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 154권, 지리지 평안도 평양부

본래 삼조선(三朝鮮)의 구도(舊都)이다. 당요(唐堯) 무진년에 신인(神人)이 박달나무 아래에 내려오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세워 임금을 삼아 평양에 도읍하고, 이름을 단군(檀君)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전조선(前朝鮮)이요,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이기고 기자(箕子)를 이 땅에 봉하였으니, 이것이 후조선(後朝鮮)이며, 그의 41대 손(孫) 준(準) 때에 이르러,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망명(亡命)하여 무리 천여 명을 모아 가지고 와서 준(準)의 땅을 빼앗아 왕검성(王儉城) (곧 평양부(平壤府)이다) 에 도읍하니, 이것이 위만 조선(衛滿朝鮮)이었다. 그 손자 우거(右渠)가 〈한나라의〉 조명(詔命)을 잘 받들지 아니하매, 한나라 무제(武帝) 원봉(元封) 2년에 장수를 보내어 이를 쳐서, 진번(眞蕃) · 임둔(臨屯) · 낙랑(樂浪) · 현도(玄菟)의 4군(郡)으로 정하여 유주(幽州)에 예속시켰다. 반고(班固)의 《전한서(前漢書)》에 이르기를, “현토와 낙랑은 본래 기자(箕子)를 봉한 곳인데, 소제(昭帝) 시원(始元) 원년에 임둔 · 낙랑으로써 동부 도호(東府都護)를 설치하였다.” 하였고, 《당서(唐書)》에 이르기를, “변한(卞韓)은 낙랑 땅에 있다.” 하였다. 고구려 장수왕 15년 정미 (유송(劉宋) 태종(太宗) 원가(元嘉) 4년) 에 국내성(國內城)으로부터 평양으로 이도(移都)하였는데, 보장왕(寶藏王) 27년 무진 (총장(摠章) 원년) 에 당나라 고종(高宗)이 장수 이적(李勣)을 보내어 왕을 사로잡아 돌아가니, 나라가 멸망되고 신라에 통합되었다. 고려 태조 원년 무인 (양(梁)나라 말제(末帝) 정명(貞明) 4년) 에 평양이 황폐되어 있으므로, 염주(鹽州) · 배주(白州) · 황주(黃州) · 해주(海州) · 봉주(鳳州) 등 여러 고을 백성들을 옮겨서 그 땅을 실(實)하게 하여 대도독부(大都督府)를 삼았는데, 광종(光宗) 11년 경신 (송나라 태조(太祖) 건륭(建隆) 원년) 에 서도(西都)로 고치고, 목종(穆宗) 원년 무술 (송나라 진종(眞宗) 함평(咸平) 원년) 에 또 호경(鎬京)으로 고쳤다가, 문종(文宗) 16년 임인 (송나라 인종(仁宗) 가우(嘉祐) 7년. ) 서경 유수관(西京留守官)으로 고쳐서 경기(京畿)의 4도(道)를 두었고, 숙종(肅宗) 7년 임오 (송나라 휘종(徽宗) 숭녕(崇寧) 원년) 에 문무반(文武班) 및 오부(五部)를 두었다. 인종(仁宗) 13년 을묘 (송나라 고종(高宗) 소흥(紹興) 원년) 에 서경(西京)의 중[僧] 묘청(妙淸)과 유참(柳旵) 및 분사 시랑(分司侍郞) 조광(趙匡) 등이 모반(謀叛)하여, 군사를 보내어 절령도(岊嶺道)를 끊고 국호(國號)를 대위(大爲), 연호(年號)를 천개(天開)라 하며, 모든 관료(官僚)를 두고, 그 군사를 ‘천견충의(天遣忠義)’라 하니, 이에 원수(元帥) 김부식(金富軾) 등을 명하여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가서 이를 토평(討平)하고, 유수(留守) · 감군(監軍) · 분사(分司) · 어사(御史)를 제외한 모든 관반(官班)을 없애고, 또 경기(京畿)의 4도(道)를 삭제하였다. 원종(元宗) 10년 기사 (송나라 도종(度宗) 함순(咸淳) 5년) 에 서북면 병마사 영기관(西北面兵馬使營記官) 최탄(崔坦)과 삼화 교위(三和校尉) 이연령(李延齡) 등이 난(亂)을 일으키어 서경(西京) 및 여러 성(城)을 가지고 몽고(蒙古)에 붙으니, 원(元)나라에서 서경을 동녕부(東寧府)로 삼아 관리를 두었다가, 충렬왕(忠烈王) 16년 경인 (원나라 지원(至元) 27년) 에 원나라에서 서경과 여러 성(城)을 도로 우리 나라에 돌려주었으므로, 다시 서경 유수관(西京留守官)으로 삼았다. 공민왕(恭愍王) 18년 기유 (명나라 태조(太祖) 홍무(洪武) 2년) 에 만호부(萬戶府)를 서경에 두고, 좌익(左翼) · 우익(右翼) · 전군(前軍) · 후군(後軍) · 정예(精銳) · 정의(精毅) · 충의(忠義) · 충성(忠誠) · 신첨(新僉) · 신성(新成) 등 10군(軍)을 두어, 각기 상 · 부천호(上副千戶)를 두었다가, 뒤에 평양부로 고쳤다.

