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산성 앞의 명물 ‘갈대고기’

겸재의 그림 ‘행호관어에서 웅어를 보다’

‘송아노마드’ 송아회(松雅會)팀은 지난 4월 23일 논산으로 달렸다.

지금 강경으로 흐르는 금강에서 잡히는 웅어가 한창이라 이때를 놓치면 억세지고 뼈째 먹을 수 없다는 시절 여행삼아 논산으로 향했다. 예부터 대동강, 한강, 금강에서만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진 웅어는 뼈채 먹는 고단백 식품으로 알려져 있다.

사람이 잘 산다는 것은 시절을 잘 맞추어 산다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여러 성현들이 이미 갈파한 이치렸다. 농작물을 키워 키워보면 24절기가 그대로 들어맞는 느낌을 갖는다. 오랜 세월 농사를 지어온 선조들의 노하우가 맞아든다는 게 참 신기했다. 다 때가 있는 법이란 말이 나이 들면서 더욱 절실해 지니말이다. 그런데다가 신토불이란 공간적인 것과 환경적인 요소도 거의 들어맞는다는 것에도 반론의 여지가 없다. ‘송아회’의 주유천하는 그 지방에 직접 가서 직접 접한다는 모토가 부합하는 여행이다.

논산에서 논산출신의 김광순 시인을 만나 논산 주변을 돌아다녔다. 박범신 문학관, 김홍신 문학관, 관촉사, 탑정저수지 등을 두루 돌았고 그리고 금강에서 잡은 귀한 웅어회를 먹었다.

웅어! 일명 위어, 갈대고기라고도 한다.

갈대가 많은 곳은 어딘가?

‘행호관어’ 라는 그림이 생각난다.

겸재가 300년 전에 만든 그림집 ‘경교명승첩’에서 만나는 그림.

그 그림에서 오늘 우리는 삼백 년 전에 한강을 돌아볼 수가 있게 됐다.

겸재가 이 그림들을 특별히 후손들에게 보관해달라고 부탁하면서 ‘천금물전’이라는 인장을 찍었다. 겸재는 그림 몇 장이 소중한 것이 아니라 그 그림 속에 담겨진 우리 한강의 옛 풍경 모습들 그리고 아름다운 이 국토의 모습을 오래도록 우리 후손들이 기억하고 간직해주기를 바랐던 것이 아닐까. 지금 여기서 그 현장화 아카이브가 시작된다.

바닷배들은 난지도 앞을 지나 서강 지역까지 충분히 올라갈 수 있었다.

겸재의 그림에는 서강을 지나 동작진까지 쌍돛배를 그려놓고 있다.

돛대가 하나 있는 경우도 있고 두 개가 있는 경우도 있다. 바다를 운행하는 배가 두 개의 돛을 단다고 한다.

노량진까지 조수의 영향을 받아서 배가 올라온다고 하면 대개 동작진 쪽으로 온다. 동작동 그쪽으로는 수심이 깊다. 그러니까 바다에서 올라온 배는 거기까지는 갈 수 있다고 본다.

한강 상류는 수심이 깊어 물때만 잘 맞추면 바닷배까지 올라갈 수 있는 것이 당시 동작진이었다. 아주 간단하고 쉽게 그려진 듯한 몇 척의 배 속에서도 겸재는 많은 이야기를 담아두고 있다.

겸재의 그림 속에는 각 나루터를 이용하는 이 돛단배들의 상황까지 아주 정확하게 담아내고 있다. 그 그림 중에 등장하는 고기잡이배들이 있다.

‘행호관어’에서 ‘행호’라면 지금의 행주산성 앞에 한강을 가리키는 말인데 ‘행호에서 고기를 보다’라는 제목이 붙여진 그림이 있다.

겸재의 한강 그림 중에서 고기잡이배가 가장 많이 등장하는 걸로 봐서 아마 이 일대에 고기잡이가 꽤나 성행했던 것 같다.

이렇게 많은 고깃배들이 무슨 고기를 잡기 위해 모여든 것일까? 경교명승첩을 들여다보면 한 선비의 집에 생선 꾸러미가 배달돼 온 그림이 있다.

