층층나무의 전설과 옥관자 바위

남지 개비리길에서 만난 전설

신화가 되기에는 아직 세월이 짧은 이야기가 전설이다. 하지만 전설이 굉장히 구체적이다. 강 건너 의령에 살던 재령 이씨(李氏) 한 집안이 1940년 경 낙동강 건너 강변에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남지 개비리길 외딴집이었는데 강에 임한 마분산 낭떠러지 길 두어 모퉁이를 돌아서면 이곳에서 농사일을 하거나 물고기를 잡아서 시장에 팔아 춘궁기(春窮期)를 면했지만 워낙 산골이라 여러 가지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 때마다 재령이씨 댁 할머니(창원황씨-昌原黃氏)는 북풍한설 몰아치는 꼭두새벽에 매일같이 찬물에 목욕한 후, 봉황의 알 모양을 닮은 옥관자(玉貫子) 바위 앞에 맑은 정화수 한 그릇을 떠놓고 가정의 무사안녕을 기원했다. 100일 째 되는 날, 날이 샐 무렵에 강 안개에 싸여 나타난 백발에 긴 수염을 한 산신령이 할머니 꿈에 나타나서 나무 한 그루를 점지해 주고 유유히 사라졌다. 꿈에서 깨어난 할머니는 곧장 그곳으로 가 보니 나무껍질에서 광택이 나는 한 그루 나무가 있었다. 할머니는 그 날부터 산신령이 점지해 준 그 층층나무에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얼마 되지 않아 아들이 관직에 입문하게 됐고, 관재 구설 하나 없이 고을 원(남지읍)까지 올라 층층나무는 영험하기로 유명해졌다. 그 후 층층나무는 남지읍 곳곳에 심었으며, 층층나무를 집에 심어두면 관직과 직장에 있는 사람은 막힘이 없이 관직의 층계 층계를 거쳐서 오르게 된다는 믿음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러다 황 씨 할머니가 기도드렸던 옥관자 바위도 어느 순간 사라져서 잊혔다가 2018년 인근 수로공사 현장에서 다시 발견하게 됐다. 지금 조성한 자리가 원래 자리는 아닌 듯 하고, 재령 이 씨 댁 할머니의 뜻을 기리고자 지금의 자리, 층층나무 아래에 옮겨놓은 것이라고 한다.

전설의 자식들
참 신기하죠. 재령 이씨가 외갓집이고 창원 황씨가 외할머니. 외삼촌이 고을 원(남지 읍장, 이병화)이 됐고 지금 살아계신 엄마(이병두, 90)가 그곳 개비리길 외딴집에서 살다가 21살에 우리 동네(도천면)로 시집와서 현재도 살고 있다. 내가 어릴 적에 그곳 외가 나들이를 했는데 벼랑길이 무서워 엉금엉금 기어서 바위언덕을 오르던 생각이 까마득하다. 나의 모습을 본 엄마는 얼마나 애가 탓을까. 동네 앞 십자 둑이란 정류소에 나가서 간간이 오는 시골버스를 타고 10리길 가면 남지 읍내에 내린다. 그리고 그곳에서 걸어 10여리길 용산마을로 가서도 끝이 아니었다. 알개실이라고 불리던 그 마을 앞에 남강과 낙동강이 서로 만나서 부산 을숙도로 흘러가는 강이 있다. 만나는 그곳을 기음강이라고 부르는데 어머니는 걸음강 그리고 의령으로 가는 걸음강 나루라고 부르기도 한다. 의령서 이곳 개비리로 이사를 했기에 강은 건너지 않고 강가에 연한 몇 개의 산모렝이를 돌아 개비리길 중간 정도에 있는 지금의 옹달샘 쉼터쯤에 있었던 외딴 외가까지 가야 했으니 외가 가는 길이 꼬박 하루가 걸린 시간이었으리라.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옛날 시집살이가 심해 친정에 좀체 보내주지 않았는데 친정 나들이가 얼마나 가볍고 즐거웠을까? 강물 따라 산길 따라 구비가 많은 개비리길이라 모롱이 공터에 외딴집이긴 했으나 두어 구비 돌면 또 그곳에서도 외딴집이 있었고 한 두어째가 더 있었다고는 했다. 당시 남지 장날이면 이곳 개비리길은 북적거려 복잡했다고 어머니는 당시를 회상했다. 어느 날에는 도둑이 들었다는 이야기도 했다. 외가가 이곳에 정착한 계기는 워낙 먹을 게 귀하던 시절이라 강 건너 의령 덤실이라는 곳에 사시던 외할아버지(이성호)가 처가 곳인 영아지 황 씨 집안의 배려로 이곳에 옮겨오게 된 것이다, 개비리 중간 쯤 외딴 집을 짓고 황 씨네 산을 관리하고 농토를 개관하고 강가 쪽으로 넓은 공지가 있어 이를 이용하면서 강가에서 고기도 잡았으리라.
하지만 이젠 외조부들은 모두 돌아가셨고 남지 읍장을 했던 외삼촌도 돌아가셨고 외숙모만 살아 있고 어머니와 여형제 셋만 생존해 있다.
그런 길을 따라서 청아지, 영아지, 고곡 등지의 많은 사람들이 당시 60, 70년 전만해도 남지 장에 볼일 보러 가려면 먼 길을 둘러야 하는데 이 지름길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아 장날이면 복잡할 정도였다고 이곳 벼랑길 모롱이에 집을 짓고 살았던 이병두(90) 씨는 회고 했다.
옛날 이곳 주민들이 남지 장에 가기 위해서 이용했던 길이고, 서울로 가려면 반드시 이 길을 통과해야 했기에 ‘서울나들이길’이라고도 했다.
나는 학교에 들어가기 전 아릴 적에 어머니와 함께 외가에 갔을 때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산 모렝이를 돌아가면서 안쪽으로 들어간 곳에 널찍한 공간이 드러났고 외딴집이 외가였다. 집가에 감나무가 있었던 기억이 나고 계곡사이로 흘러내리는 옹달샘 물을 이용했고 그 계곡을 따라 강가로 내려가면 작은 모래밭이 있었다. 그곳엔 작은 나무배가 한 척 묶여져 있었다. 당시 어린 외사촌 누이가 그 배의 난간 위를 뜀박질로 돌던 모습 아찔한 생각이 나고 어린 나와 외사촌 동생이 배안에서 마음 졸이고 지켜보던 생각이 난다.