명산(名山)은 금수산(錦繡山)과 (부(府) 북쪽에 있는데, 고을 사람들이 진산(鎭山)이라 일컫는다. ) 대성산(大城山)이다. (부(府) 북쪽에 있는데, 혹은 구룡산(九龍山), 혹은 노양산(魯陽山)이라고도 한다. 예전에는 산정(山頂)에 99개의 못[池]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다만 3개의 못이 있는데, 가뭄을 만나면 비를 빈다. 2개의 못에는 순채(蓴菜)가 있다. ) 대천(大川)은 대동강(大同江) (부(府) 동쪽에 있다. ) 과 상갑신소(上甲神所) (부(府)의 성내(城內) 관풍전(觀風殿) 북쪽 춘양대(春陽臺)에 있다. ) · 진명소(津溟所) (부성(府城) 동쪽 대동문(大同門) 밖의 강변(江邊) 덕암(德岩)에 있다. ) · 진분소(津墳所) (부(府) 동쪽 대동강 가의 술당(述堂)에 있다. ) · 진연소(津衍所) (부(府)의 북쪽 장수역(長壽驛)에 있다. ) · 진연소(津淵所)이다. (부(府) 동쪽 추오말리(推吾末里)에 있다. 위의 5소(所)는 모두 소재관(所在官)이 제사지낸다. )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상원(祥原)에 이르기 31리, 서쪽으로 강서(江西)에 이르기 42리, 남쪽으로 중화(中和)에 이르기 25리, 북쪽으로 순안(順安)에 이르기 31리이다.

태조 진전(太祖眞殿) (의리방(義理坊)에 있는데, 토관(土官)의 서반(西班) 각품(各品)으로써 시위 직숙(侍衛直宿)하게 하고, 유명일(有名日)에는 별제(別祭)를 지낸다. ) 문묘(文廟).

호수가 8천 1백 25호, 인구가 1만 4천 4백 40명이며,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7백 36명, 익군(翼軍)이 2천 9백 51명, 선군(船軍)이 4백 37명, 수성군(守城軍)이 1백 45명이다. 인물(人物)은 영도첨의부사(領都僉議府事) 평양군(平壤君) 정숙공(貞肅公) 조인규(趙仁規) (고려 충렬왕 때 사람. ) 와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평양 부원군(平壤府院君) 문충공(文忠公) 조준(趙浚)이다. (인규(仁規)의 증손(曾孫)인데, 개국 원훈(開國元勳)으로 태조 묘정(太祖廟庭)에 배향되었다. )

땅의 기름진 것이 적고 메마른 것이 많으며, 기후가 매우 차다. 간전(墾田)은 4만 8천 1백 60결(結)이다. (논이 8분의 1이 넘는다. ) 토의(土宜)는 기장 · 피 · 보리 뽕나무 · 삼[麻] · 왕골[莞] · 닥나무 · 배[梨]이요, 토공(土貢)은 옻 · 족제비털 · 표범가죽 · 여우가죽 · 삵가죽이며, 약재(藥材)는 속서근풀[黃芩] · 겨우살이풀[麥門冬] · 흰바곳[白附子]이다. 염소(鹽所)가 2곳이다. (가마[盆]가 모두 18인데, 모두 부(府) 서쪽에 있다. ) 읍 석성(邑石城) (둘레가 4천 88보(步)인데, 본조(本朝) 태종(太宗) 9년 을축에 수축(修築)하였다. 옛 성터가 둘이 있으니, 하나는 기자(箕子) 때 쌓은 것으로, 둘레가 6천 7백 67보이며, 성안[城內]을 구획(區劃)하여 팔가동정(八家同井)하게 하였다. 하나는 고려 성종(成宗) 때 쌓은 것인데, 지름이 9백 44보이다. ) 관(館)이 1이니, 대동(大同)이다. (부성(府城) 가운데 있다. ) 기자묘(箕子廟)가 부성(府城) 북쪽 토산(兎山) 위에 있는데, 정자각(亭子閣) · 석인(石人) · 석양(石羊)이 모두 남쪽을 향하였으며, 사당(祠堂)은 성안 의리방(義理坊)에 있다. (봄 · 가을에 향축(香祝)을 전하여 제사를 지낸다. 