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속인의 길목에서 마주하는 삼산돌기와 기도터
무속은 여전히 한국인의 무의식 속깊은 곳에 뿌리내려 있다. 시대가 변해도, 도시의 불빛이 강해져도, 사람들은 여전히 하늘과 땅 사이에서 길을 묻는다. 그리고 그 길의 시작은 산이다. 한국 무속에서 ‘삼산돌기’는 단순한 산행이 아니다. 그것은 신과 인간이 처음으로 맞닿는 통로이며,무속인이 자신의 운명을 자각하는 길목이다. 기도터는 또 다른 문이다. 집을 떠나 자연 속으로 들어가, 신과 대면하는 장소. 무속인은 그곳에서 자신을 비우고 다시 채우며,타인의 삶을 품을 준비를 한다.
삼산돌기, 세 산을 밟는다는 것
무속인이 되기 위한 길, 그 시작은 결코 가볍지 않다. 수많은 준비와 고통, 그리고 가장 근본적인 통과의례 중 하나가 바로 ‘삼산돌기’다. 이름 그대로 세 곳의 산을 밟고 도는 이 과정은, 무당이 되는 첫 걸음이자 신을 맞이하기 위한 정화의 여정이다.
과거엔 ‘삼산(三山)’이라는 말이 정말로 단 세 개의 산을 의미했을지 모른다.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 먼 거리의 세 산을 오르내리는 일은 말 그대로 큰 결심이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세 산을 도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마음과 정성으로 산을 찾고 기도하느냐가 더 중요해졌다.
삼산의 의미는 다양하다. 어떤 이는 명산 세 곳이라 말하고, 또 어떤 이는 아버지의 본향, 어머니의 본향, 그리고 현재 거주지를 말하기도 한다. 실제로는 각자의 신내림굿이 이루어질 장소와 가장 관련 있는 세 산, 즉 친가의 큰 산, 외가의 큰 산, 그리고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서 가까운 명산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이 세 산은 단순히 산을 오르는 여정이 아니라, 신령님께 인사를 드리며 산의 정기를 받고 신의 문을 여는 중요한 절차다.

산을 도는 동안 무당은 기도를 올리며 치성을 드린다. 한 번 산에 올라가 무언가가 보였다면, 그 기억은 신내림굿을 준비하는 데 큰 단서가 되며, 다시 그 산을 찾게 되는 계기가 된다. 그곳에서 말문이 트였거나 신령의 기운을 느꼈다면, 그것은 그 산과의 인연이며, 이후 무속인의 수행에 큰 영향을 끼친다.
삼산돌기는 단순히 신명을 받기 위한 조건이 아니다. 신은 이미 와 계시며, 산을 도는 여정은 그 신을 제대로 모시기 위한 마음의 준비 과정이다. 마치 큰 잔치를 앞두고 손님을 초대하는 주인이 직접 초대장을 들고 인사를 가듯이, 무속인은 삼산을 돌며 신령님께 자신을 알리고 정성을 다해 인사를 드리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무당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비우고 정갈하게 만들어 신을 모실 준비를 마친다.
특히 요즘은 단지 세 산을 돌았다는 행위보다, 자신과 가장 인연 깊은 산을 찾아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했는지가 더 중요해졌다. 어떤 무속인은 “말없이 기도터를 찾아가 신 앞에 자신을 드러낼 때, 그 정성이 신에게 통한다”고 말한다. 결국 삼산돌기는 무속인의 삶에서 가장 근본적이면서도 성스러운 통과의례다.
기도터, 신을 만나러 가는 길
기도터는 무속인의 일상이다. 그리고 그 일상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무당에게 기도터는 신과 교감하는 가장 직접적인 공간이며, 자신을 비우고 채우는 유일한 공간이기도 하다.
전통적으로 한국의 마을, 특히 중부 지방에는 국수당이 산 중턱에, 산신당은 그 아래, 서낭당은 마을 입구에 위치해 있다.
이러한 기도터들은 마을을 지켜주는 신을 모시는 공간으로, 오랜 시간 신앙의 중심이었다. 무속인은 이곳에서 신과 교감하고, 때론 치성을 드리고, 때론 신도들의 소원을 전한다.
가장 대표적인 기도터로는 강원도 대관령 국사성황사, 서울 인왕산 국사당 등이 있다. 대관령의 국사성황은 신라의 국사였던 범일(梵日)이 죽어서 신이 되었다는 설화를 지닌 신령으로, 지금도 많은 무속인들이 치성을 올리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인왕산 국사당은 청와대 뒷산에 위치하며, 서울에서 가장 신령한 산으로 여겨진다. 다만 지금은 출입이 쉽지 않아 문이 잠겨 있는 경우도 많다.

