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선 산후(産後)음식 – 죽은 낙엽도 살려내는 정월 보름 나물

Picture of 임영
임영

채식 민족과 나물요리
한식요리를 하다 보면 우리 민족이 채식 민족이라는 걸 느낀다. 육식 요리의 가짓수는 단순하지만 채식의 종류는 다양하기 때문이다.
세상이 글로벌화되고, 지구도 좁다는 생각이 드는 세상에 한식에 대한 관심도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주변에 외국인도 많고 한국 음식도 많이 알려졌지만 한국을 상징하는 대표음식하면 딱히 이거다 하고 얘기하기는 좀 난처하다.
김치, 불고기, 잡채 …….
정말 그것 뿐일까?
한국인의 참 정서와 문화를 대표하는 것은 <나물>이라고 생각한다.
젊은 층 사이에서는 샐러드가 대세이긴 하지만 번거로움 때문이지 한국인의 입맛에는 샐러드보다는 역시 나물이다. 또한 맵콤하고 개운한 겉절이가 더 입맛에 맞는다.

산모의 변비 고통에서 해방되는 나물요리
출산 후 갑작스런 식습관의 변화로 대개 변비에 시달리게 된다. 유산균제나 요거트 등 보조식품도 먹지만 음식으로 다스리는 게 가장 무리가 없다.
변비에 가장 좋은 음식은 역시 섬유질이 풍부한 나물이다. 본인의 경험으로도 약간 변비 증상이 올라치면 갖은 나물에 쓱쓱 비벼서 비빔밥 한 그릇 먹고 나면 정상 배변으로 돌아오곤 한다. 배불리 나물 한그릇 먹고 나면 뿌듯한 포만감과 배변 후 느끼는 상쾌함이란 장 청소를 한 것 같은 후련함을 느낀다. 여기 곁들여 속이 편안하고, 장 활동도 도와 주는 된장국과 곁들이면 환상의 파트너라고나 할까?

겨울 산모에게 좋은 오곡밥(또는 오곡죽)과 아홉가지 나물
어릴 적에는 사실 거친 야채보다는 생선이나, 고기, 달걀찜, 이런 게 좋았다. 그래도 유독 나물이 맛있었던 때가 있었는데 정월 대보름에 먹는 오곡밥과 아홉가지 나물이었다.
늘 먹는 나물인데 왜 정월 대보름에 먹는 나물은 더 맛있었을까?
지금도 그때 먹었던 호박 오가리 나물, 피마자 나물 등 맛있었던 얘기를 하며 정월 보름을 기다린다.
밥은 다섯가지 곡식을 넣은 오곡밥을 먹어야 하고, 나물은 아홉가지 나물을 먹어야 한 해를 탈없이 보낸다는 마치 엄마의 주술과도 같은 나물이었다.
지금 와서 영양학적으로 생각해 봐도 참 지혜로운 식단이었다. 야채가 없던 긴긴 겨울에 섬유질, 무기질, 비타민을 보충하기 위한 최선의 식단이었던 것 같다.
긴 겨울의 정점에서 허해진 몸에 골고루 부족한 영양을 보충하며 봄을 기다린다.

낙엽도 살려 내는 건나물 요리
‘갈무리’ 라는 말이 있다. 가을걷이를 잘하여 마무리한다는 뜻이다. 1년 농사를 가을철에 다 마무리하여 보관하자니 얼마나 바빴을까? 이 갈무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풍성한 겨울이 되고, 안 되고가 달려 있으므로 개미와 베짱이의 삶이 결정된다고도 할 수 있다.
야채의 갈무리는 두 가지로 나뉜다.
염(소금절임, 장아찌류)과 건조(말린 채소류)다.
가을 햇볕은 따사롭지만 짧고 강렬하지 않다. 옛말에 ‘봄 볕에는 며느리를 내보내고, 가을볕에는 딸을 내보낸다’는 말이 있다. 이 볕이 가기 전에 채소류를 말린다. 애호박부터 시작해서 먹을 수 있는 모든 잎은 가을볕에 말린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씨래기, 무말랭이 나물류이다.
이 채소류가 누렇게 혹은 꺼멓게 말라서 버석버석 소리가 날라치면 어머니는 그것들을 아주 소중히 만지작거리면서 ‘아이구 잘 말랐네.’ 하시며 아주 흡족해 하셨다. 어릴 적 그걸 옆에서 지켜보던 나는 저 낙엽 같은 것을 어찌 먹겠다는지, 설마 날 먹이려는 건 아니겠지 하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소중히 벽장 안에서 잠자던 나물은 정월 대보름이 가까워지면 빛을 보게 된다. 며칠 전부터 가마솥 그득그득 나물 삶는 냄새와 귀한 나물은 먹어보라고 보내오기도 한다. 그때마다 난 속으로 결심했다. 저 누런 낙엽같은 건 절대 먹지 않겠노라고…….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보름 나물상엔 낙엽은 어디 가고 할머니 냄새가 나는 통통한 고사리와 버석버석 깡 말았던 아주까리 잎부터 다시 살아서 떡하니 밥상 위에서 웃고 있지 않는가?
난 그때 우리 어머니를 존경하게 됐다.
우리 어머니는 특별한 솜씨가 있구나 하고…….
지금도 야채, 그중 나물요리가 가장 어렵다. 나물을 끓는 물에 데쳐서, 찬물에 넣고 행구면 그 나물이 살아 있어야 한다고 말하면 모두 다 의아해 한다.
뜨거운 물에 삶았는데 어떻게 살아나요?
한식 나물의 어려움과 묘미는 바로 삶는데 있다. 우리 어머니들은 죽은 나물을 다시 살려내는 특별한 재주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드물게 노포 한식 백반집에 가서 살아 있는 건나물을 맛볼 때는 돌아가신 친정엄마가 살아온 듯 반갑다. 이 어른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이 특별한 기술을 이어 받아야 할 텐데 하는 마음이다.


오곡밥 (오곡죽) 짓기


건나물 삶기



임영

Share:

Facebook
Twit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