금상(今上) 12년 경술에 유사(有司)에 전지(傳旨)하기를, “예전에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이기고, 은나라 태사(太師)를 우리 나라에 봉한 것과 그가 신하노릇하지 아니할 뜻을 이루게 한 것이다. 우리 나라의 문물 예악(文物禮樂)이 중국과 같은 것은 오직 기자의 가르침에 힘입은 까닭이니, 비석을 사당에 세우라.” 하였다. ) 단군 사당(檀君祠堂)은 기자의 사당 남쪽에 있고, (금상(今上) 11년 기유에 비로소 사당을 세우고 고구려 시조(始祖) 동명왕(東明王)을 합사(合祠)하였는데, 단군이 서쪽에, 동명이 동쪽에 있게 하여 모두 남향(南向)하게 하였다. 봄 · 가을마다 향축(香祝)을 내리어 제사를 지낸다. ) 동명왕 묘(東明王墓)가 부(府) 동남쪽[巽方] 30리쯤 되는 중화(中和) 지경 용산(龍山)에 있다. (모두 화반석(畫班石)으로 광(壙)을 영조(營造)하였다. 세상에서 이르기를, “진주묘(眞珠墓)”라 한다. 이승휴(李承休)가 동명왕의 사적(事跡)을 기록하기를, “하늘에 올라서 다시 운병(雲輧)에 돌아오지 아니하고, 장사지내는 데 옥편(玉鞭)을 더하여 무덤을 이루었다.” 한 것은 곧 이것이다. 또 인리방(仁理坊)에 사당이 있는데, 고려에서 때로 어압(御押)을 내리어 제사를 지내고, 초하루 · 보름에도 또한 그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제사지내게 하였다. 읍인(邑人)들이 지금도 일이 있으면 문득 비는데, 고로(古老)들이 전하기를, “동명 성제(東明聖帝)의 사당이라.” 한다. ) 을밀대(乙密臺)는 곧 금수산(錦繡山) 꼭대기에 있는데, 평탄하고 훤칠하다. 대(臺) 아래 층안(層岸) 위에 누(樓)가 있으니, 이름을 부벽루(浮碧樓)라 하는데, 보이는 경치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옆에 영명사(永明寺)가 있으니, 곧 동명왕의 구제궁(九梯宮)이다. 안에 기린(麒麟)을 기르던 굴(窟)이 있는데, 후인(後人)이 비석을 세워서 그 사실을 기록하였다. 굴(窟) 남쪽 백은탄(白銀灘)에 바위가 있는데, 밀물에는 묻히고 썰물에는 드러난다. 이름을 조천석(朝天石)이라 한다. 민간에서 전하기를, “동명왕이 기린을 타고 굴 속에서 나와 조천석에 올라서 천상(天上)에 주사(奏事)하였다.” 한다. 이승휴(李承休)가 이르기를, “천상(天上)을 오가며 천정(天政)에 나아가니, 조천석 위에 기린이 날쌔도다.”한 것은 곧 이를 말한 것이다. 굴 북쪽에 춘양대(春陽臺)가 있는데, 우뚝 솟아서 서쪽으로 관풍대(觀風臺) 터와 서로 마주 서 있으며, 서남쪽[坤方]에 누각 터[樓基]가 있으니, 이름을 다경(多景)이라 한다. 경치가 부벽루와 더불어 서로 갑을(甲乙)을 다툰다. 서쪽[兌方]에 높은 언덕이 있으니, 이름을 봉황대(鳳凰臺)라 한다. 민간에서 전하기를, “봉황이 와서 울었으므로, 이름을 봉황대라고 하였다.”고 한다. 성안[城內]에 9개의 묘(廟)와 9개의 못[池]이 있으니, 9묘(廟)는 곧 9개의 별[九曜]325)이 날아 들어온 곳이며, 그 못 옆에 첨성대(瞻星臺)가 있다. 봉화(烽火)가 4곳이니, 빈당점(賓堂岾) (남쪽으로 화사(畫寺)에, 북쪽으로 잡약산(雜藥山)에 응한다. ) · 잡약산(雜藥山) (북쪽으로 부이산(斧耳山)에 응한다. ) · 부이산(斧耳山) (북쪽으로 순안(順安) 독자산(獨子山)에 응한다. ) · 화사(畫寺) (남쪽으로 중화(中和) 신주원(神主院)에 응한다. ) · 수로불곡(水路佛谷) (남쪽으로 증산(甑山) 탄곶입소(炭串立所)에, 서북쪽으로 영유(永柔) 활곡입소(闊谷立所)에 응한다. ) 이다. 