그 외에도 충청도의 계룡산, 전라도의 지리산, 경상도의 일월산, 강원도의 오대산, 태백산 등은 전국 각지에서 무속인들이 찾는 대표적인 기도터다. 특히 태백산 정상의 천제단은 천왕을 모시는 장소로, 고대 하늘에 제를 올리던 유적이 남아 있는 신성한 장소다. 이곳은 무속인들이 반드시 한 번은 다녀와야 할 곳으로 여겨지며, 그 기운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강력하다고 한다.
이러한 기도터는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지만, 몇 가지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 어떤 곳은 육식을 금하고, 어떤 곳은 말조심을 해야 하며, 마음가짐이 흐트러진 상태로는 들어가선 안 된다. 상복을 입은 사람, 유산을 경험한 사람, 남녀 간의 관계가 정결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기도터를 피하는 것이 좋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상태에서 들어서면, 신령의 기운이 흩어지거나 그 자리에 있던 물이 사라지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무속인들은 자신을 위한 기도뿐만 아니라, 신도들의 소원을 대신 전달하기 위해 기도터를 찾는다. 신도마다 기도 내용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날은 시험 합격을 위해, 어떤 날은 사업번창을 위해, 또 어떤 날은 건강을 위해 기도를 드린다. 기도터에선 이를 날짜별로 정해 기도하기도 하며, 신령마다 바라는 정성이 다르기 때문에 무속인들은 그에 맞는 준비를 철저히 한다.
기도, 그리고 힐링
기도터는 무속인에게만 필요한 곳이 아니다. 지친 일상 속에서 위로가 필요한 모든 이들에게도 열려 있는 공간이다. 그리고 그 기도는 단지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자신을 마주하는 진심 어린 순간이기도 하다.
올해 음력 2월은 제석달이다. 바람의 달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는 천상의 신령들이 인간 세상에 내려와 복을 내릴 사람과 벌을 줄 사람을 가른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많은 무속인들이 이 시기, 특히 제주도의 기도터를 찾아 기도를 시작한다. 바람의 땅, 제주에서 시작하는 기도는 그 자체로 상징성이 크며, 신도들의 기원을 함께 담아내는 중요한 순간이다.

제자 은초와 함께 제주도의 기도터를 찾았다. 혼자였다면 느슨해졌을지도 모를 기도 여정이, 제자와 함께함으로써 더 정성스럽고 성찰적인 시간이 되었다. 제자는 말없이 움직이고,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그런 제자와 함께 기도터를 돌며 서로의 마음을 읽고, 신에게 정성을 다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기억에 남는 기도터 중 하나는 러시아의 바이칼호수다. 밤하늘의 별빛이 물 위에 내려앉고, 별들이 쏟아질 것만 같았던 그곳에서 이유도 없이 대성통곡을 했다. 눈물이 없는 성격이지만, 그날은 말할 수 없이 울어야만 했다. 마치 누군가 나를 알아봐 주고, 오랜 시간의 고통을 껴안아 주는 듯한 감정이었다. ”먼 길 돌아 왔구나. 수고 많았다.” 그렇게 신이 속삭이는 듯한 밤이었다.
기도터는 결국, 영적 치유의 공간이다. 신과의 교감, 나와의 대면, 그리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장소다. 단순히 소원을 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완전히 비우고 새로 채우는 순환의 공간이다. 무속인은 이 기도터에서 얻은 맑은 기운으로 신도들에게 위안을 주고, 또 다른 누군가의 삶을 도우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모든 여정의 중심에는, 언제나 기도와 정성이 있다.
신과 인간의 경계를 오가며
무속인의 삶은 늘 경계 위에 있다. 인간의 삶을 살면서도, 신의 뜻을 전달해야 하는 운명을 짊어진다. 그 시작이 삼산돌기라면, 그 지속은 끊임없는 기도와 수행이다. 무당의 일은 굿만이 아니다. 기도터에서 홀로, 혹은 제자와 함께 정성을 다해 신과 마주 앉는 시간들. 이 시간이 쌓여야 비로소 한 사람의 무속인이 완성된다.
무속은 가르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며 체득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속인은 늘 발로 기도터를 찾는다. 몸이 힘들어도, 시간이 없어도, 기도터에 다녀와야만 마음이 놓인다. 기도를 하러 간다는 건, 누군가를 대신해 아픔을 안고 간다는 뜻이다. 그 정성과 수고는 기도를 받는 신도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무속인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듬고, 결국 더 넓은 세상과 마주하게 된다. 무속은 결코 비밀스럽고 은밀한 세계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삶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그 아픔을 함께 껴안는 매우 인간적인 영역이다.
이제 우리는 삼산돌기와 기도터를 통해 무속이라는 세계를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단지 신과 소통하는 기술이 아니라, 사람과 삶을 다루는 진심의 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