엄마가 나의 태몽을 이야기 해 주신다.
68년이나 지난 꿈 이야기다. 개비리길에 큰 바위가 있었는데 촛불을 켜고 물을 떠 놓고 공을 들이는데 앞 강물에서 큰 용이 한 마리 앞으로 기어오는데 겁도 안내고 그냥 그 자리에 서있었는데 왔다가 갔다고 한다. 지금 어느 바윈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 예부터 공을 들이는 바위였을 것이고 공룡발자국이 있는 너럽바위 쯤이나 아니면 외할머니가 공을 들이던 옥관자 바위인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하긴 암벽으로 된 강가의 깎아지른 바위가 신령스런 곳은 많았으리라 본다. 하긴 영아지 앞에는 용전이라고 용이 살았다가 떠났다는 전설을 갖고 있던 곳이다.
실제 했던 이야기인데 벌써 전설거리가 됐다니 기분이 묘했다. 내가 아는 이야기가 더 많은데 내가 전설의 자식이 됐다.

회락재(匯洛齋)는 어디가고
대가 빽빽하게 심겨져 있는 대나무 쉼터 이곳은 원래 여양 진씨의 재실이었던 회락재(匯洛齋)가 있던 자리였다. 강줄기의 꺾임을 앞두고 두 강물이 만나서 휘도는 강 물살이 돌아 모이고 혹은 물 합할 회(匯)자를 사용해서 만든 재실이었다. 그 낭떠러지 아래 낙동강이 꺾이면서 진주에서 흘러 온 남강과 합수가 되면서 물이 뒤엉켜 빙그르르 돌면서 호수를 이루고 깊이를 알수 없는 물소리를 낸다고 했다. 개비리길에 회락재가 있었던 곳이었다. 강물소리보다 바람에 나부끼는 댓잎 소리만 가득한 곳이 됐다. 이곳에서 회(匯)자를 만나 한참이나 머물다가 왔다. 천리를 넘게 흘러온 낙동강과 진주에서 흘러온 남강이 합치는 곳 물결이 돌아 모이는 곳, 하루에도 몇번씩 강을 건너다녔을 나룻배와 나루터의 옛 모습이 내 속으로 들어와 출렁거렸다. 남지읍에서 의령, 합천군을 연결 유일한 지름길이 회락재를 지나서 가는 개비리길이었는데, 대한암흑기를 거치면서 신작로가 따로 생겨 개비리길은 방치된 채 60여 년의 세월이 흘러 대숲으로 변모했다. 그 후 2015년에 낙동강 남지 개비리길 조성사업이 시행되면서 풍상에 침식되어 귀곡산장(鬼哭山莊)으로 변한 회락재를 철거하고 대숲을 정비하여 죽림쉼터로 새롭게 조성한 것이다. 상식적으로 이곳을 문화재 차원으로 접근했다면, 당연히 회락재를 복원하는 것이 맞다. 낙동강변을 따라 넓은 둔치가 형성돼 있고 갈대들이 바람과 출렁이고 있다.

남지개비리길
명승 창녕 남지 개비리는 경상남도 창녕군 남지읍 용산리에서 영아지를 잇는 낙동강 변의 벼랑길이다. 총 길이는 2.7km이고, 이곳의 명칭인 ‘개비리’는 물가를 뜻하는 ‘개’와 벼랑을 뜻하는 ‘비리’라는 방언의 합성어다. 개비리길은 강가 산기슭로 난 좁은 벼랑길이다. 소위말해서 지름길 개념에서 유래했다. 창녕 남지 개비리는 대동여지도 등 여러 조선시대 고지도에 기록이 남아있어 길의 존재와 경로를 확인 할 수 있으며, 낙동강 변의 길을 따라 팽나무, 소나무, 상수리나무 대나무 등이 울창하게 우거져있다.
대한암흑기에 창녕 남지 개비리의 남단이 상당 부분 멸실됐고, 최근 탐방로로 정비하는 과정에서 옛길 본래의 모습 일부가 훼손됐다. 벼랑길을 걸으며 조망되는 낙동강의 모습이 아름답고 조선시대 옛길이라는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21년 12월 8일 명승으로 지정됐다.

Share:

Facebook
Twit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