영명사(永明寺) (교종(敎宗)에 붙이고 밭 1백 50결을 주었다. )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靈異]. 《단군고기(檀君古記)》에 이르기를, “상제(上帝) 환인(桓因)이 서자(庶子)가 있으니, 이름이 웅(雄)인데, 세상에 내려가서 사람이 되고자 하여 천부인(天符印) 3개를 받아 가지고 태백산(太白山)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강림하였으니, 이가 곧 단웅천왕(檀雄天王)이 되었다. 손녀(孫女)로 하여금 약(藥)을 마시고 인신(人身)이 되게 하여, 단수(檀樹)의 신(神)과 더불어 혼인해서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단군(檀君)이다.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하니, 조선(朝鮮),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 · 북 옥저(南北沃沮), 동 · 북 부여(東北扶餘), 예(濊)와 맥(貊)이 모두 단군의 다스림이 되었다. 단군이 비서갑(非西岬) 하백(河伯)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으니, 부루(夫婁)이다. 이를 곧 동부여(東扶餘) 왕(王)이라고 이른다. 단군이 당요(唐堯)와 더불어 같은 날에 임금이 되고, 우(禹)가 도산(塗山)의 모임을 당하여, 태자(太子) 부루(夫婁)를 보내어 조회하게 하였다. 나라를 누린 지 1천 38년 만인 은(殷)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에 아사달(阿斯達)에 들어가 신(神)이 되니, 지금의 문화현(文化縣) 구월산(九月山)이다. 부루가 아들이 없어서 금색 와형아(金色蛙形兒)를 얻어 기르니, 이름을 금와(金蛙)라 하고, 세워서 태자(太子)를 삼았다. 그 정승 아란불(阿蘭弗)이 아뢰기를, “일전에 하느님이 나에게 강림하여 말하기를, ‘장차 내 자손으로 하여금 여기에다 나라를 세우도록 할 것이니 너는 다른 곳으로 피하라. 동해(東海) 가에 땅이 있는데, 이름은 가섭원(迦葉原)이며, 토질이 오곡(五穀)에 적당하여 도읍할 만하다. ’고 하였습니다.” 하고, 이에 왕을 권하여 옮겨 도읍하였다. 천제(天帝)가 태자를 보내어 부여(扶餘) 고도(古都)에 내리어 놀게 하니, 이름이 해모수(海慕漱)이다. 〈해모수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데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종자(從者) 1백여 인은 모두 백곡(白鵠)을 탔는데, 채색 구름이 그 위에 뜨고, 음악소리가 구름 가운데에서 울렸다. 웅심산(熊心山)에서 머물러 10여 일을 지내고 비로소 내려왔다. 머리에는 오우(烏羽)의 관(冠)을 쓰고, 허리에는 용광검(龍光劍)을 찼는데, 아침이면 일을 보고, 저녁이면 하늘로 올라가니, 세상에서 이르기를, ‘천왕랑(天王郞)’이라 하였다. 성(城) 북쪽 청하(靑河)의 하백(河伯)이 세 딸이 있으니, 큰딸이 유화(柳花), 둘째딸이 훤화(萱花), 막내딸이 위화(葦花)인데, 자태가 곱고 아름다왔다. 세 딸이 웅심연(熊心淵) 위에 가서 노는데, (청하(靑河)는 곧 지금의 압록강(鴨綠江)이다. ) 왕이 좌우(左右)에게 이르기를, “저 여자를 얻어서 비(妃)를 삼으면, 가히 자손을 두리라.” 