잎이 넓은 활엽수가 마당 가득히 채워져 있는 것으로 봐서는 초여름인 것 같다.

삼백 년 전 한강에서 서식하던 물고기를 보면 대략 80여 종이다. 그 중 늦봄에서 초여름 사이에 많이 잡히는 것은 뱅어, 살치, 황복, 웅어, 싱어, 모래무지 등인데 이 중에서 겸재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물고기와 가장 형태가 비슷한 것이 웅어이다. 어부들이 흔히 갈대고기, 위어로 부르던 웅어였다. 예로부터 대동강, 한강, 금강에서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진 위어는 뼈째 먹는 고단백 식품이다.

삼백오십 년 전 기록에 의하면 이 웅어는 늦봄에서 초여름 사이 행주산성 부근에서 주로 잡히는 고기였다. 왕이 사는 도읍지는 꼭 따라다닌다는 전설을 가진 한강의 명물이었다.

웅어는 보통 때는 바닷물하고 민물이 섞이는 곳에서 살다가 봄이 되면 민물로 올라온다.

산란하기 위해서 올라오는데 주로 갈대밭에 산란을 한다. 행주산성에서 내려다보면 한강이 흐르고 있는데 그 일대가 아주 갈대가 무성했다. 그래서 거기에 알을 낳기 위해서 올라오는 것이다.

행주산성 앞 한강은 지금도 낚시꾼들이 많이 찾는 한강변 고기잡이 명소다. 그렇다면 겸재 그림 속의 그 한강 웅어를 지금도 만나볼 수 있을까. 삼십 여년 전만해도 이곳에서 웅어가 굉장히 많이 잡혔는데 강물이 오염됐는지 요즘엔 웅어가 안 보인다. 지금 회집 같은 데 보면 강경, 목포 쪽에서 많이 올라온다고 한 낚시꾼은 말한다.

웅어회

이미 한강에선 사라져 버렸지만 어부들 사이에선 잊지 못할 고기로 남아 있는 웅어 그것은 얼마나 귀하고 인기 있는 것이었을까

고양시 행주산성 부근에 남아있는 얼음창고 석빙고의 흔적이 조선시대 웅어의 인기를 짐작케 해준다. 이 석빙고는 조정에서 관리하던 왕실 전용 얼음 창고였다. 이렇게 공들여 석빙고를 만들었던 것은 웅어 때문이었다. 고양 지역에서 나오는 수십여 종의 특산물 중에서 임금님께 진상하던 것은 웅어가 유일하다.

그리고 예전의 기록을 보게 되면 이 웅어와 석빙고를 관리하기 위해서 사옹원의 관리가 여기에 머물면서 집중적으로 관리했다고 했다.

웅어철이 돌아오면 가장 좋은 것은 임금에게 진상하고 남는 것은 한양의 세도가들 차지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더 이상 웅어는 한강의 명물이 아니다. 그만큼 한강물이 오염됐다는 이야기다. 초여름 저녁노을이 질 무렵 행주산성 앞 한강을 가득 메웠던 웅어잡이 고깃배들 겸재가 근무했던 양천관아에서 행호를 내려다보며 한강의 풍광을 그리던 겸재의 손에 의해 웅어 이야기는 지금까지 그림으로만 이어지고 있다.

겸재 정선은 양천현령 시절에는 진경산수화를 완숙의 경지로 올려놓은 시기로 알려졌다.

5년간 양천현령으로 근무하면서 이병연과 시화를 교환(경교명승첩, 간송미술관 소장)하고, 기념비적인 역작들을 남겼다.

