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는 어느 지역의 사람일까? 신라지역의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기실 한반도의 신라가 아니라 과거 대륙의 유‧연‧제‧로‧오‧월나라 사이에 있었던 신라지역의 사람이었다. 그는 이쪽 한반도에는 오지 않았던 사로신라 사람이다. 아래 기록들을 보면 그의 활동지가 드러난다. 무작정 한반도 쪽으로 끌어오면 김유신 꼴이 난다.
장보고의 친구 정연(鄭年)이 있던 연수(漣水)는 <삼국사기>권46지역 오‧월과 유‧연‧제‧로 지역에 존재하는 신라지역이다. 원래의 장보고의 이름은 ‘궁복(弓福)’으로 전해지며,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궁파(弓巴)’라고 기록되어 있다. 장(張)이라는 성과 보고(保臯)라는 이름은 당나라로 건너간 뒤부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엔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 등 일본의 문헌에는 이름의 한자 표기가 ‘長寶高’ 혹은 ‘張寳高’로 되어 있다. 친구인 정년(鄭年)과 함께 일찍이 당나라 서주(徐州)로 건너가 무령군(武寧軍) 소장(小將)을 지냈으며, 장보고와 정년은 용맹하고 씩씩해 말을 타고 창을 쓰는 데 이들을 당할 자가 없었다고 한다.
○<張保臯>[<羅紀>作<弓福>.]․<鄭年>[<年>或作<連>.], 皆<新羅>人, 但不知鄕邑父祖. 皆善鬪戰, <年>復能沒海底, 行五十里不噎, 角其勇壯, <保臯>差不及也, <年>以兄呼<保臯>. <保臯>以齒, <年>以藝, 常齟齬不相下. 二人如<唐>, 爲武寧軍小將, 騎而用槍, 無能敵者. 後, <保臯>還國, 謁大王曰: “遍<中國>, 以吾人爲奴婢, 願得鎭<淸海>, 使賊不得掠人西去.” <淸海>, <新羅>海路之要, 今謂之<莞島>. 大王與<保臯>萬人, 此後, 海上無鬻鄕人者. <保臯>旣貴, <年>去職饑寒, 在<泗>之漣水縣. 一日, 言於戍將<馮元規>曰: “我欲東歸, 乞食於<張保臯>.” <元規>曰: “若與<保臯>所負如何, 奈何去取死其手?” <年>曰: “饑寒死, 不如兵死快, 況死故鄕耶.” 遂去謁, <保臯>飮之極歡. 飮未卒, 聞王弑國亂無主, <保臯>分兵五千人與<年>, 持<年>手泣曰: “非子不能平禍難.” <年>入國, 誅叛者立王, 王召<保臯>爲相, 以<年>代守<淸海>.[此與<新羅>傳記頗異, 以<杜牧>言傳, 故兩存之.]
(<신라 본기>에는 궁복으로 되어 있다)와 정년[년(年)은 연(連)으로도 쓴다]은 모두 신라인이다. 그들의 고향과 조상은 알 수 없다. 두 사람은 모두 전투를 잘했으며, 정년은 또한 바닷물 밑으로 들어가 50리를 잠수하여 다녀도 숨이 차지 않았다. 그 용맹과 씩씩함을 비교하면 장보고가 정연에게 약간 모자랐으나 연은 보고를 형으로 불렀다. 그러나 보고는 나이로, 연은 기예로 항상 맞수가 되어 서로 지려고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당나라에 가서 무녕군 소장으로 있을 때, 말을 달리며 창을 쓰는 데 있어서 대적할 자가 없었다.
그 뒤에 보고가 귀국하여 대왕에게 말했다. “중국을 두루 돌아다녀 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을 노비로 삼고 있었습니다. 청해에 진영을 설치하여 해적들이 사람들을 약취하여 서쪽으로 데려가지 못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청해는 신라 해로의 요충지로서 지금은 완도(莞島)라고 부른다. 대왕이 보고에게 군사 1만 명을 주어 청해에 진영을 설치케 하니, 이 뒤로는 바다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을 노비로 파는 자가 없어졌다. 보고는 이미 귀한 자리에 올랐으나, 년은 직업을 잃고 굶주림 속에서 사수의 연수현에서 살았다. 하루는 수비하는 장수 풍 원규에게 말하기를 “내가 동쪽으로 돌아가서 장보고에게 걸식하려 한다” 하니 원규가 말하기를 “그대와 장보고의 사이가 어떠한가? 어찌하여 그곳에 가서 그의 손에 죽으려 하는가?”라고 하였다. 년이 말하기를 “배고픔으로 죽는 것은 싸우다가 죽는 것만큼 통쾌하지 못하다. 더구나 고향에서 죽으니 좋은 일이 아닌가?”라 하고 드디어 그곳을 떠나 장보고를 만났다.
그가 보고와 함께 술을 마시면서 마음껏 즐기는데 술자리가 끝나기 전에 왕이 시해되고 나라가 어지러워져서 임금이 없다는 소문이 들렸다. 보고가 군사 5천 명을 나누어 연에게 주면서 그의 손을 잡고 울면서 말했다. “그대가 아니면 나라의 화란을 평정할 수 없다.” 연이 국도에 들어가 배반한 자를 죽이고 왕을 세웠다. 왕은 장보고를 불러 재상으로 삼고, 연으로 하여금 보고를 대신하여 청해를 지키게 했다.
오학림(삼국사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