하니, 그 딸들이 왕을 보자 곧 물로 들어갔다. 좌우가 말하기를, “대왕은 어찌하여 궁전(宮殿)을 지어, 저 여자를 맞아 방[室]에 들이고 문[戶]을 꼭 닫지 아니합니까.” 하니, 왕이 옳게 여기어 말채찍[馬鞭]으로 땅을 그으니, 동실(銅室)이 잠깐 사이에 이루어졌다. 방 가운데에 세 자리[席]를 베풀고 잔과 술을 두었더니, 그 여자들이 서로 권하여 크게 취하였다. 왕이 나아가 붙드니, 그 여자들이 놀라서 달아났는데, 유화(柳花)가 왕에게 잡히었다. 하백이 크게 노하여 사신을 보내어 고(告)하기를, “너는 어떤 사람이기에 내 딸을 붙잡아 두느냐.” 하니, 왕이 대답하기를,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인데, 이제 하백과 결혼하고자 하노라.” 하매, 하백이 또 사신을 보내어 고하기를, “네가 만일 구혼(求婚)하려거든 마땅히 매파를 보낼 것이지, 이제 덮어놓고 내 딸을 붙잡아 두니, 어찌 그리 예를 모르느냐.” 하였다. 왕이 부끄러워서 장차 하백을 가 보려고 하나 〈하백의〉 방에 들어갈 수가 없고, 또 그 딸을 놓아주려고 하나, 그 딸이 이미 왕과 더불어 정(情)을 통하였는지라, 떠나려 들지 아니하고 왕을 권하기를, “만일 용거(龍車)가 있으면 하백의 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하니, 왕이 하늘을 가리키며 고하매, 조금 있더니 오룡거(五龍車)가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왕이 그 여자와 함께 수레를 타니, 풍운(風雲)이 갑자기 일어, 대번에 그 궁(宮)에 이르렀다. 하백이 예를 갖추어 맞이하여 좌정(坐定)하고 이르기를,

“혼인의 예는 천하의 통규(通規)이거늘, 어찌 이렇듯 실례(失禮)하여 나의 문종(門宗)을 욕되게 하느뇨. 왕이 천제의 아들이면 어떠한 신이(神異)함이 있느뇨.” 하니, 왕이 대답하기를, “오직 시험해 보면 알 것이오.” 하매, 이에 하백이 뜰앞의 물에서 잉어로 화하여 물결을 따라 노는지라, 왕이 물개로 화하여 잡으려 하니, 하백이 또 사슴으로 화하여 달아나므로, 왕이 승냥이로 화하여 쫓으매, 하백이 꿩으로 화하니, 왕이 매로 화하여 쫓았다. 하백이 그제서야 진실로 천제의 아들이라 생각하고 예(禮)로써 성혼(成婚)하였다. 왕이 그 딸을 거느릴 마음이 없을까 두려워하여, 풍악을 베풀고 술을 마련하여 왕에게 권해서 크게 취하게 하고, 딸과 더불어 작은 혁여(革轝) 가운데에 넣어서 용거(龍車)에 실어 승천(升天)하게 하려 하였는데, 그 수레가 물에서 나오기 전에, 왕이 곧 술이 깨어 그 딸의 황금비녀를 빼어서 혁여를 찌르고, 그 구멍으로 혼자 나와서 승천하니, 하백이 노하여 그 딸에게 이르기를, “네가 내 가르침을 좇지 아니하여 우리 가문을 욕되게 하였다.” 하고, 좌우(左右)로 하여금 그 딸의 입을 얽어 잡아당기게 하니, 그 입술이 늘어나 길이가 3척(尺)이 되매, 노비(奴婢) 2인과 함께 우발수(優渤水) 가운데로 내치었다. (곧 지금의 태백산(太白山) 남쪽이다. ) 고기잡이[漁師]가 금와(金蛙)에게 고하기를, “근래 어살[梁] 가운데 있는 고기를 훔쳐 가는 것이 있는데, 어떤 짐승인지 알지 못하겠나이다.” 하매, 왕이 곧 고기잡이로 하여금 그물로 끌어내게 하니, 그 그물이 찢어지므로, 다시 쇠그물을 만들어 끌어내니, 그제야 비로소 한 여자가 돌 위에 앉아서 끌려 나왔는데, 그 여자가 입술이 길어서 말을 하지 못하므로, 세 번 그 입술을 끊어내니, 그제야 비로소 말을 하였다. 