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과 조의선인

이 글의 목적은 동북아시아 최대 강국이었던 고구려의 조의선인(皂衣仙人) 제도와 연개소문으로 이어지는 부국강병의 근간을 살펴보고자 하는데 있다. 고구려의 중추 세력들의 활약상은 어디서부터 이어졌는가? 특히 고조선으로부터 고구려로 이어지는 교육 체계는 어떻게 이루어 졌는지? 그 의의는 무엇이었으며 고구려가 이룬 조의선인 제도가 백제, 신라의 교육 변화 경로가 조선으로 들어와 선인들이 백정(白丁)으로 추락, 오백 년 한(恨)을 쌓은 경로를 살펴본다.

동북아 최강대국 고구려
고구려가 동북아 부국강병의 최강 대국으로 장장 900여 년을 존속했던 근간은 무엇이었을까? 고구려 고분의 벽화에 새겨진 수렵, 씨름, 기마행렬에서 보 듯 패기 넘치는 문화적 특징을 가졌다. 고구려(高句麗)인들은 검소하고 무(武)를 숭상하여 말타기, 활쏘기에 능했다. 이 같은 문화적 특징은 사신도(四神圖), 고려악(高麗樂)으로 알려진 수준 높은 악곡, 천상열차분야지도와 같은 천문학, 쌍영총, 무용총, 각저총, 장군총, 고분벽화, 금속제련기술, 광개토대왕릉비와 서체, 안악궁 터, 평양성 터에서 그 찬란한 문화가 보인다.
고구려를 이처럼 최강 대국으로 이끌었던 그 저변의 힘은 바로 조의선인(皂衣仙人)이었음을 기록한 사서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BC 37년 동명원년(東明元年甲申) “당하사령(當下使令)을 일컬어 조의선인(皂衣仙人)이라 하였다. 호족(豪族) 자제들로 가려 뽑혀 섬돌아래(階下)에서 분주한 이들을 일컬어 조도(皂徒)라 하고, 역시 조의선인이라고도 일컬었다[使令於堂下者曰皂衣仙人. 取豪族子弟, 奔走於階下者曰 皂徒, 亦曰皂衣仙人].” 추모경(芻牟鏡) 기록을 참고한다면, 조의선인은 국가를 지탱하는 중추적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추모경은 高句麗의 시원과 역사를 밝혀 준 高句麗 최초의 역사서이다.
고구려 국초(國初)에 조의선인을 최초로 기록한 것으로 보아 이들의 역할이 중요한 직책으로 이미 제도화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高句麗)의 관등(官等)에 9등급이 있으며, 조의두대형(自衣頭大兄)이 조의선인이라 했다. 이들은 “기밀문서를 관장하고 정사를 모의하며, 병마를 징발하고 관원을 뽑는 일을 관장한다.”고 했다. “분주(奔走)한 이들”에서 사전적 의미는 ‘매우 바쁘게 뛰어다님’이나, 윗글에서 보듯 전시에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우는 무사집단이었고, 고구려(高句麗)가 강력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 조의선인이란 무사집단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조의선인(早衣仙人)이란 ‘검은 빛깔의 조복(早<검은 비단 조, 검을 조, 사실은 白밑에 + 또는 七임>服)을 입은 선인’이란 뜻이다. 선배 또는 선비라 불렀다.
선배는 고구려의 10월 제사에 모인 군중 앞에서 무예를 선보인데서 비롯됐고 선인(先人 또는 仙人)은 선배의 이두(吏讀)식 표기이다.
이들 조의선인의 명맥은 고구려의 명재상 명림답부(明臨答夫,129~179(신대왕 15)), 을파소(乙巴素, ?~203), 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乙支文德), 수나라 전쟁의 병마원수(兵馬元帥) 강이식(姜以式), 안시성 전투(安市城戰鬪)의 양만춘(楊萬春), 高句麗의 마지막 막리지(莫離支) 연개소문(淵蓋蘇文, ?~666(보장왕 25))이 조의선인으로 매김된 것으로 그 시원은 단군조선 이전부터 이어졌다는 기록이 단군세기(檀君世紀)에서 확인된다. 막리지(莫離支)는 고구려의 최고 관직이다. 막리지의 호칭은 수·당 이전부터 있던 것인데, 최초로 막리지가 되어 군권(軍權)과 정권(政權)을 한꺼번에 잡은 사람은 연개소문(淵蓋蘇文)이다. 막리지는 기무(機務), 조명(詔命) 뿐만 아니라 군사권까지 한 손에 쥐어 막대한 권력을 행사했으며, 어원(語源)은 확실하지가 않다.
