를 통치했는데 단 하나의 민요도 그 곳에서 수집된 것이 있는가?
우리는 국악이란 미명으로 팔도강산을 외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한민족이라고 만주인은 여진족이고 유연제로-오월은 한족이라면서 高句麗, 백제를 우리역사라고 말한다.
역사는 가지고 오고 싶고 그 후예를 버리겠다는 것인지 마음속 깊이 한국헌법영토에 맞추면서 어떻게 동북공정에 대항하겠다는 것인지 궁금하다.
스스로 버리는 것은 먼저 줍는 자가 주인인 것이다. 인디언이 살던 땅도 빼앗은 자가 주인이다. 그렇다고 인디언 역사가 없어지는 건 아니다.
우리는 말이 다르면 다른 민족이라고 민족개념에서 배운다.
이 땅에 태어나서 그 조부모가 조선인이었어도 어쩌다 버림받아 해외입양 당한 애가 자라서 이 땅에 돌아와 부모를 찾는다. 그들은 우리말도 우리풍습도 우리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그렇다면 그들은 우리민족이 아니다. 우리의 아들딸들은 맞는데 우리민족이 안 된다.
과거 이어령이 문화부장관에 취임하고 첫 인터뷰에서 우리말 우리 것을 모르면 우리민족이 아니라고 방송을 했다. 이것이 현대 학계나 정부나 국회의원들, 지식인들의 인식이다
이런 상황으로는 절대로 삼국의 역사는 바로 되지 않는다. 우리 학생들에게 거짓을 전수할 수밖에 도리가 없다.
민요도 삼국의 노래를 다 수집해야 하고 말도 삼국 범위를 다 포용해야 한다.
삼국사기 권46을 지나18사동이전이 입증하고 호태왕비가 입증하고 있으니 검증을 해야 한다. 더 이상 거짓을 못하게 하려면 삼국사와 지나18사동이전 호태왕비문연구를 검증하고 사서를 세우고 바로 연구하게 해야 한다.
삼국사는 서북으로 선비영역, 서남으로 유연제로-오월, 동북으로 연해주, 동남으로 서라벌까지 삼국무대로 기록하고 있다.
우리민요 우리가락도 삼국무대를 모두 아울러야 한다.
삼국무대의 삼국후예도 하나로 불러주어야 한다. 모두가 형제라고! 그리고 민요에서 팔도강산만을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스스로 버리지는 말아야 한다.
지나18사동이전은 삼국사기 권46을 입증할 뿐 한반도 기록은 단 한 줄도 없다고 선언했다.
언젠가는 검증자가 나타날 것이다.

학계도 정부도 결코 사서검증은 하지 않는다
지나18사가 삼국사기권46을 입증하고 한반도기록은 없다고 선언, 검증을 요청해도 현시점의 학계나 정부는 검증하지 않는다.
첫째 이유는 현재까지 교육받은 것은 사서를 믿을 수 없다. 자기들이 쓴 한국사만 믿는다.
이것은 신채호의 ‘조선사연구초’를 믿어서다. 그는 한국 땅에 일치하지 않으면 수정해서 맞춘다는 인식이 있고, 이병도 등 일본식민지교육자들에 의해서 배운 것 그 잔재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또 송원명청은 秦漢隋唐이 지나 땅을 일통했다는 것에 맞추려고 지나18사동이전을 밀어내고 현재 일본은 1403년 명으로부터 일본이란 국호를 받으면서 지나18사 東夷倭가 일본열도역사라고 우겨대기 위하여 우리역사를 거짓으로 가르쳤다. 또 대륙에 사로신라가 밝혀질까 봐 신라방을 만들고 백제가 밝혀질까 봐 요서진출설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조선 땅에서 진출한 것으로 하여 대동아공영권이란 미명하에 유연제로-오월까지 진격했고 우리역사는 축소해서 가르친 것을 이병도를 통해서 이 땅에 뿌리내리게 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대동여지도에 역사를 맞추어온 조선의 역사관이다
안정복의 동사강목도, 정약용의 아방강역고도, 장지연의 조선강역지도,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도 모두 대동여지도에 삼국을 맞추고 있다. 특히 신채호의 조선사연구초는 결코 지금 학계나 정부가 사서를 검증하지 않는 이유를 제공했다. 삼국역사도 헌법영토에 맞춘다.
둘째 이유 조선인은 조선국가사관에 맞추는 역사다. 이것의 뿌리는 高麗강역에 맞춘 이승휴의 ‘제왕운기’이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고 북쪽만 대륙에 이어진 땅’ 이것에 우리역사를 담았다. 지금의 삼국에 대한 모든 역사관은 이에서 출발했다. 1287년부터 우리역사는 왜곡되기 시작했다. 그래도 高麗는 滿鮮(만주와 조선)을 강역으로 했을 때 국가사관에 맞추었다. 그런 高麗를 대동여지도에 맞추면서 이후에는 신의주에서 원산까지로 추고하고 말았다.
삼국사기를 검증하지도 않고 부정적으로만 보고 제왕운기의 방식으로 스스로 역사를 버린 것이다. 아니 역사는 가져오고 그 강역을 버린 것이다.
버리는 것은 줍는 자가 임자다.
세계에서 우리 사서를 검증해서 이 땅 사람들에게 일러주면 모를까 우리 스스로 사서 검증을 하겠는가?
서양에 입양됐어도 그들은 우리의 아들딸이다. 현재 다르다 해도 우리조상들에서 이어 온 세계인들은 우리의 형제인 것이다.

지나18사동이전은 삼국사기 권46을 입증할 뿐, 한반도 기록은 단 한 줄도 없다.
지나18사 동이전은 삼국사기 권46의 “高句麗 백제가 강성할 때 강병 백만으로 남으로 오월, 북으로 유연제로를 점유했다.(高麗百濟全盛時强兵百萬南侵吳越北撓幽燕齊魯爲中國巨蠹).”는 것을 입증할 뿐 한반도 기록이 단 한 줄도 없다.
지나18사 동이전은 삼국사기 권46을 입증하는 것으로 세계 누가 검증을 해도 결과는 똑같이 나올 것이다. 검증을 해야 삼국시대를 바탕으로 한 미래가 보일 것이다.

  • 지나18사(史記, 漢書, 後漢書, 三國志, 晉書, 宋書, 南齊書, 魏書, 梁書, 北齊書, 陳書, 隋書, 周書, 北史, 南史, 舊唐書, 新唐書, 舊五代史)
  • 유‧연‧제‧로‧오‧월(幽燕齊魯吳越)은 幽는 하북성 북부, 燕은 산서성 북부, 齊는 산동성 북부, 魯는 산동성 남부, 吳는 강소성 남부, 越은 양자강 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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