왕이 천제(天帝)의 아들의 비(妃)임을 알고 별실(別室)에 거처하게 하였는데, 그 여인이 창 가운데로 들어오는 햇볕을 품어서 아들을 배어, 한(漢)나라 신작(神爵) 4년 계해 4월에 주몽(朱蒙)을 낳으니, 우는 소리가 매우 크고, 골표(骨表)가 영기(英奇)하였다. 처음에 왼쪽 겨드랑이로부터 큰 알을 낳았는데, 5되[升]들이만 하니, 왕이 괴상하게 여겨 말하기를, “사람이 새알을 낳았으니 상서롭지 못하다.” 하고, 말먹이는 데[馬牧]에 갖다 버리게 하였더니, 여러 말들이 밟지 아니하고, 깊은 산에 버리니, 백수(百獸)가 모두 보호하며, 구름이 낀 날에도 알 위에는 늘 일광(日光)이 있으므로, 왕이 알을 도로 갖다가 어미에게 보내어 기르게 하였다. 한 달 만에 그 알이 열리며 한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난 지 한 달도 지나지 못하여 말을 능히 하며, 어머니에게 이르기를, “파리들이 눈을 건드리어서 잘 수가 없으니, 어머니는 나를 위하여 활과 화살을 만들어 주십시오.” 하므로, 그 어머니가 갈대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주었더니, 스스로 물레[紡車] 위에 앉은 파리를 쏘아 번번이 맞히매, 민간에서 이르기를, “활 잘 쏘는 이는 주몽이다.” 하였다. 나이가 장성하매, 재능이 겸비하였다. 금와(金蛙)가 아들 7인이 있는데, 늘 주몽과 함께 사냥을 다녔다. 왕자와 종자(從者) 40여 명이 겨우 사슴 한 마리를 잡는데, 주몽은 사슴 여러 마리를 잡으니, 왕자가 이를 시기하여, 주몽을 잡아 나무에 매어 놓고 사슴을 빼앗아 갔다. 주몽이 나무를 뽑고 돌아가니, 태자가 왕에게 말하기를, “주몽은 영검하고 날랜 선비입니다. 치어다보는 것이 심상치 않사오니, 만일 일찍 도모하지 아니하면 반드시 후환이 있으리이다.” 하매, 왕이 주몽으로 하여금 말을 먹이게 하여, 그 뜻을 시험하고자 하였다. 주몽이 한(恨)을 품고 어머니에게 이르기를, “나는 천제(天帝)의 손자인데 목마(牧馬)가 되었으니, 사는 것이 죽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남쪽 땅으로 가서 나라를 세우고자 하오나,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에 감히 스스로 결단하지 못합니다.” 하니, 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이것이 내가 밤낮으로 속썩이는 바이다. 내가 들이니, 선비가 먼 길을 떠나려면 모름지기 준마(駿馬)에 의지하라 하였으니, 내 능히 말을 가리어 주리라.” 하고 드디어 마목(馬牧)에 가서 곧 긴 채찍으로 말들을 마구 후려치니, 뭇 말들이 모두 놀래어 달아나는데, 붉누런 말[騂馬] 한 마리가 2길[丈]이나 되는 난간을 뛰어넘어 달아나고 있었다. 주몽이 그 말이 뛰어남을 알고, 몰래 바늘을 말의 혀뿌리에 찔러 박으니, 그 말이 혀가 아파서 몹시 여위었다. 왕이 마목(馬牧)에 순행(巡行)하여, 뭇 말이 모두 살찐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해서, 그 중의 여윈 말을 주몽에게 주었다. 주몽이 그 말을 얻어 가지고, 그 바늘을 뽑고 더욱 잘 먹여서 몰래 오이(烏伊) · 마리(馬離) · 협부(陜父) 등 3인과 결탁하여 남행(南行)해서 개사수(蓋斯水)에 이르렀는데, 건너려 하여도 배는 없고, 쫓는 군사는 급히 따라오므로, 채찍으로 하늘을 가리키면서 몹시 분개하여 탄식하기를, “나는 천제(天帝)의 손자요, 하백(河伯)의 외손인데, 지금 난리를 피하여 여기에 이르렀사오니, 황천 후토(皇天后土)께서는 저 고자(孤子)로 하여금 빨리 주교(舟橋)를 이루게 하여 주소서.” 