고려사 최영전에 “당 태종이 30만의 무리로 고구려를 침노하니 고구려는 승군(僧軍) 3만 명을 내어 이를 격파하였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 승병은 바로 조의선인을 말하는 것으로 조의선인을 승, 즉 중이라 표현한 이유는 조의선인이 머리를 깎았기 때문으로 본다. 당시 고구려와 전쟁을 할 때 이들을 무섭고 두려워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조의선인군이 바로 고구려 최강의 정예부대였기 때문이다. 문무를 겸전한 조의선인들은 특수임무인 후방교란, 보급로 차단, 정탐, 적장 암살 등을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연개소문은 ‘조선역사 4천년 이래 최고의 영웅’
신채호는 ‘조선상고사 독사신론(讀史新論)’에서 연개소문에 대해 “조선 역사 4천년 이래 최고의 영웅”이라고 극찬을 한 바 있다. 또한 조선상고사는 연개소문에 대해 “구 제도를 타파하고 정권을 통일했으며 남수서진(南守西進) 정책을 세웠고 당 태종을 격파해 중국 대륙을 공격하여 당시 고구려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쟁사 속에 유일한 중심인물이었다”고 썼다. 반면 <삼국사기열전> ‘연개소문’편에는 “포악하고 잔인하여 사람들이 감히 대적하지 못했으며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세워서 스스로 막리지가 되어 국사를 전횡, 당태종이 이를 정벌했다.”라고 하여 상반되게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첫째, 고구려의 9백 년 이래의 전통이었던 호족공화제라는 구제도를 타파하여 정권을 통일했고 둘째, 장수태왕 이래 철석같이 굳어온 서수남진(西守南進) 정책을 변경하여 남수서진(南守西進) 정책을 세웠으며 셋째, 그리하여 영류태왕 이하 대신과 호족 수백 명을 도살하여 자기 집안의 독무대를 만들고 서국(西國)의 제왕인 당태종을 격파하여 중국 대륙 침략을 시도하였으니, 그 선악(善惡)과 현우(賢愚)는 별개의 문제로 하고 여하간 당시 고구리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쟁사에서 유일한 중심인물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태백일사》는 연개소문에 대해 “그가 불과 9살에 ‘조의선인’으로 선발됐다. 의표(儀表)가 웅위(雄偉)하고 의기가 호협하여 늘 병사들과 함께 섶에 누워 자고, 손수 표주박으로 물을 떠 마시며, 무리 속에 섞여 있어도 최선을 다하고, 일이 혼란하게 얽혀 있어도 미세한 것까지 분별해 내었다. 상을 줄 때는 반드시 고루 나누어주고, 정성과 믿음으로 두루 보호해 주었으며, 자기의 처지를 미루어 남의 심정을 뱃속에 걸머두는 아량을 가졌다.… 한 번 기쁨을 나타내면 신분이 낮고 미천한 사람들도 가까이 할 수 있었고, 노하면 권세 있고 부귀한 자들이 모두 두려워했다.”라 기록했다. 《태백일사》가 그리는 한 인간의 모습은 진정한 영웅의 모습이다.
《삼국사기》에는 연개소문이 황제를 잔인하게 살해했다 하나 《태백일사》에서는 황제가 몰래 송양(松壤)으로 피신했으나, 백성들이 자신에게 동조하지 않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 붕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고성제(영류왕)가 고구려의 일급비밀이라 할 수 있는 전 영토의 지도인 〈봉역도(封域圖)〉를 당에 보내자 고구려의 강성파들은 모두 분개했다.
대당 굴욕외교로 일관한 고성제에 대해 고구려의 건국이념을 되살리자는 대당강경파의 반정혁명이었다.

한문수
성균관석전교육원과 우리역사교육원에서 고대사 및 계보학을 강의 중이다. 동국대학교 행정대학원을 다녔고 신문 기자 생활을 했다. 또 기업과 기관에서 홍보담당자로 근무했다. 세계한단학회 이사, 우리문화선양회 이사, 고구려(高句麗)역사문화보존회 학술위원이다.
저서 및 주요 강의 주제는‘한국고대사의 키워드’, ‘부도지’, ‘단군세기’, ‘고려사 열전’ 역해(譯解). ‘백정 끝나지 않는 이야기들’, ‘고대사서는 불타고 있는가?’ ‘삼족오 그 찬란한 슬픔의 역사’, ‘족보와 한국인의 삶’, ‘족보 개론’ 등이 있다. 연구 논문은 ‘기자조선은 환작됐다’. ‘단군세기에 기록된 경단과 천문 역사 고찰’, ‘상고 문자학의 기원’, ‘연개소문과 조의선인(皂衣仙人)’ 등이 있다. 역사 칼럼으로는 ‘세계 최고의 잠견지 고대사서와 함께 사라지다’ 등 ‘한눌의 고대사 메모’를 연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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