논산. 적어도 대한민국 남자들에겐 피할 수 없는 국방의 의무이지만 나에겐 아릿한 슬픔의 순간이 녹아있다. 한창 피가 끓어오르던 나이에 나에게 다가서는 인생의 통과제의 같은 시간이다. 제어하기 힘든 피 끓는 나이에 자유보다는 속박, 창조보다는 엄격한 제재의 틀 속에 갇힌 현실이 나를 압박하던 시간이었다. 티미한 삶을 유예하던 시절, 단단히 조여매고 평생 삶의 밑바탕을 삼을 수 있는 논산군사훈련소가 있던 곳이다. 내 나이 25살, 동기들이 모두 제대할 무렵 나는 늦게 군에 입대하자 ‘할배’라는 별명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29연대 일 것이다. 1달간의 제식훈련 즉 기본 훈련을 받던 곳이다. 3월 7일 군번으로 고향 집결지에서 머리를 빡빡 밀고 기차를 타고 연무대역까지 느릿느릿 달려갔던 길. 사람을 죽이는 총을 쏘고 혹독히 훈련을 받아야 하는 절체절명의 시기, 잠재적인 생사의 공간에 갇힌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큰 불안감과 동시에 새로운 도전이었는지 마음이 다 잡히지 않는다. 긴장감을 부딪치며 오랜 기차여행을 했는지 아릿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기차간에서 잡생각을 없애려는 듯 몇 번이나 군기잡기 겸 정신 차리기 기압(?)이 시도 된다. 인솔 군인이 우리에게 군기를 잡기 시작했다. ‘의자 위에 수류탄!’ 하면 모두 의자 밖으로 몸을 피신해야 했고 ‘위자 밑의 수류탄!’ 외치면 의자 위로 모두 몸을 올렸다. 서로들 갈팡질팡하면서 끌어안으며 엉키며 긴장감을 다소 해소시켰다. 긴장을 풀고 잡생각을 해소하면서 때로는 재미도 있었고 또 그 강압적인 군기에 대한 까닭모를 억압감도 느꼈다. 이제 끌려 들어가면 꼬빡 32개월을 채워야 하는데 피 끓는 젊은 나이에 어떻게 규칙을 견딜까하는 아찔한 절망감까지 엄습해 왔다. 그 당시 잠시 나를 만났던 여자가 하는 말 ‘국방색을 보면 어쩐지 슬픔을 느낀다’고 했던 말도 생각난다. 그런 잡생각이 범벅이 됐지만 우리는 우르르 의자 밑으로 뛰어내려야 했고 의자 위로 오르면서 몇 번 몸을 풀고 나자 처음으로 군대 건빵이 주어지지만 입에 먹히지도 않았고 한없이 달려가는 게 마치 닥터지바고의 대지를 달리는 열차처럼 고뇌와 응어리진 지루함을 싣고 이어지는 기행이었다. 거의 저녁 무렵이나 연무대역(지금은 흔적만 남은)에 도착한 듯싶다. 역에 내려서 전열을 가다듬고 행진을 하기 시작했다. 걸어서 군사 훈련소까지 행진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점점 어두워졌고 마침 반대편에서 행진해 나오는 군인들의 행렬과 비껴가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듯 그들은 군복과 군모를 쓰고 더블 백을 메고 나오는 훈련을 끝내고 나오는 자대로 배치되는 병력들이다. 아 저들만 되도 좋겠네! 그때 나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 1달 전이라면 2월 초에 입대한 동생이 생각났다. 아 어둡지만 않아도 얼굴이라도 볼 수 있을 텐데 하는 그러나 어두워서 형체들만 보이고 지나칠 때의 그 애잔함이 밀려들었다. 분명 동생이 훈련을 마치고 아직 장정으로 사복을 입은 우리들과 비껴갈 텐데 하는 생각이 들자 애잔한 생각이 울컥 밀려오고 동생도 저렇게 훈련을 받고 나오는데 형이 무너져서야 되겠냐는 형님의식이 퍼뜩 들어 마음을 다지고 씩씩하게 걸어 들어갔던 그곳 29연대다. 그곳을 한번 보고 싶고 느끼고 싶었어나 결국 시간이 부족해 연무대 앞을 지나지도 못하고 돌아와야 했다. 다만 그때 내렸던 강경역만 보았다. 또 한 번의 미진한 숙제로 남았다.

글 | 정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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