하였다. 말을 마치고 나서 활로써 물을 치니, 자라떼들이 떠올라 와서 다리를 놓아 주몽이 곧 건넜다. 한참 있다 쫓는 군사가 물[河]에 이르니 자라다리[鼈橋]가 갑자기 없어져서, 이미 다리에 올랐던 군사가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주몽이 그 어머니를 이별할 때 차마 떠나지 못하니, 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너는 한 어미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 하고, 오곡(五穀)의 씨앗을 싸서 주어 보냈는데, 주몽이 어찌나 생이별하는 마음이 간절하였던지 그 보리씨를 잊어버리고 떠났다. 주몽이 큰 나무 아래에서 쉬는데, 쌍곡(雙鵠)이 날아와 모이니, 주몽이 말하기를,

“아마도 이것은 어머니가 보내 주시는 보리씨리라.” 하고, 활을 당기어 쏘았다. 한 화살에 모두 떨어져서, 목구멍을 열고 보리씨를 꺼내고, 물[水]을 곡(鵠)에게 뿜으니, 다시 소생되어 날아갔다. 왕이 졸본천(卒本川)에 이르러 비수(沸水) 위에 집을 짓고,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 인하여 고(高)로써 성을 삼고, 풀더미[蕝] 위에 올라앉아서 대략 군신(君臣)의 자리[位]를 정하였다. 비류왕(沸流王) 송양(松讓)이 사냥하러 나왔다가, 왕의 얼굴이 비상함을 보고, 인도하여 함께 앉아서 말하기를, “궁벽한 바다의 모퉁이에 있어서 일찍이 그대 같은 사람을 만나보지 못하였는데, 오늘 우연히 만났으니, 어찌 다행하지 아니하리오. 그대는 어떠한 사람이며, 어디에서 왔나이까.” 하니, 왕이 대답하기를, “과인은 천제(天帝)의 손자로서 서국(西國)의 왕입니다. 감히 묻노니, 군왕은 누구의 뒤를 이었습니까.”

하매, 송양이 대답하기를, “나는 본디 선인(仙人)의 자손이라, 여러 대로 왕이 되었노라. 이제 땅이 작으니, 나누어서 두 임금이 될 수 없으며, 또한 그대는 나라를 세운 지 며칠 안 되니, 나에게 부속(附屬)함이 마땅하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과인은 하느님의 뒤를 이었고, 지금 왕은 신(神)의 맏자손이 아니면서 억지로 왕이라 하니, 만일 나에게 귀부(歸附)하지 아니하면, 하느님이 반드시 죽일 것이오.” 하였다. 송양이 왕으로서 늘 하느님의 자손이라 칭하였는데, 속으로 의심을 품고서 그 재주를 시험하고자 하여 말하기를, “왕과 더불어 활쏘기를 원합니다.”하고, 사슴을 그리어 1백 보(步) 안에 놓고 쏘니, 그 화살이 들어가지도 아니하였는데, 사슴의 배꼽이 손을 거꾸로 놓은 것같이 되었다. 왕이 사람을 시켜 옥가락지[玉指環]를 1백 보(步) 밖에 달아 놓게 하고 쏘매, 와해(瓦解)되듯이 부수어지니, 송양이 크게 놀랐다. 왕이 말하기를, “국업(國業)을 새로 세웠기 때문에 고각(鼓角)이 위의(威儀)가 없어서, 비류(沸流)의 사자(使者)가 왕래할 때에, 내가 왕의 예(禮)로써 영송(迎送)할 수 없으므로, 나를 가벼이 여기게 된다.” 하니, 종신(從臣) 부분노(扶芬奴)가 나아와 아뢰기를, “신이 대왕을 위하여 비류의 고각을 가져오겠나이다.”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남의 나라의 장물(藏物)을 네가 어찌 가져온다 하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이는 하늘이 주는 물건이온데, 어찌 가져오지 못하오리까. 무릇 대왕이 부여(扶餘)에서 고생하실때, 누가 대왕께서 능히 이곳에 이를 것이라 하였겠습니까. 이제 대왕께서 만사(萬死)에서 분신(奮身)하시어 요좌(遼左)에 양명(揚名)하셨으니, 이는 천제(天帝)께서 명하여 하셨음이온데, 무슨 일인들 이루어지지 아니하오리까.” 하고, 부분노 3인이 비류에 가서 고각(鼓角)을 가지고 왔다. 비류왕이 사신을 보내어 고하매, 왕이 와서 볼까 염려하여, 고각의 색(色)을 어둡게 하여 헌 것같이 해 놓으니, 송양이 〈와 보고〉 감히 다투지 못하고 돌아갔다. 송양이 도읍을 세운 선후(先後)로써 부속(附屬)을 삼으려고 하매, 왕이 궁실(宮室)을 짓기를, 썩은 재목으로 기둥을 해서 천년이나 묵은 것같이 하니, 송양이 와서 보고 마침내 감히 도읍을 세운 선후로써 다투지 못하였다. 왕이 서쪽으로 사냥가서 흰 사슴을 잡아 해원(蟹原)에 거꾸로 매달고 저주하기를, “하늘이 만일 비를 내려서 비류왕의 도읍을 표몰(漂沒)시키지 아니하면, 내가 결코 너를 놓아주지 아니하리라. 이 난경(難境)을 면하려거든 네가 능히 하늘에 호소하라.” 하니, 그 사슴이 슬피 울매, 그 소리가 하늘에 닿아서, 장맛비가 7일 동안 내리어 송양의 도읍을 표몰시켰다. 왕이 갈대새끼[葦索]를 횡류(橫流)시키고 압마(鴨馬)를 타니, 백성들이 모두 그 새끼를 잡은지라, 왕이 채찍으로 물을 그으니, 물이 곧 줄어들매, 송양이 온 나라를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검은 구름이 골령(骨嶺)에 일어나서, 사람들이 그 산을 보지 못하는데, 오직 수천 사람의 소리만 들리며 토공(土功)을 일으키니, 왕이 말하기를, “하늘이 나를 위하여 성을 쌓는 것이다.” 하였다. 7일 만에 구름과 안개가 스스로 걷히고, 성곽과 궁궐이 저절로 이루어지니, 왕이 황천(皇天)께 절하고 나아가 살았다. 9월에 왕이 하늘로 올라가서 내려오지 아니하니, 그 때의 나이가 40살이었다. 태자가 〈왕이〉 남긴 옥채찍[玉鞭]으로써 용산(龍山)에 장사지냈다.

관할[所領]은 군(郡)이 2이니, 중화(中和) · 상원(祥原)이요, 현(縣)이 8이니, 삼등(三登) · 강동(江東) · 순안(順安) · 증산(甑山) · 함종(咸從) · 삼화(三和) · 강서(江西) · 용강(龍岡)이다.

토관(土官)은, 동반(東班)이 도부사(都府司) · 군기서(軍器署) · 정설국(正設局) · 장작국(將作局) · 대흥부(大興部) · 융덕부(隆德部) · 천덕부(川德部) · 흥토부(興土部) · 전례국(典禮局) · 영작원(營作院) · 도진서(都津署) · 동면 도감(東面都監) · 서면 도감(西面都監) · 남면도감(南面都監) · 북면 도감(北面都監) · 유학원(儒學院) · 의학원(醫學院) · 역학원(譯學院) · 전주서(典酒署) · 진설서(陳設署) · 대창서(大倉署) · 장선서(掌膳署) · 대영서(大盈署) · 사옥서(司獄署) · 장루서(掌漏署) · 기자전직(箕子殿直) (모두 94인. ) 이요, 서반(西班)은 진서위(鎭西衛) 5령(領)이니, 각각 사직(司直)이 1인 (5품. ) , 부사직(副司直)이 2인 (6품. ) , 사정(司正)이 2인 (7품. ) , 부사정(副司正)이 2인 (8품. ) , 대장(隊長)이 20인, 대부(隊副)가 40인 (9품, 모두 3백 36인. )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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